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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쥐 Feb 17. 2021

나는 더 따뜻한 사람이 고프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것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를 거쳐 나이 마흔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칭찬하는 법이 없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이던 시절, 잘 나온 내 사진을 미니홈피에 올리기라도 하면 예쁘다는 칭찬은 커녕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서로 놀리고 낄낄대기 일쑤였다. 그게 엄청 상처가 되었냐, 묻는다면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유유상종 아니겠는가, 나도 칭찬에 인색하기는 마찬가지인 인간이었으니 친구들이 날 놀려도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들의 대화를 보고 혼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당시 내 남친, 현 남편이었다.


"예쁘게 나온 사진에 그 친구는 왜 말을 그렇게 해?"

"에이, 그냥 친구들끼리 재밌자고 하는 말이지,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친구들이 날 놀리는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하는 남친을 달래다, 우리 둘의 싸움으로 번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친이 답답했고, 남친은 장난에도 정도가 있다며 그 친구들이 널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는지 의문이라고 내 가슴에 칼을 꽂았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남친과 내 절친들 사이에 알게모르게 벽을 쌓았고, 양쪽의 말이 서로에게 전달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친구가 가족보다도 중하게 느껴졌던 10대와 20대가 지나가고, 30대에 해외에 나와 절친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지내며 예전과는 생각이 많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차갑고 냉소적인 게 쿨하게 느껴졌던 10대~20대와는 다르게, 나이가 먹어 그런 건지 외국에 나와 오래 살아 외로워 그런 건지,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따뜻한 사람이 그립고 고프다. 오랜만에 올린 내 사진에, 놀리듯 비웃는 코멘트보단 '어떻게 지내? 좋아 보인다. 보고싶다.' 하는 말이 더 듣고 싶은 거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교회에서 찍은 우리 가족 사진을 올렸더랬다.

외국에 살며 이곳 미용실에서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 예쁜 파마를 하는 건 사치였기에 사진 속 나는 어수선하게 자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지저분한 앞머리에 삔을 꽂고, 카키색 버버리를 입은 채였다. 안구건조증이 심해 콘텍트렌즈는 일 년에 10번을 낄까 말까였기에, 이제 슬슬 노안이 오기 시작한 눈에는 네모진 레오파트 뿔테 안경을 썼다.


그리곤 오랜만에 친구와 한 통화해서 뒷골 땡기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등학교 동창 넷이 모여 내 카카오톡 사진을 보고 빵 터졌다며, 친구가 웃으며 이야기를 전하는데 예전처럼 웃음이 나질 않았다.


"야, 너 대체 그 안경은 몇 년째 쓰는 거야. 한국에 들어와서 라식을 해 라식을. 대체 왜 매일 안경을 쓰고 다니는 거야, 눈화장도 좀 하고 옷도 예쁘게 좀 입고 다니지. 그 옷은 대체 뭐야. 북한 사람인 줄 알았잖아. 애도 왜 그런 색 옷을 입혔어.
머리 꼴은 그게 뭐고, 앞머리 삔 꽂은 거 보고 우리 모두 빵 터졌잖아 하하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내 표정은 점점 썩어들어갔다. 외국에 나와 살며 속상하고 서러운 일도 있지만, 한국에 살지 않아 좋은 점 하나를 꼽자면 '남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거다.


물론, 외국 중에서도 이탈리아는 조금 특수한 케이스긴 하다. 잘 차려입을수록 또 명품을 하나라도 더 걸칠수록 사람들이 날 보는 시선에 경멸과 무시가 덜어지고, 아 너는 좀 사는 동양인이구나 하는 평가가 더해지니까. 하지만 그렇다해도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국에서보다 자유롭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어떤 화장을 했든 (혹은 하지 않았든), 엉덩이가 얼마나 투실투실하든, 허벅지 양옆으로 권총이 있든 없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시즌마다 유행하는 아이템을 걸치지 않아도, 쟤는 유행도 모른다는 핀잔을 듣지 않는다. 각자 타고난 생김새가 다르고, 좋아하는 스타일이 다른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중요한 자리에 샤넬백을 들지 않아도, 명품백 하나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외려 한국 결혼식에 샤넬백을 들고 갔을 때, 한 사람 걸러 한 명씩 샤넬백을 들고 있는 결혼식장에서 몰개성의 수치를 느꼈더랬지... ) 그러니 여기서는 나도 남들 시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게 어울리는 것을 사고 또 입게 된다. 



타박을 주는 친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정색하고 한마디 했다.

"야, 지구 반대편 살면서 내가 느들 눈치 봐야겠냐. 너네도 정말 못됐다. 자리에도 없는 친구를 그렇게 까대고 싶든?"


그랬더니 친구의 말이 가관이다.


"야, 우리가 진정한 친구니까 너한테 이런 얘기도 해주는 거야. 애정이 있고 아끼니까 하는 말이지, 이런 얘기 너한테 누가 해주겠니? 잘 새겨들어!"


이것들이 진짜, 내가 이런 넘들을 친구라고 이제껏 챙겼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 더 분했던 것은 친구들의 말에 내가 정말 그렇게 구린가 하고, 한껏 낮아진 자존감으로 사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내 자신이었다.


'너 알프스 산밑에서 자연인으로 늙어가는구나. 표정이 보기 좋다'고 말해줄 수 있는 걸, 애정 넘치는 내 친구들은 꼭 저따위로 말을 해야 속이 시원했던 걸까. 전화를 끊고 나서도 누군가 뒤통수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뒷골이 땡기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연애할 때 남편이 종종 내게 시비걸 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친구들은 널 존중하지 않아, 왜 그걸 몰라?"

나와 친구들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라고 여겨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그 말이,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어쩌면 제3자의 눈으로 본 정확한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도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는, 서열의 맨 마지막에 있는 사람이었나보다. 





나이가 들며 이전에는 절대 변치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랑이 변하는 경험도 하고, 과거 목숨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우정이 사실은 별볼 일 없는 나만의 고집이었단 것을 깨닫기도 한다. 난 과거 차갑고 냉소적인 친구들이 쿨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뜨뜻하고 인간적인 사람에게 더 끌리고 마음이 간다. 인생 40년 살고 보니 인생이 짧디짧다는 것이 이렇게나 실감나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더, 네 이런 모습이 참 좋다, 네가 내 친구라서 참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 싶지, 내 못난 점을 들춰 면박 주는 친구를 굳이 찾아 만나고 싶지 않은 거다.


우리는 죽고 못사는 절친 사이라는 소속감에 눈이 멀어,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눈여겨 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조금은 안쓰럽지만, 뭐 괜찮다. 다 그러면서 인생을 배워가는 거니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인 거겠지.


멀찌감치 떨어진 이곳에서 서울을 보고 있자니, 복닥이는 도시에서 남들과 나를 계속해서 비교하고 낮아진 자존감으로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보인다. 예전에는 나도 그중 하나였고. 내일이라도 서울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들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기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남들과 나를 계속해서 비교하는 한, 내가 행복해지는 길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따뜻한 말과 뜨신 손을 건넬 수 있을 때 더 행복해질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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