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되는 것은 없을지니, 얄궂은 운명
"아직도 학교로 올 생각이 있냐고 묻는데?"
이메일을 받은 남편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어디 캠퍼스래? 애틀랜타? 설마....사바나는 아니겠지?"
"이번엔 사바나야...그냥 생각 없다고 답장할게. 사바나 가기는 싫댔잖아."
"아니, 잠깐! 그렇게 단번에 거절할 건 아니고...우선 인터뷰부터 진행해보지 뭐... 그리고 마지막에 애틀란타로 바꿔달라고 얘기해볼 수도 있잖아."
"...알았어. 그럴게."
남편은 안 내키는 얼굴로 그러겠노라 했다.
2년 전, 내가 이탈리아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남편을 후라이팬에 깨볶듯 볶아 미국 예술대학교의 애틀란타의 분교에 넣었던 원서가 어떻게 돌고돌았는지 사바나 본교로 넘어가, 그쪽에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이탈리아를 떠나는 것도 좋고, 말 편한 영어권인 미국인 건 좋은데, 사바나라...대체 어디 붙어있는 도시지.
얼른 구글과 네이버에 관련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사바나, 혹은 서배너.
미국 조지아 주 동쪽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 1733년에 건설되었으며 주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이다. 근처의 서배너 강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으로 '평야'라는 뜻이다. 미국 제2의 면화 수출항이며 담배도 수출한다. 식민지 시대의 건물이 많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이것저것 검색해본 결과는 한 줄로 요약됐다.
겁나 시골이구나.
한인도 별로 없고, 고로 한인마트도 없고, 학군도 별로고, 치안도 별로래고, 날씨는 여름에 무진장 습하고 덥대고...다들 여긴 절대 오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분위기였다. 이름만 들으면 미국이라기보단 왠지 쿠바에 가까울 것 같은 느낌적 느낌 하하
이태리에 살짝 정도 붙었는데, 그냥 가지 말까...도 했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인터뷰이니 그냥 진행시켜보고, 합격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남편과 결론을 냈다.
참 인생 얄궂기도 하지.
남편이 꼭 가고 싶어했던 회사 인터뷰는 늘 지지부진하다 끝내는 불발되길 반복하더니, 갈까말까 고민되는 학교 인터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의 강의를 한 인터뷰도 꽤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끝났단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남편의 표정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뭔가 되어가는 모양새가, 그냥 될 것 같았다. 느껴지는 플로우가, 이건 되는 거였다.
인터뷰를 잘 마치고도 남편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남편은 아직 현직에서 교수로 가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엄밀히 말해 현직을 떠나 교직으로 가는 게 자신에게 맞는 길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이탈리아를 떠나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이미 5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낸 이상, now or never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말로는 학교에서 불합격 통지가 오면, 마음의 짐을 털고 비싼 와인을 사다가 파티를 하자고 했지만, 남편도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마도 이 기차를 잡아타고 이탈리아를 떠나게 될 것임을.
최종 인터뷰가 끝난 뒤 우리는 돌로미티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아름다운 알프스, 아름답지만 충분히 봤어, 더이상 보지 않아도 아쉽지는 않을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쩌면 당분간 보지 못할 알프스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휴가의 마지막날, 별을 보러 벌써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언덕에 올랐을 때였다.
별 대신 사방을 가득 메운 안개에 오늘밤은 아무것도 안 보이겠구나 실망하던 찰나, 남편의 전화기로 합격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