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고 코 베이는 이곳은 미국
이태리를 떠나면서 많은 것을 버리고 왔다.
5년 전, 이태리에 도착해 여기는 잠깐 있다가 떠날 곳이니까 하는 생각에 가구는 무조건 저렴한 이케아에서 샀다. 제일 싼 라인은 너무 허접해서, 늘 그것보다는 하나 높은 라인으로 가구를 샀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이태리에서의 5년을 무사히 났다.
이태리에서는 모든 가구가 구비되어 있는 집을 찾기가 어려운 편이다.
침대, 소파는 차치하고 부엌에 싱크대와 조리대, 찬장이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 우리 집도 'vuoto', 그러니까 영어로는 'empty', 변기와 세면대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집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다 채워야 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사를 나오며 쓰던 가구 대부분을 중고 시장에 팔아넘기고, 다짐 또 다짐했다.
미국에 가선 절대 이케아를 사지 않으리,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으리.
이제는 좋은 가구 비싸게 주고 사서, 이사를 간다고 해도 끌고 다니며 오랫동안 쓰자고 말이다.
그렇게 호기롭게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왔는데, 아 안타깝게도 나는 다시 이케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미국 본토 브랜드 가구는 이쁘지도 않았고, 그리 고급스럽지 않은 동네 가구점의 가구 가격도 이케아의 2배에서 시작했다.
물론 이케아의 5배~10배 정도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훨씬 예쁘고 모던한 가구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정은 그런 럭셔리 가구를 살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기웃기웃하다가 내린 결론은 이태리 때처럼 모든 걸 다 이케아로 채울 필요는 없어도 아이들 방에 놓을 책상, 침대와 거실에 둘 소파는 이케아에서 구입하자는 것.
주요 가구를 이케아에서 사고 싶지는 않았는데 소파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다른 사이트에서 조금 예쁘다 싶은 소파는 모조리 물건이 없거나 배송이 3~5달 후...가죽에 디자인 좀 괜찮다 싶으면 3석 소파 가격이 최소 5,000달러 비싸게는 10,000달러까지 올라갔다. 이것저것 살 게 천지인 정착 초기에 10,000달러는 큰 금액이다. 그리고 그렇게 비싼 소파를 산다고 해서 나의 삶이 현격하게 올라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브랜드를 낮추되 라인을 높이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선택한 소파가 바로 이케아의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요놈, Stockholm이었다.
가격은 2,500달러, 다른 메이저 브랜드의 비슷한 디자인 소파보다는 훨씬 저렴하지만 그래도 이케아 가구치고는 비싼 편이다.
이케아가 저렴이 가구의 대명사긴 하지만 사실 매트리스도 고가 라인은 타브랜드 대비 가격도 합리적이고 품질도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기에, 소파도 비슷할 거라 믿기로 했다. 가구 만드는 회사니까 소파도 기본은 하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계속된 쇼핑에 눈이 빠질듯 아프고 머리도 어질거리던 차라 그냥 이걸로 고!를 외쳤다.
그렇게 일요일 아침, 눈뜨자마자 토요일 내내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소파와 아이들 책상 그리고 침대 옆에 놓을 작은 베드 스탠드 등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포함해 결제를 했다. 배송료는 220달러, 거기에 늘 마지막에 두 숟가락 정도 얹는 것 같은 느낌의 세금까지 더하니, 가격은 3800여 달러.
그래, 비싼 것 같아도 다른 데서 사는 것보단 이게 싸다 하면서 결제를 했더니만, 내내 강의 준비로 정신이 없던 남편이 어느새 오더니 내가 고른 베드 스탠드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난처한 표정을 했다..."이 스탠드만 다른 걸로 바꿀 수는 없나? 디자인이 좀 그런데...."
와, 토요일 밤 내내 나 혼자서 끙끙대며 가구 고를 때는 한 번을 안 들여다보고 나보고 알아서 하라더니...살짝 신경질이 나려다가 참기로 했다. 내가 등 떠밀어 커리어까지 바꾸고 미국에 와서 강의 준비에 며칠 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남편한테 이런 걸로 신경질을 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평소의 나와는 달리 땍땍거리는 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남편 말에 따라 주문을 수정해 보기로 했다.
이케아 Live chat으로 문의를 했더니, 주문 부분 수정은 안된다며 아예 주문을 취소하고 다시 넣으라고 했다.
그래서 시킨대로 기존 주문을 취소하고 새 주문을 넣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주문을 넣자마자 15분만에 주문을 취소했음에도, 결제된 카드금액을 다시 환불받기까지는 10~14일이 걸린다는 것!!!
나는 3800달러를 주문했다가 취소했고 이어 다시 3800 달러를 결제했으므로 통장에 타격은 적잖았다. 그래도 뭐 결국은 돌려받을 돈이니까, 하고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고.
그리고 대망의 소파 배달 예정일이었던 지난 토요일, 주말이었지만 가구를 받아야하니 아무데도 나가질 못하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집에서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하루종일 우리를 기다리게 만든 이케아 배달팀은 저녁 6시가 넘어서 우리 집에 도착했다.
늦게 온 것까진 괜찮았다. 갑작스러운 재고 부족으로 배송 자체가 취소되는 경우도 많다는데, 그래도 약속한 날짜에 와준 게 어디냐 싶기도 했고.
문을 열어주자, 덩치 좋은 배달 직원들이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소파가 안 보이는 것이다. 소파 없어? 하고 물어보니 읭? 웬 소파? 하고 오히려 당황하는 눈빛이다.
맞다. 소파는 오지 않았다. 배달팀이 가자마자 고객센터에 전화해 물어보니, 배달 중 분실이란다...
그렇게 큰 소파가 어떻게 분실이 될 수 있는 건지, 그냥 창고에서 물건을 안 실은 것 같은데... 하지만 이케아 상담원은 내게 고해성사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소파는 이케아측에서 배달료와 함께 환불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상담원은 내게 다시 주문을 넣으라고 했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궁시렁거리며 다시 주문을 넣었다. 이번 결제 금액은 약 2800달러.
두 번째 결제금액이었던 3800달러 중 소파 미배송으로 인한 환불금도 약 2800달러, 이 돈도 한참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난 3800+2800달러의 돈을 이케아에게 맡겨놓은 셈이었다.
그렇게 꼬박 2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첫 주문로 벌써 받았어야 할 3800달러는 여전히 입금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케아에 연락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 아 그 환불금은 이케아 기프트 카드로 적립되었는데?
이케아 환불의 기본 정책이 기프트 카드 환불이라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원래 결제수단으로 환불이 기본이란다. 그래서 그럼 나는 왜 기프트 카드로 환불을 해준 거야? 하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을 안해준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기기 위해 급급한 느낌. 어쨌든 원 결제수단으로 환불 수단을 바꿔줄 테니 서비스센터로 전화를 하란다.
별 수 있나, 다시 전화를 했다. 환불이 원 결제수단이 아닌 기프트 카드로 되었다고, 다시 원 결제수단으로 바꿔달라 말하니 알겠단다. 시스템에 그렇게 요청을 했단다. 그러면서 앞으로 3~5일 사이에 전담팀에서 연락이 갈 거란다. 아니, 나는 왜 또 기약없이 3~5일 동안 그 전화를 기다려야 하는가. 그리고 3~5일 후 그 전화를 받으면 그 직원은 나더러 정식으로 요청이 접수되었으니 환불까지 다시 10~14일을 기다리라고 할 것이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가 되는 상황인 거 같았다.
나는 이케아 서비스센터에 다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적은 돈도 아닌데 환불금을 3주 넘게 기다리는 건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상황을 들여다보겠다며 안내음만 틀고 홀연히 사라진 상담원. 20분을 기다렸는데...갑자기 통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다시 콜백을 해주겠지,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전화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3분 정도 기다려보았으나, 전화는 끝내 걸려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원위치. 나는 다시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상담원은 다시 한 번 상황을 들여다보겠다며 안내음을 틀고 사라졌다.
그리고 20분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재등장한 상담원! 그녀는 상황 파악됐고, 기프트 카드 환불을 원 결제수단 환불로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안내음 틀고 20분씩 사라지는 것도 상담 매뉴얼 중 하나는 아닐까 의심이 됐다. 기다리는 동안 솟구쳤던 화가 사그라들고, 다시 나타나준 상담원이 고맙게까지 느껴지니!)
아니아니, 그건 이미 신청이 되었고, 환불 기간을 줄여달라는 건데?
했더니 당황한다. 아무래도 그전 상담원이 접수했다고 한 내용이 접수가 안 된 모양?
이쯤되니 기가 막혀오는데, 때마침 선심쓰듯 덧붙이는 상담원의 마지막 한 마디,
그리고 배송비 220달러도 환불해줄게.
응? 뭐라고? 그럼 원래는 배송비 220달러를 환불을 안해줄 생각이었던 건가?
물어보니 그랬다. 첫 주문 취소에서 배송비는 환불이 안 되는 거였다...주문 넣고 15분만에 취소했어도, 배달 예정일은 주문일로부터 일주일 후였어도, 한 번 넣은 주문을 취소하는 댓가가 220달러라니...후덜덜했다.
물론 이케아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싸우면 받아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또다시 여기로 저기로 돌려지면서 한 시간은 날려야 했을 것이다...
미국에 온지는 이제 막 한달이 지났지만, 이럴 때 미국의 자본주의를 실감한다.
곳곳에 내 돈을 가져가려 파놓은 함정이 한둘이 아닌 느낌.
큰맘먹고 산 템터페딕 매트리스도 그랬다.
비싼 매트리스인 만큼, 90일 동안 사용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바꿔준다고 그렇게 광고를 하더니...
막상 주문한 킹 사이즈가 생각보다 커서 퀸으로 바꿀까 했더니 교환은 더 고가의 제품으로만 가능하고 사이즈 다운그레이드는 해주질 않는단다.
눈 뜨고 코베인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건가.
이태리의 무뚝뚝한 사람들한테 당한 게 많아, 미국에 와서는 상점 직원들의 한결같은 (가식적인) 자본주의식 친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기계적 친절함 속 90%는 결국은 날 이용해 돈을 벌려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의도라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 우리 이 땅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