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부터 갑자기 오른쪽 가슴에 딱딱한 무언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멍울은 아니고 뭔가 가슴 안에 커다란 공, 그러니까 야구공 크기만한 뭔가가 딱딱하게 만져지기 시작한 것.
만졌을 때 크게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그러다 말겠지, 하고 놔두었다.
한국에 있었대도 득달같이 병원에 달려가 검사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늘 그렇듯, 그러다 말겠지 하고 놔두었겠지.
부모님께 감사하게도 건강한 체질을 타고난 덕분에, 나는 이제껏 살며 아파서 병원에 간 적이 정말 손에 꼽는다.
몸이 아파도 그냥 약국에서 적당한 약 사다가 하루이틀 열 내고 땀 내며 고생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나아 역시 나는 건강 체질이야, 하고 의기양양했었지.
그렇게 병원과 늘 거리를 두고 살아왔기에, 미국에 처음 와서도 사람들이 병원 정하고 주치의 먼저 정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사실은 귓등으로 듣고 넘겨버렸던 게 사실이다.
그렇게 반 년을 버티다, 지난 여름 한국에 갔을 때 했던 건강검진에서 '고지혈증'에 가까운 고콜레스테롤 진단을 받고 주기적 검사가 필요하겠다 싶어서 병원 등록을 서둘렀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한 건 8월, 그리고 예약이 잡힌 건 11월 중순 즈음....
악명 높다고 들은 미국 병원의 느린 예약 시스템은 내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3개월을 기다려 방문한 병원에서 나는 내 주치의가 될 사람을 처음 만나 지난 병력을 줄줄줄 읊고 내 건강 문제에 대해 짧게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내 가슴 이야기를 꺼냈다.
공처럼 딱딱한 게 만져진다고, 뭔가 염증이 생긴 것 같다고 말이다.
가슴이 딱딱해지고도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처음보다 살짝 풀어지는 것도 같아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의사는 생리주기에 따라서 그런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두고 보자는 이야기만 했다.
한 달이나 지속되었으니 생리주기 때문에 나타난 증상 같지는 않았지만, 의사가 그러자고 하니 토를 달기도 뭐해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가슴의 딱딱한 공은 사라지지 않았다.
살짝 풀어지는가 싶다가도, 왼쪽 가슴과는 달리 뭔가 딱딱해진 그놈은 가슴에 뿌리를 딱 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인터넷으로 내 증상을 서치해보기도 했다.
열심히 조사해본 결과, 내 증상은 비수유기 유선염과 많이 겹쳤다.
이건 항생제로 치료하는 병인데, 한국이고 미국이고 항생제는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야 복용할 수 있으니...
그런데 가슴을 보는 부인과 의사를 만나려면 주치의를 만나 레퍼럴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 병원은 처음이라, 이건 어떻게 받는 건지, 주치의한테 먼저 진단을 받아야 하는 건지...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다.
그렇게 어떻게 하나, 어떻게든 되겠지 사이를 반복해 오가던 사이 12월이 됐다.
오른쪽 가슴 안의 공은 계속해서 내 신경을 긁고 있었고 참다 못한 나는 병원 앱을 사용해 주치의에게 가슴 상태를 논했다.
주치의 왈, 한 번 병원으로 와보란다.
뭔가를 해주기라도 하려나, 혹시 항생제를 처방받을 수 있을까, 한 줄기 희망을 가지고 병원을 찾았다.
30분을 대기하고 만난 주치의는 내게 요즘 상태를 물었고, 나는 앱에서 보냈던 메시지에 썼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해 답했다. 조금 소프트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공은 여전히 거기 있고 신경이 쓰인다고.
그랬더니 주치의 선생님 왈, 그럼 조금 더 두고보잔다.
잉? 네에? 아니 선생님, 그냥 조금 더 두고 보자고 할 거면 날 병원으로 왜 부른 건가요.
고작 이 3분 상담에 나는 코페이 45달러를 내야 하는데...
나는 용기를 짜내어 내가 인터넷에서 서치해봤는데 증상이 유선염하고 비슷하던데...이건 항생제가 필요한 병이라던데 혹시 항생제를 처방해줄 수 있을까요? 라고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의사들이 제일로 싫어한다는...비전문가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만 보고 자가진단하고 자가 처방하는 진상 짓을 한 것이다. 나도 진상짓은 하고싶지 않았지만...아니, 주치의 양반아. 그럼 날 진단해 주던지. 당신이 남자긴 하지만, 나는 환자 당신은 의사, 나는 내 병든 가슴 따위 부끄러워하지 않고 검사받을 의지가 넘쳤는데...
여튼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내 주치의는 유방도, 자궁경부암 검사도 직접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가 남자 의사인 그에게 유방 검사를 받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굳이 검사를 권하지 않았다고 했다. 헐...이게 말인지 방구인지...
여튼 그날도 난 조금 더 지켜보자는, 지난 번과 똑같은 의사의 말을 듣고 병원을 나서야 했다.
물론 코페이 45달러는 내야 했고.
그런데 연말 모임을 맞아 한 두 차례 술을 마시면서 상태가 급 악화되었다.
안 그래도 딱딱했던 공이 더 커지고, 급기야 유두 주위로 커다란 수포가 올라온 것.
이제는 만지면 정말 아프기까지 했다.
내 오른쪽 가슴은 정말 흉측한 모양이 되어있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오늘의 가슴 상태를 확인할 때마다 내 몸속에 숨겨져 있던 경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큰일났다! 이거 보통 병이 아닌 거 같은데! 너 큰 병 든 거 같아!
설마 암은 아니겠지...암이면 어떻게 하지, 짐싸서 애들 데리고 바로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나.
그럼 남편 직장은 어떻게 하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가족들과 무비 나이트를 한다고 영화를 틀어놓고도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핸드폰으로 폭풍 검색을 했다.
그렇게 한 시간 구글과 네이버를 들락거리다, 드디어, 드디어 내 병과 비슷해 보이는 병을 찾았다.
유선염을 초기에 치료하지 못했을 때 염증이 악화되어 생긴다는 그 이름도 무서운...유, 방, 농, 양.
내 오른쪽 가슴을 아프게 하는 놈은 바로 그 놈으로 보였다.
부어오른 가슴과 유두 주위에 올라온 수포 모습까지 똑같았다.
하루빨리 병원에 가야하는데, 이런 제길 왜 하필 크리스마스 + 뉴이어 연휴에 상태가 급악화되는 거란 말이냐...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