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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의 미학

글의 홍수 속에 쓰레기를 더하는 글을 쓰는 이유

쓰며 배운다

by 나모다


글쓰기는 쉽지 않다. 글을 쓸수록 더더욱 그렇게 느낀다. 날고 기는 많은 사람들의 글을 볼 때마다 낯 뜨거워 내 글을 볼 수가 없다. 처음의 무식함을 지나면 어느 순간 몸이 손이 얼어붙어 글을 쓸 수 없을 때가 온다. 그렇다. 이 쓰레기 같은 글을 내가 왜 쓰지? 질문은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에 충분하다. 좋은 글을 읽고, 이제 어쭙잖은 글은 그만 쓰자.


한동안 어떤 이유에서건 글쓰기를 할 수 없었지만, 내 안에서 자꾸 솟아오르는 욕구를 거역하기도 힘들다. 듣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어.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외친 피리의 심정을 알겠는 듯, 나한테라도 말해야겠다는 듯, 표현의 욕구는 멈출 수가 없다.


합리화와 욕구를 오가지만, 그럼에도 기록의 필요성은 숙제처럼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경험을 기록하기로 한 결심은 차일피일 연기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이 일을 진행할 동력이 떨어져 마침 책을 쓰고자 하는 친한 친구와 함께 동행하자는데 하이파이브를 했다. 무슨 일이든, 함께 가면 맞드는 백지장처럼 유익함이 크다. 줌으로 만나 출판할 책을 쓰기 위한 과정을 나누기로 했다. 첫날, 나는 친구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이것저것 계획을 나열하는 나와 달리, 친구는 그가 글을 쓰는 이유와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산의 예를 소개하며 루터가 인용한 어거스틴의 말을 소개했다. ‘나는 배울 때에 저술하고, 저술할 때에 배우는 다수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배우면서 쓰고, 쓰면서 배운다는 그의 말은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다산 정약용이 그 많은 저술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유배생활을 하는 곳 근처에 만권의 책을 보유한 서고를 가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책을 읽으며 배운 것을 기록했다.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이고, 종교개혁가 루터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는 새로운 것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내 이야기가 별다른 것도 없고, 그야말로 듣보잡의 수준일 수도 있을 텐데 뭐 대단한 것이라고 글을 쓴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일침을 가하는 소식이다. 수많은 글들도 따지고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이미 있어온 이야기에 관한, 혹은 그 이야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 아닌가? 물론, 이것은 표절과는 다른 차원이다. 나만의 이야기. 대단하지 않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유일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러나 그리 신선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삶의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은 쓸만한 가치가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친구의 나눔이 내겐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나의 작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혹 그러지 않더라도 나에게 배움을 주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나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앞으로 계속.


사진: Unsplash의 Patrick 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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