훅
훅 들어온다. 뭔가 훅 들어온다. 의 느낌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도 못한 시간에, 갑자기 내 심장을, 양심을, 방만해져 있는 정신 상태에 일격을 가하는 훅.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다. <1984>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오웰을 좀 더 세련되게 비판하고 싶어서 꺼내 들었던 책이다. 읽다 보니, 앞선 동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나는 무척이나 궁서체가 되었다.
조지 오웰은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에서 제국 경찰로 복무한다. 그러나 그때의 경험에 환멸을 느꼈고, 양심을 정화하고 과거를 청산하려는 마음과 잭 런던(Jack London, 1876-1916)의 <밑바닥 사람들(1903)>에 경도되어, 런던과 파리에서 자발적인 부랑자의 삶(1928~1929)을 산다. 이 당시 경험을 그린 자전 소설이 <파리와 런던 거리의 성자들(1933)>이다. 그리고 1936년, 오웰은 진보 단체의 취재 요청에 의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위건 부두로 향한다.
그들(탄광 노동자를 말함 - 본 독후감 화자 주) 역시 근대 세계 특유의 부산물인 것이다. 그들을 만들어 낸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 역시 산업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 가운데 일부이다... 그 때문에 미로 같은 슬럼가가, 나이 들고 병든 사람들이 바퀴벌레처럼 빙글빙글 기어 다니는 컴컴한 부엌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이따금 그런 곳들을 찾아가 냄새를 맡아볼 의무 같은게 있다.(p17)
훅을 느낀 지점은 탄광 지대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내부 공간과 구조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상당히 구체적으로 시대와 정치적 담론을 끌어낸 오웰의 집요한 사유와 정치한 글빨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역시 오웰이다 싶은 정도였고. 나의 지점은 오웰이 과거의 자신을 공격하는 대목이었다. 정작 너희들은 너희들의 세력을 영원히 쥐고 있을 거면서, 노동자를 위하네, 소외 계층을 포용하네, 자본주의는 없애야 하네 하고 말만 하지 않냐는 비판이었다. 뼛속의 골수까지 속물근성으로 가득 차 있는 너희들, 'h' 발음에나 집착하는 영국식 상류층과 중산층이잖냐는 비판. 그런 너희들이 말하는 진보가 과연 진보를 가져오냐는 훅. 퍽!
나 나름 위선을 경멸하고, 위선자를 경계하며,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고자 하며, 그렇게 사유하는 존재로써 실존하기 위한, 몇 가지 양심적 장치를 작동(24/7 풀가동까지는 아니어도)하며 살기를 지향하고, 작금의 자본주의화되고 알맹이는 사라진 소위 '(정치적)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가 아닌, 오웰이 부르짖었던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주의로의 전지구적 체제 변화를 주장하지만, 위건 부두로 간 오웰에 의하면 이건 어쩌면 더 악독한, 고단수의 위선인 것이다. 내가 여전히 계급(오늘날로 치면 위계, 질서, 지위, 권력, 돈, 나이, 인종, 젠더, 지역, 경력 등에 의한)적 편견의 틀에 갇혀 있는 거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 가정과 내 실체 간 싱크로율은 백퍼)
나는... 나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로 정의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고, 노동 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거리를 두고서, 책 같은 매개를 통해서나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지, 실제로 그들 가까이 갈 때는 여전히 그들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악센트에 반감을 느꼈고, 그들의 몸에 밴 거친 매너 때문에 몹시 화가 나곤 했다... 돌이켜 보건대 그 시절 나는 시간의 절반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데 쓰고, 그 나머지는 버스 차장의 무례함에 분을 터뜨리느라 허비한 것 같다. (p131)
단 한순간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말쟁이(과거의 오웰)들의 위선. 타자를 계속 타자화해서 타자를 무던히 재생산해내는 글쟁이들의 오만한 위선. 가드 한 번 못 올려보고 쭈그리로 만든 이 훅이 며칠간 나를 얼마나 괴롭혔던지, 내가 기대 온 나의 신념, 곧 나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근 몇 년 새 가장 강하게 찾아든 회의감이었으니. 오웰.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나는 당신이 아닌데.
그렇게 당분간 우울한 상념에 젖어 있다가,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분명 존재했을 나의 '위건 부두'를 기억해내기로 했다. 그 길들이 아니었으면 오늘 오웰의 일갈에 잔뜩 반감만 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또 내가 얼마나 그 간의 걸음들로 내 '다른' 걸음들을 합리화해왔는지를 깨달았으니, 그냥 회의감에만 빠져있을 일이 아니었다. 실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실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 내 '말'이 나의 삶과 유리되어 위선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나를 점검하는 것. 내 말과 말 사이의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것. 이렇게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인 이 시공간에서 내가 나에게 부여할 수 있는 의미이다.
결국 우리가 잃을 것은 우리의 'h' 발음 밖에 없을 테니까.
덧. 독후감이라 개인적으로 훅 들어온 지점을 blow up 해서 썼지만,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이 보다 더 깊은 의미와 분석, 통찰이 있고, 당시의 사회 이슈가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 지금까지는 올해 읽은 7권의 책 중, 최고의 책으로 뽑아놓고 있다. 한 3년 뒤 이 책을 다시 펼치면 오늘의 훅이 어떻게 와닿을까?? 궁금하다.
독후감을 쓰다보니, 읽은지 시간이 좀 지난 터라 다소 감상에 치우친 것 같아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유혹이 들지만... 애써 참아보았다. 참 잘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