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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밑줄치고 싶은 순간

by HeySu


비가 내리기 시작한 순간 집을 나섰다.

코 끝으로 훅 하고 들어온 비 냄새가 자극적이어서 좋았다.

왠지 모르게 이 비는 오늘 많은 이들에게 반가운 비일 것만 같다. 아닌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비가 내리는 날을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는데 오늘만큼은 요란한 천둥소리에도 집 밖을 나서고 싶어 아침부터 몸이 달았다. 바짓단 젖고 입은 옷이 축축하니 몸이 무거울 날인데도 전혀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속으로도 웬일이래 싶은 마음이 들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매일 가던 단골 카페로 향했다. 아무런 공지 하나 없이 오픈 시간 30분이 지났는데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헛걸음 한 아쉬움보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부터 든다. 네**에도 가보고, sns 도 가보았는데 별다른 공지가 올라온 것이 없다. 비가 와서 출근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어슬렁대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따 집 가는 길을 빙 둘러서 카페가 잘 오픈했나 확인하고 가야겠다 생각했다.


안전한 카페 안으로 들어와 앉아 뜨거운 커피를 받았다. 이곳은 참 다정하게도 카페 언니가 주문한 음료를 직접 테이블로 가져다주시는 곳이다. 요즘 참 드문 서비스가 되어버렸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 마음이 따스한 곳이다. 아메리카노 잔 옆으로는 아주 작은 봉지과자 하나가 귀엽게 놓여있다. 한 입에 쏘옥 집어넣고 먹다가 달콤해서 피식 웃었다.

옆으로 보이는 통창으로는 세차게 땅을 때리듯 내리는 빗줄기가 보인다. 카페 안에서 '비의 장면'에서 벗어나 객체화된 나는 안전했다. 외부관찰자로서 비를 풍경감상하듯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지금의 이 상황이 흐뭇하다. 네 개의 벽으로 둘러 싸이고 하나의 지붕이 얹힌 이 공간이 새삼 소중하고 감사했다. 이걸 거둬내면 그냥 공터 위에 앉아있는 그 모습 하나일 뿐일 텐데...

이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순간들이 가끔, '내 삶의 밑줄치고 싶은 순간'이 된다.

어느 날에는 눈여겨보여지지 않는 것들이 또 다른 어느 날에는 너무나도 특별해지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다. 매일 똑같은 당연한 일상이라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로부터, 아주 작은 균열이 어느 곳에 발생한 순간 그 작고 작은 틈으로 일상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감지하게 되기도 한다.

때때로 그것이 실로 어마어마한 것들이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알아채지 못한 미안함과 후회로 괴로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으로 커다란 감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노트를 펼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나이만큼의 세월 안에서 나의 모습을 역으로 돌려본다

내 삶의 밑줄치고 싶은 순간들을 적는다. 별 것 아니었던 것들도 명확하게도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한 것이 있다면 다 적어보는 것이다. 그 순간들이 적었다면 적은 대로, 많았다면 또 많은 대로 거침없이 적어보자는 시도다.


1. 여고시절 야자 시간에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이과반 친구의 꼬드김에 -심지어 층도 다른 문과반의 나는 -이마를 마구마구 문질렀다. 야자 감독이었던 한문 선생님께 가서 열이난다고 거짓말했다. 이마를 짚어본 선생님은 모르는 척, 나의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야자 땡땡이를 '허가' 해주셨다. 늦은 저녁 각자의 탈출에 성공해서 만난 삼총사는 빨간 떡볶이를 후후 불며 맛있게도 먹었더랬다.


2. 비가 내린 대학의 캠퍼스를 빠져나와 남자친구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보다 머리 두 개만큼은 훨씬 더 큰 남자친구가 백허그를 했다. 그 애와 서면 난쟁이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서 또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싫지가 않았다. 그 애의 품이 참 따뜻했다. 나를 아끼는 마음을 알 것 같아 행복했다. 짧았지만 조용하게 많이도 그 사람을 사랑했다.


3. "너였구나!". 뱃속 아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얼굴은 처음 뵙는군요'의 순간. 몇 달 동안 내 안에서 꼬물거리던 작은 사람을 만났던 최초의 순간은 배가 부풀어올라 펑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던 수 시간의 고통을 깡그리 까먹게 만들었다. 그저 '환희'라는 이름에 걸맞은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내 곁에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자라고 있다. 감사하게도.


4. 생애 첫 주택이었던 신축 빌라의 매수와 그 집의 대출을 다 갚았던 날, 아주 작은 파티를 했다. 한 단계를 넘었다는 그 뭉클함과 후련함, 대견함을 잊을 수가 없다.


5. 생애 두 번째로 매수한 아파트의 간단한 인테리어를 마치고 빈 공간상태인 그곳에서 거실의 통창 앞에 섰던 순간, 머얼리 내려다보이는 다른 집들의 불빛을 보며 남편과 나는 말을 잃고 조용히 각자의 생각에 잠겼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일주일간은 온 짐을 보관센터에 맡겨두고 근방의 비즈니스호텔에서 묵었었는데, 이삿날까지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좁은 호텔 방에서 일상을 보냈던 그날들은 특별한 이벤트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도 노을 지는 저녁, 창 앞에 서서 멀리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까, 숨은 그 마음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기에 우리는 큰 말들을 대화에 더하지 않는다. 우리의 침묵은 서로에게의 고마움, 다짐, 새로운 꿈 등 참으로 많은 것들을 이미 말하고 있다.




이것 외에도 나의 노트에는 또 많은 것들이 중간에 삽입되기도 뒤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이 주렁주렁 기억의 꼬리를 물고 물어서 , '나의 밑줄치고 싶은 순간'들이 부디 풍성해지기.

그 순간들이 꽈악 꽉 들어찬 삶이라... 생각만 해도 너무나 흡족하지 않은가?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빨라지는 게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신이 나서 적어가야겠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빈 노트 하나 촥 펼치고 당신의 밑줄을 꼭 그어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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