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보다 중요한 가치, 상양 김수겸
We are all in the gutter, but some of us are looking at the stars.
-Oscar Wild
드물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진창 속에서도 별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이 강한 팀을 좋아한다. 연승과 무패 신화의 근사함. 그러나 진실로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강함이 아니라 멋진 경기를 하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로 인해 패배하더라도.
슬램덩크의 상양전은 팬들 사이에서 다소 임팩트가 떨어지는 경기라는 인식이 있다. 선수 겸 감독인 김수겸이 벤치에서 나왔지만 이후 경기가 생각만큼 상양의 월등함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기동력의 북산과 높이의 상양. 이 두 팀의 대결은 확실히 폭발하는 농구트럭 이정환의 해남이나 천재 윤대협의 능남 그리고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에이스 킬러 남훈의 풍전, 최종 보스전이었던 이명헌의 산왕과의 경기에 비하면 단조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상양전은 오히려 농구 외적인 부분이 중요한 경기다. 북산의 주요 선수들이 상양전을 치르며 비로소 농구 선수로서의 매너를, 그러니까 한 명의 플레이어로서의 자세를 배워나가기 때문이다. 특히나 양아치 전적이 있는 두 사람, 바로 강백호와 정대만이. 상양전은 농구부 최후의 날 에피소드 이후 비로소 북산 5인 체제가 갖춰지고 치루는 첫 정식 경기였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정대만은 한 때는 굉장했지만 이제는 사라져 버린 허명의 주인공이란 비아냥에 심하게 동요한다. 헛되게 시간을 보내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과거의 유산에 기대 뛰어야 하는 자신의 한계를 직격한, 그가 가장 마주하기 두려워한 진실이었기에. 동시에 강백호는 이전 경기들로부터 누적되어 온 파울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제약 없이 시비 걸어오는 상대를 때려눕혀왔던 그는 이제 코트 위에 올라 엄격한 농구 룰의 적용을 받는 선수가 됐다. 반칙과 거친 플레이의 미묘한 선을 이해하기에는 강백호에게는 압도적으로 경험이 모자라다. 더군다나 남들보다 높이 뛸 수 있고 강한 충격에도 좀처럼 나가떨어지지 않는 우월한 피지컬은 주로 몸을 쓰는 역할을 요구받기에 오히려 파울의 위험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쉽게 발끈하는, 몸이 먼저 나가는 게 익숙한 양아치 성질과 좀처럼 몸에 새겨지지 않는 농구 규칙 사이에서 강백호는 고전한다. 처음부터 농구부에 소속되어있던 채치수, 권준호, 서태웅과는 달리 두 사람은 농구와 폭력이라는 두 세계에 걸쳐진 운명이었다. 농구부 최후의 날 이노우에가 완벽히 폭력의 세계와의 결별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슬램덩크의 색채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폭력만화에서의 룰은 간단하다. 강한 폭력은 더 강한 폭력으로 제압한다. 하지만 슬램덩크는 농구만화를 선택했다. 그렇게 단순한 세계일리가 없다. 정대만이 무력으로 우위에 서 있을 때조차(개인 전투력 말고) 송태섭에게 쩔쩔매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강백호도 정대만도 맑고 곧은 사람에게 오히려 매우 약하다. 폭력으로는 꺾을 수 없는 정신이 스포츠에는 존재한다. 이들에게 이보다 더 어렵고 까다로운 상대는 없다. 거리에서 체육관으로 돌아온 이상, 이제 이 불량아들은 코트 위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경기를 뛰며 자신들이 헛되이 흘려보낸 시간의 무게를 직접 느끼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 맞이한 상양전은 정대만이나 강백호 두 사람 모두에게 스스로 쌓아온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대면해야 하는, 일종의 심판전과도 같았으며 반드시 지나가야할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농구부 최후의 날 이후 제대로 묘사된 첫 경기의 대결 상대인 상양은 풍전과 달리 올 클린 스포츠맨팀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수겸이란 선수가 있다. 김수겸은 폭력의 세계로부터 가장 멀리에 위치해있는 인물이다. 강백호가 폭력만화의 이상적인 이데아였다면 김수겸은 그와 정반대의 세계인 농구만화의 가장 이상적인 이데아다. 상양은 산포나 노성고와 같이 별 다른 인상도 남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팀이 아니라 근 4년동안 우승한 전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팬층과 독자적인 팀 컬러를 지닌 농구 명문으로 묘사된다. 여러차례 타 팀의 선수들과 감독을 통해 언급됐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양의 멤버들은 천재들이 아니다. 거의 모든 멤버가 장신이라는 신체적인 강점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농구계에 키 큰 선수들은 널려있다. 그러니 상양을 상양으로 만드는 것은 선수들의 피지컬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이다. 그리고 상양의 정신은 김수겸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을 들여다봐주는 대상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원하는 실적이 나오질 않는다고 팀원들의 가장 형편없는 부분들을 지적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리더를 따를 사람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로 팀의 성적은 상당 부분 리더의 자질에 달려있다. 김수겸은 이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팀이지만 도내 NO.1은 한 번도 해낸 적 없는 만년 2등 팀. 김수겸 개인의 우수함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만큼 팀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법도 한데 그는 한 번도 자신의 팀을 낮춰보는 법이 없다. 조직의 리더이자 감독으로서 팀의 역량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역할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겸이 가세한 상양은 전혀 다른 팀이 된다."
유명호 감독은 성현준을 비롯한 나머지 선수들도 강하지만 김수겸이 합류하는 순간 상양은 최상급의 팀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김수겸이 지닌 독특한 리더십 덕분이다. 김수겸은 언제나 타인에게서 그의 가장 좋은 점을 발견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그는 우수한 선수정도에 머무는 자신의 동료들 안에서 가장 좋은 자질들을 직접 발굴해 낸다. 채치수에게도 밀리지 않는(아마도 해남의 이정환을 봉쇄할 가장 강력한 키맨으로 훈련했을) 피지컬의 성현준에게서는 탁월한 신체 그 이상의 재능, 즉 재빠른 두뇌 회전과 발군의 슛감각을, 승리에 대한 집착과 명성에 대한 욕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장권혁에게서는 꾸준한 성실함과 무겁게 쌓아온 실력을 본다. 선수의 장점을 잘 파악한다는 점에서 북산의 안감독과도 유사하지만 역시 노련함보다는 소년다운 천진함과 순진함이 있어 선수의 장점과 약점을 함께 보는 안감독에 비해 장점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군다나 그는 한 번 신뢰를 준 선수에게 쉽게 기대를 거두지 않는데 장권혁이 정대만에게 휘둘릴 때에도 김수겸은 그를 교체하지 않는다. 벤치를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관객석까지 자리 잡은 상양의 농구부에 인재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수겸은 자신이 발견한 선수들의 재능을 그 누구보다 깊이 신뢰한다. 장권혁을 교체하지 않았던 것은 프로 감독이라면 하지 않을 미숙한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수많은 단점들 너머로 타인의 가장 멋진 지점을 찾아낼 줄 아는 소년만이 보일 수 있는 믿음이라는 점에서 순수하다.
성현준과 상양의 선수들이 김수겸에게 보내는 압도적인 믿음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특히 성현준과 김수겸은 수신호나 작전타임을 갖지 않아도 경기 중 눈빛만으로 전술과 전략을 다듬는다. 김수겸이 벤치에 앉아 냉정하게 경기 판세를 분석하며 필요할 때 흐름을 끊거나 다시 붙이는 동안 성현준은 감독으로서 김수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코트 위를 책임진다. 성현준의 코트 장악력에 문제가 생기면 김수겸은 바로 재킷을 벗고 코트 위로 올라와 성현준의 부담을 덜어주고 막힌 공격 루트를 뚫어낸다. 상양은 감독으로서 김수겸의 판단을 깊이 신뢰하는 동시에 동료 선수로서의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능남의 유명호감독이 황태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나 풍전의 신임 감독이 선수들의 믿음을 얻지 못해 발생한 대참사를 떠올려보면 놀라운 일이다. 상양은 서로에게 잘 길들여진 늑대무리처럼 완벽한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성인 감독들도 이루기 어려운 성취. 이는 분명 김수겸 개인의 성정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김수겸의 맑고 곧은 내면의 순수한 열정은 덩굴처럼 뻗어나가 언제나 타인을 감응시킨다.
슬램덩크의 세계관 속에서는 바로 이 실력 외적인 부분, 그러니까 정신과 인성이라는 또 다른 측면이 다른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꽤 중요하게 그려진다. 강백호의 피지컬이 괴물급이기는 하지만 실력면에서는 서태웅이 절대적으로 압도하는 상황 속에서 이 풋내기에게 북산의 에이스가 가장 강력하게 자극받는 부분 역시 언제나 실력 외적인 부분이었다.
주장이 팀을 운영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실력으로 차갑게 천재들을 압도하며 리딩하는 산왕의 이명헌이나 장악하는 대신 제멋대로인 팀원들의 개성을 (꺾어보려 했으나 처참히 실패했기에) 살리는 방향으로 팀워크를 만들어내는 채치수와는 달리 김수겸은 실력만이 아니라 그 외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팀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며 장악하는 존재다.
암흑기에 정대만이 흔들리지 않는 송태섭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처럼 상양의 네 선수 역시 강력한 승부욕과 실력, 그리고 매 경기마다 물러남 없이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며 달려나가는 김수겸의 내면에 강렬하게 반응한다. 부상으로 방황하던 정대만이 불안정한 자아로 송태섭을 파괴하려 들었던 것과는 달리 자아가 안정적이었던 상양의 네 선수는 김수겸에 완벽히 매료된다. 이것이 김수겸이 획득한 강력한 리더십의 근간이다. 이글대다 못해 락커룸을 사우나로 만들어버리는 승부욕으로 팀원들을 자극하는 해남의 이정환과 어떤 면에서는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실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팀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두사람은 많이 닮아있다.
상양의 선수들은 김수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부족한 점보다 강점을 먼저 바라보고 한계 앞에 포기하기보다 각자가 지닌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서로를 보완하며 전진하는 김수겸의 팀운영 방식은 상양을 완벽히 연동된 하나의 군단으로 기능하게 한다. 굳건히 쌓아올린 팀의 신뢰와 믿음은 경기 내용에 따라 쉽게 동요되지 않고 시작과 끝까지 좀처럼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명헌이 완벽히 장악한 산왕도 플레이 스타일은 각 선수들의 개성에 따라 다채롭기 마련인데 김수겸의 상양은 각 선수들이 가슴에 김수겸 하나씩은 넣어두고 다니는 것처럼 비슷한 느낌으로 경기를 뛴다. 바로 전력을 다하는 페어플레이다. 멘탈 기복없이 매 경기마다 100% 기량발휘. 상양은 그게 가능한 팀이다.
도내 강팀이지만 만년 2위. 사실 상양은 정통 강호라고 하기에는 기이한 점들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공석으로 남아있는 감독자리. 도내 우승 후보로 유력한 농구 명문에 감독이 없어 선수가 겸임하는 팀이라니. 아마도 상양은 대대로 다른 스포츠가 주력이 되어온 학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야구 같은. 일본은 야구 명문고가 워낙 많으니까. 그렇다면 상양 농구부는 그 압도적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재단으로부터 전략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는 부란 말이다. 이 해석이라면 비로소 이정환의 발언이 이해가 가능해진다.
"김수겸이 없는 상양은 말하자면 2군 보통의 강팀 수준이지만 단 한 명의 포인트 가드가 가세한 것으로 녀석들은 전국대회에 어울리는 팀이 된다. 김수겸의 리드에 의해 녀석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바꿔말하자면 처음부터 프로 리그를 염두에 두고 있는 재능 있는 선수에게 상양은 1 지망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수겸은 불만 없이 팀을 정비한다. 감독이 없다면 자신이 하겠다고. 그리고 그 역할을 놀랍도록 잘 해낸다. 팀원들의 한계를 탓하거나 상황에 절망하지도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의 가장 좋은 점들을 끈질기게 찾아내면서. 능남의 윤대협이나 북산의 서태웅, 산왕의 정우성은 없더라도 자신과 기꺼이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며 기반을 다져간다. 그리고 그들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장 강력한 팀플레이어로서의 재능들을 이끌어 낸다. 그 어떤 감독도 발견하지 못했을 평범한 선수들의 작은 강점들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내서 육성하고 결국은 최강의 팀으로 빌드업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성장한다. 그것도 혼자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김수겸의 상양은 쉽게 동요하지 않는데 서로에 대한 굳은 믿음과 함께 거쳐온 시간에 대한 존중이 두텁게 쌓여있는 팀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최고의 열혈 리더만이 해낼 수 있는 업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함께 해온 팀이니 상양은 그들의 적조차 신뢰한다. 그러니까 어떤 비열한 수를 쓸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이들의 사고에는 아예 존재하질 않는 거다. 경기 후반전, 강백호의 리바운드가 불을 뿜기 시작하며 과하게 공을 뺏기지 않으려 크게 휘두른 팔에 성현준이 얼굴을 직격 당한다. 그러자 성현준은 벌떡 일어나며 강백호의 파울이 이로써 4개가 됐다며 웃는다. 사실 이쯤 되면 남발하는 강백호의 파울에 고의성을 의심하고도 남을 텐데도 (에이스인 김수겸을 등장하자마자 바닥에 깔아버리고 팀의 중추인 성현준에게도 헤드샷을 날렸으니) 상양의 어떤 팀원들도 강백호의 파울이 의도적이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북산을 쓰러뜨려야 결승리그에 진출할 수 있다며 단체로 기합을 넣을 뿐. 심지어 (외견상은 양아치 집단이지만) 주인공 팀인 북산조차 이렇게 반듯하지는 않다. 북산은 풍전의 폭력성을 그 누구보다 먼저 감각했으며 가장 격렬히 반응하기도 했다(송태섭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날릴 뻔했다). 그러나 김수겸의 상양은 그 풍전조차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과연 김수겸의 아이들답게 곧고 맑다.
그러나 김수겸의 진짜 매력은 감독이었을 때보다 선수였을 때 더 강렬히 발산된다. 예쁘장한 외모와는 달리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질풍처럼 빠르고 용맹하다. 풍전과의 경기에서 김수겸은 특유의 거침없는 플레이를 하다 농구 선수 인생 중 가장 큰 부상을 당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던 풍전의 남훈이 상양의 거센 공격에 내몰리자 팀 에이스인 김수겸을 가격한 것이다.
'아무리 위험해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가진 상대였습니다.'
농구든 야구든 달리기 든 스포츠의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의 성취는 아주 작은 부분에서 결정되는 일이 많다. 라인 밖으로 벗어나는 골을 따라붙는 마지막 순간, 배트에 와닿는 볼의 궤선 끝까지 따라붙는 시선, 피니쉬 라인에 가닿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는 질주. 그 미세한 차이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한다. 남훈의 팔꿈치가 머리를 가격하기 직전까지 전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 한 끗에 담긴 전력.
상양의 4번은
그 반발자국을 더 내딛을 줄 아는 선수다.
남훈이 서태웅을 만나 비로소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아직도 갈길이 멀었지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남훈에게 1차 제동을 걸었던 것은 분명 김수겸이었다. 폭력의 자장 안으로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뛰어들어 오히려 상대방의 세계를 온 몸으로 부딪혀 박살내버리는 정신. 남훈에게는 덤프트럭에 치인 것과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다분히 고의적인 의도가 담긴 헤드샷을 맞고도 김수겸은 남훈을 비겁한 에이스 킬러가 아닌 '승리에 대한 집착이 강렬한 선수'로 기억한다. 그에게는 상대 팀의 에이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상을 입힌다는 사고를 이해할 수 있는 어두움이 존재하질 않는다. 그리고 전술했듯이 양아치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상대가 바로 이런 종류다. 맑아서 자신의 심연마저 들어다 보이는.
그날 이후 남훈은 심하게 동요한다. 다른 상대들과는 달리 자신의 위협에도 물러나지 않고 순수한 열정으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던 상양의 에이스로부터 그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 맑고 곧아서 베일 것만 같은 투명함에 어느 순간부터 혼탁해지기 시작해 더 이상 시작과 끝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흐려진 자신의 내면이 비춰보였기때문이다. 김수겸이 그가 위협적으로 쳐놓은 그물 안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오던 그 찰나는 그토록 견고하게 합리화해 왔지만 실은 자신이 잘못된 길로 내달리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깊이 자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 번 금이 간 유리는 다음 충격에 크게 부서지기 마련이다. 김수겸이 낸 작은 균열은 이후 역시 맑은 속성의 서태웅과 격돌해 산산이 무너진다. 수없이 많은 변명과 핑계를 뒤로 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그 경기들을 통해 매 순간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 상대팀의 에이스들을 마주하며 남훈은 오래전 방기했던 애정을 되찾는다. 순수한 경기의 즐거움과 농구의 진짜 매력을.
김수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이정환은 "선수로서의 녀석은 냉정함과는 거리가 멀지."라고 언급한다. 상승세를 타고 올라오고 있는 슈퍼루키팀 북산과 강호 상양의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들락날락거리며 집중하지 않던 타 팀의 에이스들이 일시에 경기장 안으로 몰려든 순간은 그래서 감독 김수겸의 선수 복귀 타이밍수밖에 없다. 능남의 윤대협도 해남의 이정환도 절대 놓칠 수 없는 경기인 것처럼 김수겸 선수의 북산전을(북산의 상양전을 보고싶다기보다) 지켜보기 위해 유래 없이 기민하게 움직인다. 일반적으로 선수들이 타 팀의 경기를 분석 차원에서 관람하는 경우와는 좀 다르게 이들은 그냥 상양이 아닌 김수겸의 상양을 보고싶어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무엇보다 선수 김수겸의 플레이를 보고 싶은 거다. (아마도) 그건 정말 끝내주니까.
안타깝게도 선수 김수겸의 플레이는 이후 이정환이나 윤대협, 정우성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에 할당된 분량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 제공된 정보들을 종합해서 미루어 짐작해볼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다. 시기적으로는 더 앞선 상양의 대 풍전전에서 잠시 엿보였듯이 선수로서 김수겸의 플레이스타일은 굉장히 뜨겁다. 장신의 몬스타트럭들로 가득한 슬램덩크의 세계 속에서 비교적 체구가 작은 편으로 그려지는 김수겸은 북산이나 풍전과 마찬가지로 빠른 속공과 스코어를 때려 박는 점수 쟁탈전에 최적화된 에이스로 그려진다. 감독이었을 때와는 달리 굉장히 활발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팀 전체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경기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화려한 선수라는 인상이다. 감독의 역할을 수행할 때는 적절할 때 경기의 흐름을 끊거나 잇고 상대 팀의 특성에 따라 유효한 전술전략을 냉정하게 판단하면서도 저지 재킷을 펄럭 벗어젖히고 코트 위로 올라선 순간부터는 이미 표정부터가 벤치에 앉아있을 때와는 달리 생동감 넘치는데다 장난기마저 묻어난다. 심지어 골을 넣으며 내지르는 기합도 “으랏샤!!"
"지금 리드하는 것을 지키려고 생각하지 마라. 공격에 공격을 가해. 북산에게 상양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선수 김수겸에게는 안전하게 플레이한다는 옵션이 없다. 상대가 누구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최고의 경기를 하는 것. 그것이 김수겸과 상양의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만년 2위임에도 불구하고 상양의 경기는 매번 관중석이 매진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드렁하던 타 팀의 에이스들도 눈을 빛내며 경기장으로 몰려들게 만드는 것이겠지.
만년 2위. 도내 1위인 라이벌 해남에게 빈번히 밀리는 상양. 4번의 패배. 5번째의 도전. 실패 후에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다음 도전을 준비하는 김수겸의 마음에는 일말의 후회나 자격지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런 김수겸의 자세는 한 개인의 정신승리가 아니라 같은 팀의 동료들 그리고 더 나아가 상양의 모든 경기를 함께 직관해 온 관객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압도적 강자로 군림하며 왕좌에서 내려온 적 없는 해남만큼이나 도내 사람들이 열렬히 애정하는 팀. 번번이 우승 직전에 고배를 마시는데도 불구하고 관객석은 상양을 응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 상양이 단 한 경기도 허투루 치른 적이 없기 때문 일 것이다. 다시 말해 김수겸의 상양은 그들의 팬들에게 언제나 최고의 경기만을 선사한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승리를 좋아한다. 세상의 기준에서 패한다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스포츠는 다르다. 스포츠는 단연코 승리만을 추구하는 영역이 아니다. 때로는 승리보다 어떻게 패하는 가가 더 중요한 문제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는 팀을 좋아하지만 그 방식이 비열하거나 비겁할 때 이를 용인하는 스포츠 팬들은 많지 않다. 스포츠는 세속과는 달리 어딘지 여전히 순수하고 무언가 지켜야 할 정신이라는 게 남아있는 낭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매 경기마다 승점을 따져가며 이기지 않아도 올라가는 경기에는 힘을 빼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는 심판의 눈을 속이며 반칙을 일삼아 얻어낸 승리에 매료되는 사람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스포츠가 고액의 이적료와 연봉이 걸린 머니게임이 되어갈수록 반대로 경기들은 급속도로 빛을 잃어가는 경우를 지켜봐왔다. 숫자로 승부를 미리 계산하는 스탯전쟁, 대진표에 따라 전략적으로 예측하는 승률의 도박 속에 매 경기마다 전력을 다하는 건 어느덧 아마추어 팀들의 특징이 됐다. 현재 프로의 기준에서는 런앤건이라는 전략만 고집하는 풍전이나 매 경기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내달리는 상양, 그리고 우승의 문턱에서 전력을 다한 나머지 다음 경기에서 참패를 당한 북산은 그야말로 이해불가한 팀들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여전히,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될 경기에도 전력을 다하고 승점을 놓치기 쉬운 상황에서도 대범한 플레이를 펼치는 팀을 응원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냉철한 이성만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와 포기를 모르는 도전이야말로 우리가 스포츠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점들이기 때문이다. 농구만이 아니라 그 어떤 스포츠든 애정을 가져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근사한 경기를 하는 팀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언제나 패배하더라도. 이런 경우 만년 2위는 아주 드물게 오명이 아닌 영예가 되기도 한다(이건 정말 굉장한 일이다). 정말 멋진 경기를 하는 팀이란 말이거든. 승리만큼이나 맹렬히 추격하는 언더독은 근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겸은 완벽한 도전자다. 절대적인 제왕으로 군림하는 해남의 이정환과는 달리 그는 고교 농구시절의 단 한순간도 도전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왕좌의 문턱에서 이정환에게 번번이 좌절당하면서도 김수겸 내면의 불꽃은 사그라드는 일이 없다. 감독이 아닌 선수로서 김수겸은 차갑다기보다는 열혈 속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어딘지 강백호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감독직에서 벗어나 코트 위로 올라선 김수겸의 플레이스타일은 차분하고 냉정했던 벤치 위와는 달리 매우 활력있고 빠르고 가볍다. 이정환을 비롯한 타교의 선수들이 김수겸이 감독으로 물러나있는 상황에 아쉬워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김수겸이 겸직을 하기 전, 오롯이 한 명의 선수로 코트 위를 뛰었을 때의 플레이 스타일은 잘 세공되어 정교하기보다 오히려 거칠고 뜨거운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한다. 결고 꺾이지 않는 정신으로 가진 모든 것들을 전력으로 쏟아부으며 부딪혀오기에 함께 어울리다보면 어느새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같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어떻게 보면 김수겸은 소년 만화의 정석적인 주인공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상대팀의 가장 약한 곳을 서슴없이 이용하는 냉철한 전략가 이정환도 상양과의 경기에서는 김수겸의 전력을 쏟는 플레이스타일에 상당한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뛰어서 재미있는 경기. 도내 강호들 사이에서 상양전은 언제나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이정환이 자극을 받는 만큼 김수겸 역시 이정환이라는 굉장한 라이벌을 통해 자극받는다. 이정환은 김수겸의 승부욕을 끊임없이 달궈내며 거친 면들을 다듬어내고 기어코 날카로운 창으로 벼려낸다. 해남을 이기기 위해, 그러니까 상양이라는 미완성의 무기로 이정환을 제압하기 위해 열혈 속성의 선수가 경기 외적인 요소까지 고려해야하는 감독이라는 상반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차갑고 단단해져야할 필요성이 있다. 해남의 이정환을 상대하며 김수겸은 내면의 불길을 제어하고 전략적인 결정과 팀빌딩을 위한 훈련 체계를 잡아내는 선수 겸 감독이라는 양날의 검으로 정교하게 세공된다.
왕좌의 앞까지 도달하기까지 반드시 쟁취해내야하는 수많은 토너먼트 티켓들. 그리고 그렇게 뚫어낸 수많은 승리가 단 한번의 패배로 무로 돌아가는 경험들.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목표가 눈 앞에서 좌절되고 다시 처음부터 일어서야하는 그 농도짙은 시간들을 반복하며 김수겸은 그 누구보다 단단하게 연마된다. 한번도 패배해보지 않은 무적보다 언제나 패배하지만 지지 않는 정신은 그 강인함의 깊이가 다르다. 해남이라는 막강한 1인자와 매번 격돌하고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장렬히 패배한 뒤 다시 도전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상양은 우승팀이 아니라 도전하는 팀이라는 감각을 내면화한다. 지켜야할 것이 있는 승리자와 달리 도전하는 언더독은 잃을 것이없다. 산왕을 마주한 북산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김수겸의 상양은 언제나 전력의 플레이를 한다. 상대가 그들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해남이 아닐지라도. 그 스스로가 끊임없이 패배의 자리로부터 상승하는 정체성을 지녔기에 상양은 어떤 팀과 맞붙더라도 도전자들을 깔보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단 한 번도 강호의 자리에 들어선 적 없던 북산을 맞이하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북산을 자신들이 발 딛고 선 토대 위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전력으로 상대한다. 변화구가 없는 직구. 그것도 몸쪽으로 꽉 찬. 진실로 스트레이트한 성정이다.
매번 우승을 좌절당하는 팀의 경기를 보기 위해 관중석이 꽉 찬다는 것은, 그리고 북산이 난생처음 상대 진영 팬들의 일방적 응원 속에서 경기를 치르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그동안 상양이 착실히 팬들의 가슴속에 쌓아 올린 신뢰의 증표다. 작품 속에서는 북산의 급부상으로 인해 펼쳐진 춘추전국 군웅할거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2강 구도로 해남과 상양의 역사를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치지지만 우리는 이 두 팀이 그동안 도내 관객들에게 최상급 퀄리티의 경기를 선사해 왔을 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엿볼 수 있는 상양의 시합은 대 북산과 대 풍전 두 경기뿐이지만 그 안에서 상양의 모습은 북산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화끈하다. 더군다나 상양의 멤버들은 전원 페어플레이를 한다. 능남의 안영수나 황태산과 같이 다소 예민한 선수들도 없고 해남의 홍익현처럼 변칙적인 카드도 없다. 풍전의 남훈이나 강동준처럼 거친 플레이를 즐기지도 않는다. 거의 완벽히 룰을 준수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전력을 불태운다. 그런 의미에서 상양도 북산처럼 열혈 속성이다. 경기 스타일은 다르지만 내면의 불꽃은 같은 색이다. 열혈과 열혈의 격돌이라는 점에서 상양과 북산의 대결은 호쾌하다. 북산 역시 비록 전직 양아치 출신들이 대거 합류하긴 했지만 성정은 순진하고 곧다. 그런 의미에서 상양전은 닮은 꼴들의 격돌이다. 그 어느 때보다 파울 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만 경기 자체는 굉장히 깔끔하다. 양측 다 페어플레이를 한다. 만화적 재미가 덜하다는 평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양 측의 선수들 모두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채치수가 진창 같은 상황에서도 전국제패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반복되는 패배에도 구김 없이 다음 도전을 준비하는 맹렬한 기세가 김수겸에게도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배와 같은 부정적인 경험을 (심지어)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승화시키는 김수겸의 본질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장권혁이나 성현준만이 아니라 상양이 상대한 북산의 선수들에게조차도. 나는 언제나 이 지점이 상양전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기를 통해 북산의 거의 모든 선수들은 농구 선수로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성장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상양전에서는 경기를 앞두고 각자의 두려움에 직면한 북산 두 사람의 이야기가 경기 전부터 전개된다. 상양전을 앞두고 정대만은 그의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인 철이와 우연히 재회하고 강백호는 누적된 파울 퇴장에 '퇴장당하지 않는 법'을 알려달라며 채치수 집을 찾아간다. 상양전은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북산이라는 팀이 김수겸의 상양으로 인해 자극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북산의 기세만큼이나 강고하게 자신의 요새를 쌓아 지켜온 강호 상양의 안정적인 플레이에 팀원들이 좀처럼 제 기량을 내지 못하자 서태웅은 단독 돌파로 분위기를 쇄신한다. 대체로 북산이 움츠려드는 건 채치수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지점을 서태웅이 기민하게 인지한다. 채치수가 드물게 피지컬적으로도 자신과 동급(이상)인 데다 슛감각도 뛰어난 성현준에게 봉쇄되자 서태웅은 볼을 스틸해 두 명의 가드를 동시에 제치고 골을 성공시킨다.
"모두 움직임이 굳었어. 패스가 되질 않잖아."
그 상황에서는 무리하지 말고 패스하는 게 옳았다고 지적하는 송태섭에게 서태웅은 말한다. 서태웅의 무리한 돌파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상대를 만나 움직임이 굳은 동료들을 격려하고 경기의 흐름을 뺏어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여러 의미로 자극받은 북산은 '뭐라고 저런 건방진 녀석!' 하며 깊은 빡침으로 움직임을 회복한다. 채치수가 돌아오자 순차적으로 팀원들의 기량이 발휘되기 시작하는데 강백호의 블로킹, 송태섭의 빠른 속공 등 북산의 강점이 되살아나자 김수겸은 작전 타임으로 북산의 기세가 불붙기 전에 경기의 맥을 끊어버린다. 감독으로서 현명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 지점, 어딘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이 장면이 몇 년 뒤 산왕전에서 재현되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강백호가 최강 산왕을 맞아 얼어붙은 동료들의 심리적 위축을 해소하기 위해 미친 짓을 하는 광경이다. 강백호는 채치수의 엉덩이를 찔러대고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간다. 이는 단순히 관심을 받으려 드는 행위가 아니라 분명 동료들을 격려하고 궁극적으로는 좋지 않은 경기의 흐름을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이다. 강백호가 이런 감각을 어디서 배웠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상양전의 서태웅이다. 상양은 해남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맹렬히 도전하는 언더독이다. 산왕을 마주한 북산이 그러하듯이. 개인적으로는 상양전은 그런 의미에서 산왕전의 프리뷰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 중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특히 강백호는 상양전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나 초반부터 노이로제가 걸려있던 반칙에 대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칙에 대응하는 자세에 관해서.
파울로 인한 퇴장이 너무 걱정된 나머지 주장 집까지 찾아갔지만 큰 도움은 받지 못한 (감각으로 알아채라는 그럴싸한 말을 해주긴 했지만) 강백호는 결국 경기 중 김수겸을 덮친다. 겨우 농구의 룰을 익혀가고 있는 풋내기는 누적되는 파울 퇴장이 너무도 두렵다.
"그만들 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김수겸은 흥분한 선수들을 진정시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황을 정리한다. 만화 속에서는 이에 대한 강백호의 반응을 중요하게 그려내진 않았지만 이후 유사한 장면이 다시 산왕전에서 재현된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탁월한 재능과 신체로 농구 스킬은 일반인들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강백호에게 스포츠맨십이라는 개념이 최초로 탑재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고의가 아닌 반칙에 대해 관대했던 김수겸의 태도를 아마도 강백호는 멋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래서 강백호는 이후 산왕전에서 신현필이 큰 덩치로 자신을 밀치자 "시합 중에 일어난 일이니까." 사과는 필요 없다고 말해준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리고 사람은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다. 거리라는 무법의 세계에서 성장한 강백호에게는 룰이란 게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사과할 일도 없던 셈이다. 시비가 걸려오면 받아치고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하면 되갚아준다. 이 단순한 세계로부터 그는 채소연을 통해 구조되고 농구 코트 위로 끌어올려진다. 그 위에서 그는 타인들과 함께하며 이제껏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룰들을 익혀간다. 대립과 폭력이 아니라 협력과 믿음이라는.
농구를 통해 팀원들과 유대감을 쌓아가면서 강백호는 기대와 믿음 그리고 실망과 상처에 대해 알게 된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두근거리다가도 문득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 벌어질 일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나는 어쩌면 천재가 아닐지도 몰라). 강백호가 산왕전에서 등을 망가뜨려가면서도 경기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모든 순간을 카운트하는 불굴의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깊은 두려움 역시 함께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동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더 깊게는 자기 스스로에게도 실망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고.
반칙은 그런 의미에서 실망에 가까운 개념이다. 상호 합의된 원칙과 믿음대로 플레이하지 않았을 경우에 발생하는 오류 같은 것. 상대의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 강백호가 유난히 파울에 대해 민감했던 이유는 가장 크게는 퇴장당하면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데 있긴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합의한 코트 위의 룰을 가급적 지키고 싶은 욕망 역시 비슷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편이다. 단 한 번도 세속적인 법칙에 구속되어 본 적 없는 그에게 농구의 룰은 어쩌면 새로운 사회 규범 같은 것이었고 그는 이 세계를 매우 소중히 여긴다. 그러므로 강백호는 모든 방면에서 이 코트 위의 세계를 지키고 싶은 거다.
농구부 최후의 날, 이제 막 작은 규칙들을 배워가며 처음으로 자신이 잘할지도 모를 어떤 재능을 발견해 가는 과정 중에 있던 백호는 채치수와 송태섭에게 코트 위의 세계가 무척 소중하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백호군단이 아닌 타인을 위한 싸움을 한다. 아직은 제대로 된 바스켓맨이 되기도 전이었는데도. 그런 강백호가 진심으로 농구를 사랑하게 됐으니 그 세계는 그에게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작게 위축된다. 또다시 발생한 실수. 의도를 가지고 타인의 등짝을 발로 차대던 시절과는 다르게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룰을 어긴 상황 속에서 그는 스포츠 맨이라면 당연히 할법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어색해한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참 작은 김수겸이 자신에게 깔리자 강백호는 귀여운 그림체로 도망쳐 작게 웅얼거린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미안해.' 강백호에게는 나름 최선의 사과였을 테지만 스포츠맨들로 가득한 상양에서는 매우 무례한 행동이다.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이택중과 오창석이 불같이 화를 내자 김수겸은 괜찮다고 말해준다. 이건 아마도 강백호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나서 용서받아본 최초의 경험이 아닐까 한다. 깡패들과의 싸움에서 사과와 용서가 일어날 리가 없으니 말이다(물론 어떤 폭력물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그러나 스포츠의 세계에서 만큼이나 깔끔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안에 서있다. 실수를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코트 위에 엄연한 한 사람의 선수로서.
경기를 하다 보면 파울을 할 수도 있다. 때로는 거친 플레이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면, 아니 심지어 고의라 할지라도 그 행위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사과와 인정을 한다면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김수겸의 곧고 깨끗한 성정은 강백호의 마음에서 부담감을 지워낸다. 용서를 받았으니 빚진 마음 없이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후 경기에서 강백호는 여러 번 파울의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만일 김수겸이 자신에 대한 파울에 강력하게 항의했다면 훨씬 더 위축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수겸은 자신이 전력을 다하는 만큼 상대도 최선을 다하길 기대한다. 그는 파울로 인한 죄책감으로 인해 상대 선수가 소심한 플레이를 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흔쾌히 넘어진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우리 좋은 경기를 하자. 김수겸은 처음부터 끝까지 코트 위의 강백호를 일말의 편견 없이 온전한 한 명의 선수로 대했고 이 자세를 강백호는 깊이 기억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산왕전에 마치 자신의 예전 모습처럼 느껴지는 미숙한 신현필이 반칙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동요할 때 그 마음을 되돌려준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넌 선수니까.
그런 의미에서 상양전이 농구부 최후의 날 이후 제대로 묘사된 첫 경기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스치듯이 지나가버린 삼포고나 노성고의 모습과는 달리 페어플레이 중 페어플레이를 하는 반듯한 농구 명문고 상양과의 경기는 학폭물과의 영원한 결별은 선언했던 에피소드 이후로 반드시 북산이라는 팀이 거쳐가야 할 일종의 정화의식이며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상양전을 통해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두 명의 불안한 인물이 원래 계획대로라면 학폭물의 주인공이 되었을 강백호와 단회성 불량배 캐릭터로 소모될 뻔 한 정대만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두 사람은 정확히 폭력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김수겸이라는 이상적인 선수를 통해 농구의 세계로 다시금 소환된다. 그리하여 북산은 상양전을 통해 비로소 완전히 농구의 세계로 진입한다. 농구라는 게임의 룰만이 아닌, 승리만이 아니라 패배마저 수용하는 완벽한 스포츠맨들과의 경기를 통해 인간과 인간이 함께하며 공유해야할 가치들을 배워나가며.
선수 김수겸의 가장 큰 미덕은 뜨거운 열혈 플레이와 실력, 룰을 지키는 깨끗한 농구방식만이 아니라 룰 이외의 것들, 그러니까 반칙과 불운, 심지어 악의에 반응하는 모든 태도를 포괄하는 삶의 자세에 있다. 학교 재단의 농구부 운영방식이나 자신들을 지도해 줄 어른들의 부재, 남훈으로부터 받은 부상과 이로 인한 패배, 그리고 무엇보다 해남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 속에 좌절하거나 분노할 만도 한데 김수겸에게는 그런 그늘이 존재하질 않는다. 분하고 마음 아프지만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진창 속에서도 별을 보는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성현준을 가격하고 나서 강백호는 다시 급격히 얼어붙는다. 반면 정대만은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성장한 장권혁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한다. 기억에조차 남지 않았던 평범한 플레이어가 5점 차 이내로 자신을 봉쇄할 수 있는 선수로 커가는 동안 자신은 거리에 시간을 뿌려댔다. 장권혁을 마주하며 정대만은 비로소 그가 흘려보낸 시간의 무게를 깨닫는다. 화려한 정대만과 눈에 띄지 않는 장권혁. 두 사람은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걸어온 선수다. 타고난 재능에 빚진 정대만과는 달리 장권혁은 평범한 선수에서 압도적인 끈질김과 엄청난 훈련량을 통해 주전 자리로 올라왔다.
만일 장권혁이 풍전의 강동준이나 남훈 같은 선수였다면 정대만의 각성 역시 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대만은 장권혁의 내면에서 그 자신이 놓쳐버린, 끊임없이 정진하며 노력해 온 농구 선수만이 쌓을 수 있는 단단함을 발견한다. 더불어 혼신의 힘을 다해 승리를 위해 뛰고 있는 상양의 나머지 선수들에게서도. 좋은 팀이다. 그래서 정대만의 복귀전은 반드시 올 클린 스포츠맨으로 구성된 상양이었어야만 했다. 북산의 멤버들은 이제 농구부 최후의 날을 정확히 반대의 거울상으로 마주하며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강백호의 파울 때문에 안경이 박살 난 채 후반전을 소화하는 성현준, 끈질기게 디펜스를 걸어오는 장권혁,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이택중과 오창석, 그리고 이 모든 선수들을 진두지휘하는 김수겸. 역설적으로 상양의 강함은 정대만의 투지를 끌어올린다. 정면으로 스트레이트 하게 승부를 걸어오는 상대에게는 진심을 꺼낼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가장 힘든 순간일수록 불타오르던 선수 정대만의 습성은 경기 후반에 무섭게 폭발한다. 김수겸이 분석한 대로 한 번 기세를 타면 거세게 치고 올라오는 북산은 정대만의 슛 리듬이 살아남과 동시에 대 역전극을 준비한다. 9점 차의 상황, 올코트 프레싱. 이미 거의 모든 체력을 소진한 정대만이 있는데도.
'이대로 쓰러질 순 없다. 여기서 무언가 해내지 못하면 난 그냥 어리석은 바보에 지나지 않아.' 장권혁의 성장은 정대만에게 가장 큰 쓰라림이었다. 그의 성장이 정확히 정대만의 공백에 비례했기 때문에. 실로 장권혁은 은유가 아니라 정대만이 버린 시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두 눈으로 자신이 놓쳐버린 시간의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공을 쫓는다. 마치 그 시간들을 지금 만회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과거 착실히 만들어 둔 깨끗한 슛폼에 의존하면서 그는 감각으로 슛을 쏴댄다. 정대만은 이 순간 완벽히 한 사람의 바스켓맨으로 코트 위로 복귀한다.
그러나 여전히 위축되어 있는 강백호 때문에 서태웅은 직접 파울을 해가며 강백호를 도발한다. 너답지 않게 뭘 하고 있냐고. 흥미롭게도 이 역시 산왕전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서태웅이 정우성을 상대로 고전하자 강백호는 그를 자극한다. 또한 마지막까지 데드볼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지는 플레이를 상양전에서는 정대만이 하는데 이 역시 산왕전에서 강백호에 의해 리바이벌된다. 실로 강백호는 상양전을 통해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던 것이다. 서태웅 덕분에 두려움이 사라진 강백호는 이윽고 성현준의 머리 위로 내리꽂는 슬램덩크를 시도하고 파울 판정을 받은 후 다시 한번 장렬히 퇴장당한다. 그 어떤 선수보다 더 큰 환호성을 받으며. 전술했듯이 상양전에서 슬램덩크를 주인공 강백호가 처음 선보였다는 것은 역시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이노우에는 상양전에서 백호의 호쾌한 덩크를 통해 폭력물로부터의 결별을, 본격 농구만화로의 전환을 선포한다. 상승 기세를 탄 북산은 파죽지세로 상양을 봉쇄하고 이윽고 결승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상양이었기에 그 어떤 경기보다 깨끗히 뜨거웠던, 농구의 정석다운 정면승부였다.
경기가 끝난 직후 김수겸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씩씩한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해남전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신흥 강팀 북산에 패배하며. 거의 모든 멤버가 3학년인 상태에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인터하이 예선. 분투했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던 우승에 대한 미련이 남을 법도 한데 김수겸은 분하지만 일말의 후회는 없는 표정으로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토록 깨끗한 승복이라니. 김수겸은 그와 그의 팀이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이 뛰어왔던 모든 경기의 매순간을. 전력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쏟아부었다. 그는 이 패배가 부끄럽지 않다.언제나 그렇듯이.
어떤 사람들은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의 대부분이 이런 논리 속에 작동한다. 승률과 스탯의 세계. 결과에 따라 돈과 거래가 오가고 정신과 로열티보다는 전적이 중요한.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그 어떤 결실을 거두든지 간에 과정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언제나 후회가 잔여물로 남기에. 김수겸은 분명히 후자였고 매 순간 전소했기에 해소해야 할 침전물이 없다. 고이지 않는 맑은 물처럼 그는 마음에 일말의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그의 팀과 마찬가지다.
1위도 아닌 팀이 이토록 강고한 프라이드를 지닌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순위나 승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떻게 싸웠는 지가 더 중요한 팀. 지난 4년의 흔적을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해남에 매번 밀리면서도 단 한 번도 후회스러운 경기를 펼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김수겸의 상양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 높은 프라이드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경기의 내용으로부터 기인한 자부심일 것이다. 김수겸은 진창 속에서도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을 찾아낸다. 잘 따라주지 않는 여건들을 원망하거나 비통해하지 않고 승리보다 위대한 과정의 가치를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 그리고 더 나가아 그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전달하면서.
어느 분야든 스포츠를 사랑해 본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비록 우승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팀이 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경기를 펼치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팀. 언제나, 언제나 목이 터져라 응원하면서 그들이 분투로 쌓아올린 역사 자체가 나의 프라이드가 되는 팀의 이름을 당신도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있을 것이다. 몇 번을 지더라도, 수없이 패배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런 경기를 하는 팀과 선수를 잊을 수 없다. 김수겸은 그런 농구를 한다. 승리보다 오래 기억할, 모든 순간 전력을 다하는 좋은 농구를. 그리하여 끝내 여러 선수들의 무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마는 선수들의 선수로서. 이것은 승패의 기록과는 별개로 그의 모든 경기를 함께한 모두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질 경험이다.
정말 많은 슬램덩크의 인물들을 사랑하지만 역시 인생은 김수겸처럼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무엇보다 후회하는 게 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는 불가역적인 것이니까. 안타까움도 주저함도 슬픔도 회한도 그 무엇하나 남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서 끝내 후련하게 완결할 수 있는, 그래서 마지막에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말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용맹함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 진창같은 현실 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가르키는 이 끝내주게 씩씩한 선수처럼.
p.s 김수겸의 일본식 이름은 후지마 켄지 藤真 健司
곧고 강한 등나무를 연상시킨다. 맑고 곧은 성정이 주변에 영향을 주고 결국은 타인을 함께 성장시키는, 그 다운 이름이다. 이제 막 개화를 준비하는 하나미치가 많은 것들을 배워갔던, 들불 같던 남훈이 전소시킬 수 없었던 강하고 단단한 나무. 호쾌하게 하늘로 상승하는 기세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을지. 윈터컵을 준비하는 그의 자세가 변함없이 강렬해서 웃고 말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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