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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by 꽃피네

조선대학병원에서 골절수술을 한 후, 선한병원을 거쳐 해남우리종합병원으로 옮겨온 나는 두 괴짜 환자와의 병실 생활을 매우 힘들어했다.

두 괴짜 중 한 명은 길길이 날뛰며 제 어미를 잡는 왼쪽 창가 '그 환자'였고, 다른 한 명은 진도에서 문어잡이 뱃일을 했던 문어박사 '진문배'였다.

베트남에서 돈 벌러 온 청년들을 고용해 문어잡이를 하고 있는 60대 후반의 뻐기기 좋아하는, 해골바가지처럼 삐쩍 말라버린 사내, 오른쪽 창문 앞 침대에 누워있는 뇌경색 환자인 그 '진문배' 말이다.

진문배는 뇌졸중으로 진도에서 이 병원의 응급실을 거쳐 입원을 한 지 2주일 동안의 뇌경색 급성기 때에는 오른쪽 신체를 거의 쓰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언어적 능력과 왼쪽 신체는 정상이었다.

문어박사 진문배는 교통사고로 오른쪽을 다친 나와 사정이 비슷하였다. 다른 점은 그는 똥싸개 오줌싸개였고 나는 혼자 스스로 몸을 움직이고 깨끗하게 한다는 점이 달랐다.

또한 그는 뇌졸중으로 중추신경계를 다쳐 완전 회복이 불가능하였고, 나는 말초신경계를 다쳐 어느 정도까지는 회복 가능성이 예측되었다..

905호 병실의 공기는 암울하였고, 환자들의 예후는 상당히 불투명해 보였다. 그러나 문어박사 진문배와 그의 사실혼 아내는 완전 회복을 꿈꾸고 있었고, 앞으로 두어 달 후에는 뇌졸중 스트로크 이전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 문어잡이를 다시 시작할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하고도 엉뚱하기 짝이 없는 착각이었다.


2025년 5월 2일,

"아저씨, 해남에 사우나 어디 없을까요?" 근처에 식당도 있고요 좀 가까우면 좋겠어요" 딸기가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편간호사의 부드러운 목소리처럼 몽환적이었으며 또로로록 하고 굴러가는 구슬처럼 듣기에 좋았다.

"사우나요? 전 해남에 와서 사우나 한 번 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만 여기는 시골이라 서울에 비해 시설이 현저히 떨어질 거예요"

"그럼 맛있는 식당은요?"

"매일시장 2층에 밥정이라고 있어요. 생선구이 백반이나 삼겹살에 공깃밥 먹을 수 있어요. 여러 가지 반찬과 미역국이나 된장국이 딸려 나옵니다. 시간을 아끼고 싶으시면 도착 20분 전에 미리 주문하면 되고요, 후식으로 라면 드시고 싶으면 고도리에 카라모텔이라고 있는데 1박에 카드로는 4만 4천 원, 현금으로는 4만 원 하니, 바깥양반하고 라면도 같이 끓여 드시고 오시던지요"라고 딸기에게 아는 대로 알려 주었다.

"아이! 모텔비가 정말 싸네요. 신나는 금요일 오후 되시겠어요 딸기언니!"라고 부추기는 38살의 앵두는 눈부셨다.

"오빠, 우리도 바람 쐬러 가자. 거기 생선구이 백반 한번 먹어보고 싶단 말이야"라고 옆 자리의 앵두는 전등남을 보채면서 암막커튼을 치더니, 걸치고 있던 옷을 훌러덩 벗어버렸다.

"야! 야! 앵두야, 내일은 태희언니랑 우진이랑 아이들도 들이닥칠 텐데 좀 쉬면 안 될까? 2007년 5월 2일 날 할아버지 제삿날을 잘못 지내서 너무 죄송하고 그래서 오늘은 좀 경건하게 지내고 싶어"

"우리 둘이 오늘 밤에 알콩달콩 콩을 볶고 있으면 하늘나라의 할아버지께서 보시고 얼마나 흐뭇해하실까나! 또한 우리가 금슬이 좋으면 애들에게도 안정감을 준다고! 그리고 요즘엔 시대가 변해서 효도하는 방식도 아주아주 달라요! 이 숙맥 남첩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원 놔두고 모텔에서 자면 쫓겨 난다고!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시면 병간호 안 했다고 앵두 넌 집에서 다시 쫓겨나게 될 거야. 태희가 마음을 넓게 써서 지호와 샛별이 엄마로 널 인정하고, 겨우겨우 어렵게 며느리로서 입성했는데 쫓겨나고 싶어?"

"그것만은 절대로 안되지. 그럼 딸기 언니랑 대목수 찐 사돈 어르신네와 바람도 쐴 겸 해남읍에 나가 맛있는 저녁밥만 먹고 오는 것도 안돼? 외계행성 아저씨도 모시고 가서 먹고 오자 오빠야"라고 하며 앵두는 전등남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공갈 키스를 했다.

"어서 옷이나 걸쳐. 간호사라도 들여다보면 어쩌려고 그래?"

"호호 알았어, 그럼 같이 가기로 한 거다. 언니, 외계행성 아저씨가 말씀하신 용하다는 딸기팬티 함 빌려주세요"라고 딸기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하며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어라! 그건 절대 안 돼 내 국보란 말이야. 이제 딱 세 장 밖에 안 남았는데, 이건 앞으로 정말 아껴 입어야 한다니까!" 딱 부러지게 앵두의 부탁을 거절하는 딸기였다. 딸기네도 외출복으로 갈아입는지 미끄러지듯 커튼 치는 소리가 났다.

"음 언제 봐도 멋지단 말이야 이 하채앵님의 가슴과 엉덩이는" 자기애에 흠뻑 도취된 앵두는 전등남의 머리를 껴안아 젖을 물렸다. 38인치의 거대한 골반에 어울리는 풍만한 젖가슴에 전등남은 그냥 파묻혔다.

"먹기 싫어? 그럼 집어넣는다!"라고 반협박을 하니 전등남은 전광석화처럼 앵두의 발딱 선 가슴을 배고픈 아이처럼 움켜쥐고 쭈쭈 흡입하였다.

"쭈쭈는 여기까지! 아래 진짜 맛있는 멀구슬 즙은 좀 있다 줄게" 앵두는 전등남의 발동 걸려 보채는 손을 치우며 옷을 후다닥 갈아입었다.

딸기와 앵두는 거의 동시에 커튼을 걷고 나타났다. "와아 우리 찐 사돈 마님 정말 예쁘시다!" 앵두가 딸기를 치켜세우자, 딸기도 "여신강림이 따로 없네. 어휴 눈부셔! 오빠! 지금 나 눈이 안 보여"라고 말하며 남편인 대목수를 돌아보았다.

커튼을 젖히고 나타난 앵두는 어깨선에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반짝이는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어깨선에서 가지런히 떨어지는 앵두의 생머리는 그 자체로 세련됨과 활동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앵두는 꽉 끼는 청바지를 엉덩이 골반에 겨우 걸치고 위에는 물색 체크무늬 티셔츠를 입고 짧은 쟈켓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를 본 전등남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 그만 앵두에게 들켜버렸다.

"오 우리 천재 오빠! 이 하채앵 여왕님의 쭈쭈가 먹고 싶다 이거지! 하며 전등남의 넓적다리를 톡톡 때렸다.

대목수의 머리를 빗기고 있는, 건강미 넘치는 딸기 또한 대단히 아름다웠다. 딸기의 머리카락은 마치 잘 다듬어진 실크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쇄골을 살짝 스치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그녀의 목선을 더욱 가늘고 우아하게 강조하였다.

딸기의 찰랑이는 머리끝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받아 반짝이며 생기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였다. 갓 세팅한 듯 정돈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딸기는 40대의 원숙미가 철철 넘쳤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건강한 스타일로,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현대 여성의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딸기는 몸의 곡선을 부드럽게 감싸면서도 활동에 전혀 제약이 없는 고급스러운 저지 소재의 와이드 팬츠와 허리를 강조하는 린넨 블라우스를 입어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실루엣을 연출하였다.

외출 채비를 마친 대목수가 와서는 같이 나가서 밥이나 한 끼 먹고 오자고 하였으나 나는 온몸이 망신창이라 극구 사양하며, 대신 동백콜택시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매일시장 2층의 밥정에 전화를 걸어 생선구이 4인분에 삼겹살 2인분을 주문해 두었다.

그들이 외출한 지 서너 시간 후에, 딸기부부가 먼저 돌아왔고, 이어 앵두부부가 돌아왔다. 딸기와 앵두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재잘거렸고 돈키호테 남편들도 오래간만에 회포를 푼 듯 싱글벙글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한 사람은 목과 가슴을 지지해 주는 필라델피아 칼라를 하고, 또 한 사람은 흰 척추보조기를 착용한 모습이 영락없는 좌충우돌 돌진하는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 같았다.

"언니네는 카라모텔에서 놀다 온 거야?"

"너네는 식당에서 나와 반찬거리 사들고 어디로 사라졌는데? “

"호호 그건 비밀이에요!"

"그럼 우리도 비밀!"

"하나 둘 셋 해서 동시에 말할까요?"

"좋아! 그럼 센다. 하나 둘 셋!"

"… ", “…”

딸기기 하나 둘 셋 했는데, 둘 다 아무런 말소리를 내지 않았다.

"와아! 우린 찐 사돈이 아닌 가봐. 그래, 카라모텔 가서 2만 원 주고 진하게 놀고 왔다. 됐어?

"우린요 남도호텔 가서 9만 원 주고 쭈쭈놀이도 하고, 꼬깔콘놀이도 하고 신나게 놀다 왔어요"

"쭈쭈놀이는 짐작이 가는데 꼬깔콘놀이는 머지?"

"어 언니, 이리 귀 좀 줘 봐요" 앵두가 딸기의 귀에 속삭였다.

"매일시장 코너에 매일상회가 있는데 거기서 꼬깔콘 한 봉지를 샀어요. 태희언니에게 배운 건데, 양쪽 젖꼭지에 꼬깔콘을 끼우고 훅 불어 쓰러뜨리기 게임인데요, 불어서 꼬깔꼰이 날아가거나, 쓰러져 떨어지면 술레가 된 내가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태희랑 꼬깔콘 술래잡기 놀이를 해 본거야? 오늘은 앵두가 술레였고?"라고 딸기가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내 건 아직 핑크색 처녀 젖꼭지잖아요. 오빠가 내 자그마한 앵두에 고깔을 얹어놓고 훅 부니 과자가 다 날아가는 거예요. 오빠가 벌칙으로 뭘 하겠냐고 묻길래 어릴 때 학교에서 손들고 벌 섰던 기억이 번뜩 떠올라 손들고 벌 서겠다고 했지 뭐예요. 손들고 벌서는 것이 쉬워 보여도 그게 아니더라고요"라고 말한 앵두는 달콤했던지, 아니면 무엇인가 아쉬웠던지 쩝쩝 입을 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무슨 즐거웠던 일이 생각났던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앵두야 네가 졌으니 벌칙을 받아라!"

"오빠! 이러면 섭하지! 우리 사이에 벌칙이라니"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건 계산을 똑바로 해야지 안 그래? 앵두야"

"오빠. 그러다간 곧 후회한다. 난 분명히 말했다!"

"알았어 그러니 벌이나 받으시지"

"손들고 10분 동안 벌 설게. 좋아 까짓거 인심 좀 썼다. 20분 동안 손들고 있어 줄게. 대신 오빠는 오늘 밤 내내 내 몸에 접근 금지야"

"분명히 후회 않을 거지? 지금부터 20분! 시간 잰다. 시작!"

앵두는 전등남의 시작이란 신호에 맞추어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게다가 자신 있다는 듯이 초등학생처럼 무릎마저 공손히 꿇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예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5분이 지나자 무릎을 꿇은 자세가 불편했던지 앵두는 궁둥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번쩍 치켜든 손도 차츰 비비 꼬며 흐트러졌다.

"하채앵! 어떠냐? 고소하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손들고 벌을 서니 온 몸이 쑤시고 욱신거리지? 아야! 네 엉덩이가 청바지 속에서 터지겠다. 어때? 편하게 속옷만 입고 벌 설래?"

"흥 어림없는 말씀! 난 예쁜 앵두, 채앵이라고! 오빤 오늘 밤 국물도 없다"

"10분 지나셨어요. 하채앵 학생! 어허 이 팔 똑바로 못 들어? 벌 받는 태도가 영 맘에 안 드는데"

전등남의 장난기 서린 말에 앵두는 바짝 약이 올랐다. "그런다고 천하의 여왕벌 앵두가 굴복할 줄 알고? 흥 꿈 깨시지 오늘 밤 절대로 안 줄 거야"

"난 달라는 말 안 했다. 오늘 밤은 영 안 당기네! 벌써 권태기인가 봐. 드디어 15분 지났다. 5분만 참아 앵두야!"

"나 안 해! 이걸 내가 왜 해?"하고 앵두가 팔을 내려버리자 전등남이 앵두의 팔과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서럽게 엉엉 울다가 오빠에게 앞, 뒤 모두 허락할 수밖에 없었어요. 언니네는요?"

"우린 추억을 되살려 딸팬놀이를 했지"

"딸팬요?"

"응 딸기팬티놀이라고 딸기팬티를 입고선 오빠를 꿇어 앉힌 뒤, 구석구석 청소를 시켰지. 청소를 잘하나 어쩌나 감독하느라 다리 벌리고 오랫동안 서있었더니, 아이고 지금도 뻐근하네. 일 년 치 청소할 걸 오늘 오후에 다 시킨 것 같아"

"아휴 너무 부럽네요. 태희언니는 괜히 꼬깔콘 놀이를 하자고 꼬드겨서 그때도 당하고 이번에도 흠뻑 당했지 뭐예요. 태희언니 젖꼭지는 하늘이, 시호, 지호, 샛별이, 아이를 네 명이나 낳아 젖꼭지가 꼬깔콘에 딱 맞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불어도 안 날아가서. 그때도 내 입천장 다 까지도록 태희언니 발바닥에 키스했는데, 이제 다시는 꼬깔콘놀이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앵두는 종알거렸다.

"어휴 가엾은 우리 찐찐 사돈. 맨날 당하기만 하면 어떡해. 복수전을 해야지 안 그래?"

"어떻게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요?"

"그럴 때 말이야 술래가 되면 발바닥을 그냥 퉤! 하면서 빨지 말고 애무하듯이 키스하면 아마 거기가 근질거려 태희는 미칠 거야.

그럼 가장 축축하고 민망하고 민감한 곳을 공격해 버려! 게임 끝이야! 발바닥만 핥지 말고! 달아오르면 뜸 들이고, 약을 올려서 키스해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애태우면, 태희는 하고 싶어 펄쩍 뛸 거야"

"언니 야동 봤죠? 쓰리썸 본 거예요? 그런데 우린 그때 쓰리썸을 한 게 아니고, 피 튀기는 서열정리를 하고 있었던 건데요 머“

“서열정리? 처첩의 혈투? 그런 거?“

“녜, 맞아요! 꼬깔콘놀이의 승자가 본처가 되고, 패자가 둘째 부인이 되기로 내기했던 거예요”

“호오 그래서?”

“그때우리 두 사람은 서로 불겠다고 우겼거든요. 젖꼭지에 고깔 콘을 씌운 다음, 훅 불어 쓰러뜨리기는 아주 쉬워 보였어요. 그래서 언니더러 술래 하라고 끝까지 우겼지 뭐예요. 그런데 태희언니 젖꼭지가 꼬깔콘에 딱 맞아서 아무리 후우 하고 불어대도 꿈쩍도 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무릎 꿇고 언니 발에 키스를 했는데, 갑자기 서러워져서 눈물이 방울방울 언니 발등에 떨어졌어요. 언니가 도닥이며 날 일으켜 세우자, 우리 둘은 오빠를 공유해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면서 껴안고 한참을 같이 울었어요 “라고 끝을 내며,

태희언니 오면 당장 해 봐야지, 좋아 이제는 찐찐 복수전이다! 무릎 꿇고 언니의 발바닥만 핥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의를 불태우는, 호적상 본처였다가 둘째로 밀려난 하채앵이었다.


2007년 5월 2일, 음력 윤 3월 16일,

서울 송파 신천 새마을시장 뒤 주택에 시집간 쌍둥이들이 남편들과 함께 몰려왔다. 다만, 그제 4월 29일 날 남자아이를 출산한 우주를 제외하고 모두가 모였다. 우주와 태민이는 두 달 전, 태어날 아이의 작명으로 한참 고심하다가 칠레에 출장 가 있는 천재 전등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했었다.

"오빠! 그간 잘 있었어?"

"응 우주구나. 너네들도 잘 있고? 그런데 웬일이냐?"

"태민오빠는 졸업반이고, 6월 25일부터 29일까지 행정고시 2차 필기시험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다행히 행시 1차 시험은 합격해서 한시름 놓았지만 안쓰러워. 오빠가 태민이 오빠에게 그 천재 머리 좀 빌려주라"

"에휴 내 머리를 뚝 떼다 붙여줄 수도 없고, 암튼 달달 외우다 보면 햇뜰 날 있겠지. 그리고 태민이네는 학자 집안이라 엄살일 거야. 붙는다고! 틀림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태희를 봐봐. 얼마나 영악한데"

"오빠! 우리 아기 이름 말이야 남자아이나 여자아이에게 어울리는 이름 생각나는 거 없어? 외국인이 부르기 쉬운 걸로 추천 좀 해줘. 엄마 배를 톡톡 차는 게 꼭 남자아이 같은데, 의사 선생님께는 아직 안 물어봤어"

"은하 어떠냐? 우리은하 말이야!"

"영어로 갤럭시! 멋지다. 그냥 은하라고 불러도 참 예쁘네. 오빠 고마워 나중에 한턱 쏠게"

그렇게 해서 우주와 태민이 사이에 은하가 태어났다. 칠레에서 돌아온 전등남은 로스앤젤레스의 울보 아내 앵두를 달래랴, 출장보고서를 쓰랴, 출산일이 다가오는 이고녀를 보살피라, 집안일도 도우랴 정신이 없었다,

그해 할아버지 제삿날은 4월 3일, 음력 정 3월 16일이었는데 전등남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굿 사마리탄 호스피털에서 유산한 앵두를 보살피고 있었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전등남의 할머니와 엄마인 공주도 기일을 윤 3월 16일, 양력 5월 2일로 엉뚱한 착각을 하였다.

5월 2일, 배가 남산만한 이고녀가 할머니와 공주를 도와 제사상을 차리고 있을 때, 전등남은 벽에 걸린 달력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해는 3월 윤달이 들어서 음력 정 3월 16일이 양력 4월 3일, 윤 3월 16일이 양력으로 5월 2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즉 할아버지의 제삿날은 음력 정 3월 16일인 지난 4월 3일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아들을 본 공주는 "큰 애야 왜 안절부절 못 하니? 어디 안 좋아?" 했더니 아들이 할아버지 제삿날은 이미 지났다고 이실직고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달력을 꼼꼼히 살펴본 공주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다들 이 기막힌 사태를 어찌 수습할까 안전부절 하면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또또할머니는 "작년처럼 제사상을 차리고 절할 사람은 절하고, 추도할 사람은 추도하고, 그렇게 각자 믿는 대로 제사를 지내자"라고 하며 짐짓 애써 태연한 척하였다.

제사가 끝나고 할머니가 모두에게 한마디 하였다.

"우영이는 음력 1월 1일 설날 명절에 태어났고 길하다 하니 앞으로도 음력 생일을 쇠도록 하고, 내년부터는 할아버지 제사는, 1981년 4월 20일 날 돌아가셨으니 양력으로 4월 20일 날 지내도록 하자. 그러면 올해처럼 제사 잘못 지내는 불상사는 없을 듯하구나.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대학 들어가자마자 결혼상대자를 물색하고, 아니면 스물 언저리에 짝을 찾고 늦어도 27살 이전에는 물 떠놓고 맞절하고 혼인신고 하고 살도록 해라. 결혼하는데 살림밑천인 돈을 없애서는 안 된다. 결혼하는데 돈을 마구 쓰거나 빚을 내는 것은 농부가 종자를 없애는 경우 없는 짓이니 반드시 검소하게 치르도록 해라" 할머니의 일장훈시가 끝나자, 공주가 할머니의 뒤를 이어 당부를 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자기 짝을 고를 때, 건강과 마음씨를 보고 골라야 한다. 상대가 좀 부족하면 너네들이 먹여 살리면 된다. 이혼한 가정이나 단명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부모를 가진 짝은 피하도록 해라. 먼저 그 집안사람들을 살펴본 후, 시집 장가가면 성공한 혼사이니 반드시 상대방의 가정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주책이다만 엄마 뱃속에 또 아기가 들어섰구나"

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머라고요 아기라고요!" "축하해요 엄마 아빠" 하고 왁자지껄 집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이고녀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오른손 인지로 자신의 뱃속의 아이를 콕콕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듯이 공주에게 따졌다. "엄마, 그럼 애는 존댓말 해야 하는 조카고 엄마 뱃속의 아이는 ’에헴삼촌‘이 되겠네요!"

그리하여 며칠 후 5월 10일이 되면, 이고녀는 건강한 딸을 출산하게 될 것이다. 전등남과 이고녀는 그 첫 딸을 "하늘"이라고 이름 지을 것이다. 그러나 전등남과 앵두는 가족 몰래 이미 혼인신고를 했기에 전등남과 그의 아내 김태희의 아이는 엄마의 성을 따라 김하늘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아니 운동을 왜 안 하는 거야. 재활치료 선생님이 시키면 따라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네가 먼데 의자에만 앉아만 있는 건데? 네가 여기서도 사장이냐? 이 문딩이 잡놈아"

2025년 5월 2일 해남우리종합병원 905호실, 진문배의 사실혼 아내가 문어박사 진문배를 바득바득 잡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안 하려고 한 게 아니고 힘들어서 좀 쉬고 있었다고"

진문배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자, 그의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진문배를 노려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부부사이에는 갑자기 냉기류가 흘렀다. 진문배가 부부싸움을 피하려고 운동하러 나가겠다며 종업원으로 부리고 있던 베트남 청년 응우옌 반 민에게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지시하였다.

베트남 다낭 근처 산골에서 온 이 청년은 부모가 총명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라고 민(明 중국발음 밍)으로 이름 지었다.

응우옌 반 민은, 영어와 한국어는 그야말로 일자무식!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깡통이었지만, 부모가 기대한 바대로 눈치 하나는 재빨랐다.

그는 진문배로부터 월 205만 원을 받기로 하고, 문어잡이 뱃일을 했는데, 진문배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입원하자, 진문배 아내와 함께 간병인이 되었다.

민은 뜨엉선 산맥 속의 꺼뚜족 청년으로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햇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과 호리호리한 몸매가 인상적이었다.

민은 사장 진문배에게 순종적이었다.

"너 이 개새끼야! 이 새끼 좆나게 멍청하네"라고 이렇게 심한 욕설을 들어도, 진문배 부부의 엉뚱하고도 멍청한 지시에도,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보기 드문 순한 청년이었다.

민이 간호사 데스크 앞 오른쪽 벽면에 있는 공용 휠체어를 가지고 왔다. 진문배의 사실혼 아내와 민이 환자의 허리 뒤춤을 잡고, 오른쪽 어깨를 부축하여 진문배를 휠체어에 태웠다.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진문배의 오른쪽 발과 오른손이 멀쩡하니 휠체어를 혼자 스스로 타야 하는 것은 물론, 밥이며, 용변을 보고 처리하는 것, 일상생활의 모든 일을 스스로 하도록 해야 뇌경색을 이길 수 있다고 진문배 부부에게 조언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쇠귀에 경 읽기였다.

민은 휠체어의 발판을 펴고 진문배의 양쪽 발을 휠체어 발판 위에 얹혔다. 그리고 그를 태운 휠체어는 사실혼 아내의 쏟아지는 욕설을 뒤로한 채, 905호 병실 밖으로 미끄러져 갔다.

지금 이들은 병원 정원을 한 바퀴 돌 작정이었다. 정원 산책은 병실에 갇혀있는 환자들에게 운동과 힐링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 주기에 아침, 저녁으로 워킹을 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진문배 아내는 진문배가 오른손과 발을 움직여 스스로 휠체어를 움직이나 감시하려고 몰래 따라가, 언덕 위 도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진문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발도 발판에서 내리지 않고, 마치 18세기의 인력거를 탄 귀족처럼 민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서, 정원의 경치며 행인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이런 잡놈이 나를 속여! 언니, 내가 몰래 가서 보니깐 민이가 휠체어를 밀고 저 새끼는 턱 하니 앉아 구경하고 자빠졌더라고요"

진문배의 아내가 신랄하게 남편을 비판하자, 창가 쪽 환자의 엄마도 살짝 거들었다.

"참 신랑이 좀 노력해 주면 동생이 편할 텐데, 동생 심정도 이해 가네"

그때, 진문배의 휠체어가 딱 맞추어 기어 들어왔다.

"너!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너 혼자 휠체어 탔어? 쟤가 밀었어? 오늘부터 너 혼자 잘해 봐"하고 그의 아내가 휑하니 나가버렸다.

그러자 진문배의 때아닌 의처증이 발동하였다. 끊임없이 남의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해대니 근처에 있던 그의 아내가 병실로 들어왔다. 오늘따라 그녀의 굽은 등허리가 더 휜 것 같았다.

"야 이 새끼야 머 때문에 5분에 한 번씩 남의 전화기로 전화하냐" 진문배를 보자마자 눈에 쌍심지를 켜면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었다.

멀쩡한 오른손과 발이 있는데도, 밥도 떠먹여 줘, 용변도 침상에서 싸면 치워주지, 휠체어로 바깥구경 시켜주지 그는 퍼질러 잠만 자면 되었던 것이다.

"뇌경색은 일찍 재활치료 열심히 해서 고쳐야지 그래야 문어배 다시 타고 돈 벌어먹고 살 거 아니냐 이 원수야!"

그의 아내는 이어 왼쪽 창가의 환자 엄마에게 하소연을 해 대었다.

"언니 아들은 새벽에도 운동하러 잘도 나가더구먼. 이 원수는 손 하나 까닥하는 것도 하기 싫어한다니까! 늙어서 이 놈 뒷바라지하다가 나 죽겠네 언니"

진문배의 아내가 창가 환자 엄마에게 자신의 주도권을 과시하듯, 남편을 이놈 저놈 하면서, 남편의 면전에서 대놓고 막말과 쌍욕을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창가 환자의 엄마는 그런 진문배의 아내에게 진문배를 감싸는 듯한 말을 하며 이 표독녀를 진정시켰다.

"편마비 때문에 그럴 거야 누군들 일부러 그러겠어?"

"뇌경색은 3개월이 골든타임이라던데 그 기간 지나면 영영 못 고친대요. 저 인간은 그러거나 말거나 잠만 퍼 잔다니까!

재활치료 선생님들이 그러는데 이 사람은 시키는 운동도 안 한데요. 나보고 재활치료실에 와서 하나 안 하나 지켜보고 있으래요"

그의 아내는 분이 덜 풀렸는지 삿대질을 하면서 "야! 너! 나 아님, 넌 죽어. 네깐 걸 누가 돌봐주냐"라고 하면서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다.

여자들끼리 모여 남편들 흉을 보거나 욕을 해댈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본인 남편의 흉만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는 여자가 있으면 그 남편을 살짝 감싸거나 듣기 좋은 칭찬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 하면 그 남편이란 작자는 그 여자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미우나 고우나 살 붙이고 사는 자기 남편을 제삼자가 형편없다고 하면 기분 좋을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 동생. 그래도 남편이 여수에 집도 있고, 고깃배도 있고, 아프기 전에는 진도에서 제일가는 문어잡이 고수였다며?"

"몇 달 전에는 잘 나갔죠. 어휴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저 인간 저렇게 자빠져 있으니 답답하네요"

여자들끼리 통용되는 그런 무언의 규칙을 잘 아는 창가 환자의 엄마가 끼어들자 금방 진정되었다.

진문배는 딸이나, 아들이나, 손자나, 아는 동생이나, 동네 사람들이 병문안 오면 눈물바람을 해댔다. 그는 울보였다. 그는 본처를 두들겨 패서, 돈 한 푼 안 떼어주고 쫓아낸 악귀였다.

이 악마는 응우옌 반 민에게 무슨 자기가 마초인양 거칠게 대할 때가 많았다. 밤중에 무슨 떨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면, 진문배가 오줌똥을 싸서 민이 일어나 그것을 치우는 소리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창피해하거나, 민망해하거나, 다른 환자나 보호자에게 미안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철면피이기도 하였다.

화장실에 갈 수 있는데도 굳이 병상에서 똥을 싸는 녀석의 심보가 무엇인지 짐작은 갔다. 그는 민에게 어차피 월급만큼은 일을 시켜야 되는데 문어를 못 잡게 되었으니 자기 똥이라도 치우라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 되면 월급 받고 베트남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은 출국 전날까지 전문배의 똥오줌을 치우고 떠났다.

베트남 종업원들이 떠나고 전문배에게는 여수의 집 한 채와 조그만 문어잡이 배가 있었다. 그는 이것을 발판으로 병마를 딛고 일어서야 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여수 여천 석유화학단지가 불황으로 집값이 쑥대밭이 되었다. 귀족노조의 불법파업과 이를 틈타 중국의 석유화학제품이 국제경쟁력에서 우리나라 석유산업을 앞질렀기 때문이었다

그 여파로 여수 지역은 완전 망조가 들어 집값이 대폭락 하였다. 여수에 집 한 채 있어도 그것은 서울이나 경기도의 수평짜리 화장실보다도 시세가 나가지 않았다.

또한 문어배라고 해봤자 3- 4 톤짜리 조각배, 그것도 대부분 은행빚으로 장만한 것이 아닌가.

전문배로서는 건강을 되찾아서 일터로 가야 할 이유가 분명했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아내가 길길이 날뛰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사장 입네 하고 남에게 자기가 싸놓은 똥을 치우라는 꼴이라니 자기가 휠체어 타고 화장실에 가서 싸고 오면 운동도 되고 어디 좀 편한가.

하루는 왼쪽 창가의 환자가 기분이 좋은지 누워있는 전문배에게,

"형님 똑같은 처지 환자끼리 잘 지내봅시다"라고 했더니 전문배 아내가 비웃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남편은 여수에 집도 있고, 억이 넘는 문어잡이 배도 있는데 왜 똑같다 하나요?" 하며 그 환자와는 똑같지 않다고 따지지 않았던가.

뇌경색으로 왼쪽 신체에 편마비가 있었던 진문배는 수개월 후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아마도 절뚝거리며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이어가고 있거나, 다른 사내가 선장이 되어 자신의 아내와 손잡고 문어잡이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만약 뇌경색 초기에 적극적으로 재활치료를 했더라면 향후 그의 치료결과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월급만큼 자기 똥이라도 치우게 하는 배타적 이기심이 그에게 천추의 한을 남길 것이 뻔했다. 완치의 기대! 그것은 오만하고 엉뚱하기 짝이 없는, 진도에서 소문난 문어잡이배 '진문배' 문어박사와 그 아내만의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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