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상은 움직이지 못하는 나에겐 바다였다. 몇 날 며칠을 누워 있어도 지겹지 않았다. 침상은 또한, 내게 있어 딱 맞는 해안가 주택이었으며 방이었다. 이 병상은 내가 24시간 내내 생활하는 떠 있는 주택, 바다의 방주였다.
그 배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방지하려고 항상 양쪽 팔걸이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침대 낙상방지용 날개를 만지작거리다 어느샌가 잠에 빠지곤 하였다.
요즘 나의 넋은 세상 살 판 났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욕망에 빠진 육체가 영혼을 꽁꽁 묶어 저 깊은 구석에 처박아 버린 채 살아오지 않았던가.
문가 쪽의 비구니 스님, 욕쟁이와 딸기, 전등남과 이고녀, 그들의 엄마와 아빠, 할머니 등 각기 세상 살아가는 모습은 내 시들어가는 몸뚱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내 육체는 현재를 살지만 내 영혼은 과거를 살고, 미래를 지금 살고 있었다. 또한 타인의 삶에도 어느샌가 끼어들고 있었다.
왼편 칸막이 커튼 뒤의 유령의 계단이 삐걱거리면 나의 영혼도 덩달아 일어나 뒷마당으로 향하였다.
이지러진 조각달 아래, 뒷마당에서는 라비 샤르마가 손짓을 해가며 제니 스미스와 마르코 폴로, 아이샤 시디크, 파티마 시디크에게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나는 라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슬그머니 뒤에 앉았다.
공주네 가족들 중 누가 가장 행복의 총량이 큰지 유령들의 비밀투표가 엄숙히 행하여졌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 투표 결과에 대한 발표가 시작되었다. 계량한 행복과 고통의 총량 발표를,
"일찍 죽은 공주 아빠 고통의 총량 50점, 청상과부 공주의 엄마 행복 70, 공주 행복 90, 머슴오빠 행복의 총량 95!"
라비가 청중을 둘러보며 설명하였다..
"그 이유인즉슨 고아머슴은 혈혈단신 고아에서 대가족의 가장으로 신분이 상승하였고 일가를 이루었지,
거기에 토끼 같은 자녀들을 열이나 두었고 동생 겸 아내를 얻었고, 엄마 겸 장모가 생겼어. 그리고 금전운도 따랐지.
이 이상 무슨 부귀영화를 인간세상에서 더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100점 만점에 가산 점수 50점, 총 150점!
다만 조실부모 마이너스 30점, 버려진 아픔 마이너스 25점, 고통의 총량 55점; 따라서 행복의 총량 150 - 고통의 총량 55 = 95가 공리주의적 행복의 총량이 되었는데 이견 있는가?"
모두들 박수로써 동의를 표명하였다. 이어서 다른 이들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공주 또한 오빠 겸 남편에게 하늘의 연분이 닿아 부부금슬 한없이 좋고, 열 자식 낳아 아파서 잃은 아이가 없으며, 배웠고, 경제적 능력에, 풍족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으니 남편과 같은 150점!
거기에서 아빠 잃은 고통의 총량이 30점, 출산의 고통 10점 및 가사 및 육아의 고통 20점이 감점 요인으로 공리주의적 행복의 총량은 90점이 되었는데, 반대 있는가?"
라비의 계량 결과 발표에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단 한 유령 마르코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모두들 그 이유를 궁금해하였다.
"아니 아이들을 열이나 출산했는데 고통이 겨우 10점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의 말도 일리는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비밀투표에서 마르코는 공주의 출산 고통을 10으로 적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른 유령들은 다들 공주의 출산 자체를 고통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닌가.
"마르코 생각 좀 하고 유령 생활 해라. 공주는 아기 욕심에 아기 낳는 것이 무섭지도 힘들지도 않았단 말이야" 제니가 마르코를 쳐다보며 설명해 주었다.
"맞아. 공주에게는 아기를 많이 낳아야 할 간절한 이유가 있었거든. 그래서 그녀는 출산을 고통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거거든" 라비가 제니를 곁들였다.
마르코는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이 "때로는 다른 여자들이 고통이라고 느끼는 일도 공주에게는 고통이 아닌 게구나!"라고 수긍하였다.
"자 자, 이제 공주의 엄마,
공주엄마는 남편을 잃어 고통 50, 여성의 쾌락을 상실했으니 고통 30, 고통의 총량은 80,
그러나 공주가 사다준 사내 인형을 벗 삼아 동지섣달 긴긴밤을 지혜롭게 보냈으며,
경제적으로도 죽은 남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고,
아들 겸 사위을 얻었고, 손자를 열이나 두었기에 행복 총량 100! 거기에 가산 50 하여 행복의 총량은 150!
따라서 가감계산하니 최종 행복의 총량은 70이 되었어. 이견 없지?"
"짝! 짝!" 박수가 터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비운의 젊은 우영상사 사장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공주아빠는 처와 딸을 두고 고통스럽게 불에 타 요절했으니 거두절미하고 고통의 총량은 100에 가산 50, 총 150!
다만 생전에 가장의 역할을 다하여 상쇄요인 50,
임종 전 아내와 딸의 손을 고아머슴 손에 쥐어 주고, 마지막 순간에도 가장의 임무를 인수인계 하였으니, 상쇄요인, 이 또한 50,
따라서 남는 고통의 총량은 50!
이상으로 공주네 가족 구성원들의 공리주의적 행복과 고통의 총량에 대한 계량 결과 발표를 마치겠어"
라비가 공정의 천칭을 들어 올리며 끝을 맺었다.
만약에, 라비와 유령들이 이 요절한 가장을 칸트의 도덕적 정언주의로만 판단했다면, 그는 모든 인간적 도리를 다하였으니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느끼는 안도감은 100에 해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태양의 후예 라비 샤르마의 모든 발표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바람에 플루토의 지하세계가 열리고, 스틱스강을 지키는 카론이 일어나 유령의 계단을 작동시키니 음침한 콘크리트 회색 계단이 "끼익 끼익" 삐걱대었다.
유령들은 다들 잠에서 깨어 나와 환희의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나자 공주와 머슴 부부의 아들인 전등남에 대한 라비의 발설이 이어졌다.
82년생 전등남은 공주부부의 큰아들 맏이로서 엄마, 아빠, 할머니를 공경하고, 일도 도와드리며 동생들을 잘 챙겼다. 그는 큰아들답게 늘 쌍둥이 여동생들과 의좋게 청소년기를 보냈다.
때로는, 혼자만 아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쌍둥이 딸들이어서, 여자애들이 커가면서 무슨 비밀이 그렇게나 많은지, 자기들끼리만 속닥속닥해서 외톨이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전등남은 이해심 많은, 너그러운 큰오빠였다.
이 아이는 누구에게나 줄지만 알았지 받을 줄은 모르는 좋은 오빠였고, 아들이었고, 손자였다.
대가족에서 타고난 영향대로 전등남은 가족이 우선이라는 가족제일주의 정신이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가족 외출 시에는 얼굴이 화상 흉터로 일그러진 아빠를 대신해, 엄마와 할머니의 보디가드도 되어야 했고, 우는 쌍둥이 동생들을 도닥여야 했고, 정육점 구석에서 손님들과 등을 지고 묵묵히 고기를 썰고 포장하는 아빠의 심부름도 해야 하는 나름대로 바쁜 아이였다.
전등남의 학교 친구들은 82년 이후 출생하여 배고픔을 몰랐던 신세대들이었다. 이들은 부모세대의 헌신과 노력으로 배곯지 않는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대부분은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 외동세대들이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나'만 주목받아야만 외롭지 않은 '외동콤플렉스증후군'마저 가지고 있었다. 집에서 그들은 왕이었던 셈이다.
이런 세태에도 불구하고, 일찍 요절한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보살피는 덕분인가 전등남 형제자매들은 야단법석 요란했지만, 집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그들은 서로 아끼며 우애로 똘똘 뭉쳐 잘 컸다.
전등남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전등남은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과 기억력이 남달랐다.
특히 직관력과 통찰력이 아주 뛰어나, 신기하게도 한번 보면 그냥 알고, 그냥 기억하였으며, 그냥 응용할 줄 알았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기에 참 편리하였다. 그는 하늘이 내린다는 천재였다.
"장부가 어쩜 이리도 많아. 올해 얼마나 벌었는지 어디 볼까"
"한머니, 제가 봐 볼게요"
"아이고! 이쁜 내 새끼. 그럴래?"
전등남은 할머니를 한머니로 부르며 사랑받으며 똑똑하게 커나갔다. 그는 참으로 영특한 아이였다.
그는 또래 아이들이 다 하는 방과 후 수업- 국어, 영어, 수학 과외나 음악이나 특기 학원-을 다닐 필요조차도 없었다.
젊디 젊은 할머니도, 공주 같은 엄마도, 흉측한 용모의 아빠도 이 아이에게 일부러 천재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전등남이 그저 자신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랐었다.
전등남은 2001년 SKY대 이과대학 천문학과에 진학하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부모님이 그리울 때면 신림천 뚝방에 올라가 별을 헤었던 슬픈 고아아빠처럼, 더 많은 별을 헤보기 위해서였다.
전등남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자애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지적 호기심과 관심은 보통 사람이 생각할 때,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부분도 많았다.
그는 수학, 과학, 물리, 천문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 이과 학문과 문예, 창작, 철학, 역사 등 문과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다. 또한 그는 자연 현상과 밤하늘 저편에도 원초적 호기심이 지대하였다.
전등남은 외로울 시간이 없었다. 집에서 쌍둥이들 동생들이 빽빽 울거나, 다투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는 통에 늘 할머니나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엄마가 물려주신 롯데파이어니어 전축으로 자주 음악 감상을 하였다.
2002년 대학 2학년 때, 듣던 전축이 별나라로 가버렸다. 그래서 아빠를 졸라 중고를 사달라고 했는데, 당시 최고급 클래스의 오디오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설치 기사 두 사람과 음향기기 수입업자 사장이 오디오 세트 설치를 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다.
그들은 고음역대의 소리를 내는 나팔꽃 모양의 혼 트위터가 우퍼통 위에 있는 아카펠라 바이올론 2001 스피커를 옮겼다.
설치 기사들이 공주에게 담배값이라도 기대하며 한 마디씩 하였다.
"사모님, 대단하십니다. 스피커만 해도 수천만 원도 넘는 걸 사시다니"
"두 분의 아드님 사랑이 대단하신 거지, 안 그래?"
"맞아요. 우리 때는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엔 2 웨이 스피커를 최고로 쳤는데 참 세월 빠르네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장이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1983년 당시에는 파이어니어 TSM-1 스튜디오용 스피커가 참 좋았다 하더군요. 요건 3 웨이여서, 그거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고음대 또한 깨끗해서 좋지요"라고 하며 아카펠라 바이올론 스피커 2001이 최고란 듯이 과장해서 말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라비가,
"1983년 이후, 일제 파이어니어 TAD TSM-1, 그거 들어본 유령 있어? 라비가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단 오클라호마 제니만 빼고.
"인간! 푸어박 너는? 1983년 여름에 네 첫사랑 요코네 집에서 안 들어 봤어?"
나는 아니라는 손짓을 하며 대답했다.
"요코네 집에서 들어 봤던 것이 파이어니어였던가 마란츠였던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그런데 TAD TSM-1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해. 왜냐하면 전문 스튜디오가 아닌 일반 가정집이었거든"
그러자 제니가 우쭐해하며 내 말을 받았다.
"나는 확실히 들어봤지.
2 웨이 스피커였는데, 저 중음역대는 베이스와 목소리를 또렷이 전달하는 데, 특히 투투투 툭, 펑! 펑! 빵야! 빵야! 총소리, 대포소리 하나는 끝내주더라고!
트위터는 높은 도 C7을 훌쩍 넘는 바이올린 E현의 하모닉스 주법의 초고음을 완벽하게 내 귓전에 전달해 주었지. 감동 또 감동! 그 자체였어"
"어디 보자 초고음역대라. 리스트 라 캄파넬라에서 땡! 땡! 작은 종소리 부분이나,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 아리아'같은 높은 파, 이런 높은음을 완벽히 귓전에 전달해 준단 말이지?"
"그렇대도 그러네. 소름이 돋더라니깐!"
"어디에서 들었는데?"
"샌프란시스코에는 수많은 전문 스튜디오가 있는데 관광 가서 들었어.
안내하는 사람이, 한 쪽당 250W, 두 쪽이니깐 500W 야마하 파워앰프에,
스피커를 완벽히 제어하는 프리앰프로, 요즘 스튜디오에서는 디지털에 밀려 잘 쓰이지 않지만,
당시엔 한창 유행했던 스튜더 A800, 24 트랙 릴 테이프를 재생시켜 들려주신다고 하더라고.
그런 소리를 태양계 북쪽 방향, 글리제 445 쪽으로 향하는 보이저 1호는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몰라"
"아하! 보이저호에 황금레코드판이 실렸댔지!"
"하지만 4만 년 후의 일을 지금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우주사를 젖혀두고, 아이샤와 파티마 시디크 자매는 셈포르나 동생들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라비에게 물었다.
"요즘 아이들이 집이나 야외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가성비 있고 실용성 있는 애플 블루투스 스피커는 무얼까"
"시디크 자매들아! 지금 1983년 투웨이 스피커 이야기하고 있는 데, 갑자기 왠 2025년 애플 블루투스 스피커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아이샤와 파티마 시디크 자매가 라비에게 한 질문을 제니가 냉큼 가로채, 황당하다는 듯이 아이샤와 파티마 시디크 자매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라비가 제니에게 가만 있으라는 제스처를 하면서 말했다.
"글쎄 애플은 도저히 추천 못하겠는 걸. 애플은 스티브 잡스 사후로 팀쿡이란 자가 다 말아먹었어. 푸어박 너도 지금 애플 아이폰 쓴다며?"
라비가 요즘의 애플 아이폰에 실망했다는 듯이 투덜대며 내게 물었다.
"폰만 그래, 아이폰의 글 수정을 막는 흔들기 기능 때문에 쓸 뿐이야. 난 지구상 어떤 폰이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 머든 잡히는 대로 쓸 수 있거든. 따라서 앱등이도 삼엽충도 아니란 말이지"
"글을 쓸 때 화면 큰 노트북이 더 편하지 않아? 창을 여러 개 띄워 놓고 글을 쓰면 편하잖아"
"난 그렇게는 안 써. 그렇게 쓰면 글의 완성도는 높을지 몰라도 쓰는 재미가 없잖아.
난 누워 딩굴면서 휴대폰으로 쓰거든. 시간 때우려고 말이야"
"그렇구나. 노트북은 무겁고 커서, 누워서 들고 쓸 수는 없겠지"
이어서 유령들은 아이샤와 파티마 자매의 질문에 대해, 2025년에 가장 혁신적이며 빵빵하고 음질 좋은 가성비 스피커가 무엇일까 쑥덕거렸다.
놀랍게도 그것은 미국에서 399달러에, 한국에서는 52만 원에 팔리고 있는 보스 사운드링크 블루투스 스피커 포터블 맥스였다.
그 이유는,
1. 음질은 기본, 야외에서도 베이스 빵빵 터진다. 출력에서는 하나당 무려 50w! 동급 당연 최고이다. 2개의 미드레인지 드라이버, 1개의 트위터, 2개의 패시브 라디에이터를 탑재한다.
2. 두 개를 연결하여 100w 스테레오 모드로 음악감상과, 파티모드로 선택해 춤추며 즐길 수 있다.
3. IP67 방수 및 방진 기능
4. 작고 귀엽다. 실내는 물론 야외 휴대성이 뛰어나다.
5. 한 번 충전으로 20시간 재생 가능.
6. 내구성이 뛰어나다.
7. 가격도 애플 깡패보다 양심적이다. 즉 애플은 사운드가의 명가는커녕 사운드가의 양아치라는 것이었다.
"에구! 불쌍한 애플, 뻔하다 뻔해! 노키아 짝나게 생겼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만리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마르코가 이처럼 단정해 말했다.
"이제 라비의 이야기나 듣자"
"그럴까?"
드디어 전용 랙에 오디오 세트가 앉혀졌다.
설치 기사들이 돌아가자, 공주부부가 아들 전등남에게 말했다.
화상의 흉터로 묘하게 일그러진 아빠와는 달리 눈웃음 가득한 공주의 표정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아가, 늦었지만 이거 작년 입학선물로 생각하고 한번 들어봐" 사실 할머니와 엄마는 지금까지도 큰아들을 아가라고 부르고 있었다
"와아 이건 아니다! 내가 원했던 건 좀 싼 중고라고 했잖아요. 엄마! 당장 물려요!"
"어떻게 물려! 그냥 들어. 아빠가 큰맘 먹고 사주신 건데"
엄마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사전에 서로 어떤 상의가 있었다는 듯이 남편을 바라보고 빙긋이 미소 지었다.
"우영아. 엄마 말씀대로 해. 아빠 서운하게 하지 마라"라고 하며 아빠가 종지부를 찍었다.
선물 받은 오디오 세트는 실로 놀라웠다.
세상에 이런 소리들도 존재하다니, 음악은 천재에게 또 하나의, 천상의 특이한 세계를 열어주었다.
2001년 미국의 저명한 오디오 전문지인 스테레오파일에서 "올해의 제품들"로 선정된 수상작인,
파워앰프 클라쎄 CAM 350 모노블록 파워앰프, 한쪽 당 700W 총 1,400W에,
프리앰프라 VK-40이 스피커를 섬세하게 통제하는 놀라운 기능성을 이 천재는 알아챌 수 있었다.
스피커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아카펠라 바이올론 2001,
씨디나 슈퍼오디오 씨디를 재생하는 어큐페이즈 DP-100, DC-101 SACD(슈퍼오디오씨디) 트랜스포트 / 프로세서의 조합은 천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엄마, 이건 내가 원하던 오디오 세트가 아니잖아. 난 그냥 싼 중고 아니면, 인켈이나 아남 테크닉스 정도면 만족스러운데. 학생 신분에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아"
전등남은 돈은 아빠가 내고, 엄마가 골랐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오디오 세트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한창 선전하고 있는 최고급 3.0 V6 그랜저 XG 보다도 더 비싸다는 말인가.
갑자기 시장에서 고생하는 부모님의 은혜가 산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축을 사달라고 졸랐던 것이 못내 후회가 되었다.
"아가, 넌 아빠 마음을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거야. 절대로 아빠를 서운하게 하면 안 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엄마가 이렇게까지 정색해서 말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숙이고 엄마 아빠에게 감사를 전했다.
"알았어 엄마. 정말 고마워요 아빠"
설득하는 엄마를 보며, 전등남은 엄마처럼 아름답고, 인자하고, 현명한 여자하고 결혼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전등남의 이 같은 바람은 훗날 그로 하여금, 얼굴은 절색인데, 가슴은 염치없고, 엉덩이는 뻔뻔스러운 천하의 요녀를 만나게 되는 이상한 연분을 안겨주었다.
전등남은 엄마, 아빠, 할머니가 정육점에 가거나, 쌍둥이들이 죄다 학교에 간 오전 시간에 주로 음악을 듣곤 했다.
수강 학과는 오후겠다 창문을 닫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소리가 다른 세계로 인도할 때면 그의 영혼도 따라 들어갔다.
귓바퀴에 도달하는 청량하고 낭랑한 소리들은 그를 혼미하게 하였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온몸의 솜털까지도 일어서서 다른 세상에서 온 소리들을 영접하였다.
음악은 이 천재가 물리학이나 천문학을 하는 데 있어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그 예로 빛은 입자이며 동시에 파장이라 한 난해한 정의에 대해서 음악은 잘 설명해 주었다.
이 괴물 오디오의 소리는 볼륨을 크게 올리면 파동처럼 퍼져 나갔고, 줄이면 입자처럼 미세하게 톡톡 다가왔던 것이다.
하루는 엄마가 여고생 때 즐겨 들었던 산타에스메란다의 "Don’t be misunderstood 오해하지 마세요"의 전반부 북이며, 짝짝거리는 캐스터너츠며, 부츠를 신고 탭댄스를 추는 무희의 경쾌한 손뼉소리를 듣고 있을 때였다.
"엄마! 얘들아 이 타악기 소리 좀 들어 봐. 토성이 고막을 막 두드리는 것 같아. 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싸라기 눈 같은 알갱이가 유리창에 떨어지는 소리같기도 하고"
"오빠, 꼭 작은 북소리 같아. 그런데 무슨 토성이 여기서 왜 나와?" 막내 쌍둥이들이 쫑알거렸다.
"우리 아기들, 그건 작은 북이 아니고 캐스터너츠 소리야. 마치 알갱이들이 떨어지는 소리 같구나. 마루에 톡톡 떨어지는 쌀알 소리처럼 들려.
그리고 유리창이 흔들리게 크게 틀면, 큰 북소리가 마치 파도처럼 둥! 귓전에 떨어지면서 밀려오는 것 같아."
"역시 우리 엄마는 역시 문학소녀야! 표현력 한번 기막히네. 백락천이 울고 가겠다!"
"엄마 최고야! 엄마, 클럽 노래도 끝내준대! 대학 다닐 때, 클럽 가봤어?"
오빠의 엄마 칭찬에, 막내들도 쌍둥이 큰언니들의 클럽에 대한 대화를 귀동냥하고선 마치 클럽에 가본 양 물었다.
"엄만 없어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너네들이 막 태어나서 정신없었어. 더구나 친구들이 가자고 꾀여도 아빠가 안 가는데 내가 그런 델 왜 가니?"
"우리 엄만 클럽에는 안 가셔도, 플라멩코는 잘 추셔. 나 어릴 때 엄마가 한머니와 아빠 앞에서, 트라헤 데 플라멩카 전통의상 입고 이 곡에 맞추어 춤추시던 거 기억나.
말괄량이 삐삐 같은 양갈래 땋기 머리에 녹색 스카프를 하고, 무도복 위에 흰 앞치마를 두르고 춤추셨어.
우리 엄만 천사야!"
할머니와 엄마 공주는 시장에서 고된 장사를 하면서도 손이며 얼굴이 천사처럼 고왔다. 얼굴은 비록 흉하지만 손님을 등지고 고기를 썰고, 포장하고, 정리하고, 청소하는 아빠 때문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다.
"보여줘! 보여달란 말이야 엄마!"
"우리도 보고 싶어 딱 한 번만! 응?"
막내 쌍둥이 자매가 공주의 양팔에 엉겨 붙어 치근대었다.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몰골 흉측한 아빠는 흡족한 나머지, 얼굴을 더욱더 일그러뜨렸다.
이 가정의 행복한 웃음소리는 빛처럼 한 묶음 광자의 에너지로 파동이 되고 입자가 되어 시장통 집집마다 울려 퍼졌다.
그 오디오 세트는 실은 공주부부가 천재 아들에게 우주의 소리를 들려주려고, 고르고 고른 것이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실은 여러 소리들은 반향이 되어 천재의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던 영감을 깨웠다.
전등남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그 이듬해 2003년 2월, 그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휴학을 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로부터 2년 동안, 그는 가로등 불빛이 없는, 오염되지 않은 전방의 밤하늘을 원 없이 헤고, 늠름한 모습으로 2005년 2월, 육군 병장 만기제대를 하였다.
전등남은 제대 후 잠시 얼마 동안, 일요일 오전 시간에 할머니 엄마 아빠의 가게일을 도우려고 정육점에서 일을 하였다.
전등남의 천재성을 익히 알고 있는 엄마의 반대에도, 아빠와 할머니는 그에게 잠깐동안의 사회생활을 허락하였다.
2005년 3월 어느 일요일 아침 시간, 할머니는 잠깐 집에 다니러 가시고, 엄마, 아빠가 한우 암소 1++ 한 마리를 꺼내러 숙성 창고에 가서, 전등남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키가 족히 175cm는 넘어 보이는 늘씬한 교복차림의 여학생이 가게에 들어섰다. 청순한 용모에, 호리호리한 여학생이었다. 큰 키의 조숙한 글래머였다.
바로 미래의 아내 앵두였다.
앵두는 전등남을 빤히 쳐다보면서, "구워 먹기 좋은 부위로 쇠고기 3인분 정도만 주세요"라고 말했다. 감미롭고, 신비스러움이 통통 튀는 목소리였다.
전등남은 손잡이가 달린 동그란 숫돌에 칼을 두어 번 쓱싹 문질러 비벼 간 후, 안심과 우설을 뚝 떼, 신문지에 싸서 앵두에게 건넸다. 물론 우설은 공짜였다.
쇠고기를 건네받으며, 그녀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듯이 말했다.
"구리 할아버지 댁에 가다가 신천역에서 내렸어요. 할아버지께서 구이를 좋아하시니까 좀 사가려고요"
"아 네 그러세요?"하고 전등남도 무엇이 좋은지 입이 찢어져, 그녀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혹시 우영 오빠? 난 채앵, 고운 앵두야"
전등남은 생면부지의 처음 본 앵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그렇다. 저 간판! 우영정육점!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못 잊어 첫아들 이름을 우영상사에서 따왔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본 여우가 시험삼아 그의 이름을 불러 본 것이 아니었던가. 오늘의 깜찍한 조우가 그가 이 요녀의 남첩이 되는 시발점이었다.
이후로, 앵두는 가끔 일요일 오전이면, 짧은 교복치마에, 양갈래 땋기 머리로 다가왔다.
삐삐머리를 하고서, 립스틱 살짝 바르고, 가슴과 엉덩이의 볼륨을 강조한 투피스 차림으로, 이 정육점을 찾곤 하였다.
전등남은 이제 삐삐머리를 한 미래의 아내, 고운 앵두, 채앵의 남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