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860 운명의 여신님께
칼 오르프 '오 운명의 여신이여'
가을 호수로 가는 버스를 타고
금빛 가을을 만나러 간다는
친구의 톡문자를 읽으며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문득 생각합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고
거침없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래도 곁에 머무르며
여전히 함께 친구인 것도
운명일까요
친구와의 만남도
운명의 나무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이거나
하나의 잎이라는 생각이 드는
맑은 가을날입니다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니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며
흔들리기도 하고
마구 헤매기도 하다가
바람 탓으로 돌린다 해도
뭐~ 괜찮을 것 같고
배경음악이 필요하다면
베토벤의 '운명'도 물론 좋으나
칼 오르프의 '오 운명의 여신이여'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존 부어맨 감독의 '엑스칼리버'
영화에서 들을 수 있어요
아서왕의 기사단이
성을 빠져나와 꽃잎 흩날리는 숲 속을
마구 질주할 때 흐르는 음악이
'O Fortuna(오 운명의 여신이여)'
아서왕의 처음 전투와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웅장하고 비장하고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인데요
'오 운명의 여신이여
늘 변하는 달님과 같이
차올랐다가 기울어가는
그대 운명이여
얄궂은 운명의 여신은
때로는 가혹하게
때로는 친절하게 우리를 대하죠
우리의 욕망을 희롱하고
얼음과도 같이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권력과 빈곤을 주기도 해요'
칼 오르프는
독일의 작곡가이며 교육자로
오르프 교수법을 만들었다고 해요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라는
그의 작품은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보이렌 수도원에서 발견된
중세 유랑시인들이 라틴어로 적은
시가집 '보이렌 수도원의 노래'
250곡 중 24곡을 골라 만든
극음악이랍니다
1부 봄의 노래
2부 선술집의 장면
3부 사랑의 이야기
3부작 형식의 칸타타(성악곡)인데요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이
바로 '오 운명의 여신이여'랍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게임이나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쓰여
귀에 익은 곡으로
영화 '엑스칼리버'의 첫 장면에서
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의지를
제대로 보여준다고 해요
'오 운명의 여신이여'를 들으며
한 송이 애잔한 가을꽃 되어
바람결 따라 이리저리
잠시 흩날려 봅니다
나부끼다 문득 돌아보면
그리운 이들이 소리도 없이
손 흔들며 반갑게 웃어줄 테니
때로 가혹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친절한 운명의 여신으로 모시고 싶은
눈부신 가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