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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Jun 06. 2021

무제

나이가 들면 발생하는 각종 성인병을 줄여보려고 오늘도 열심히 걷는다. 걷다가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오십견이라는 어깨 통증이 없어졌으면 좋겠고, 평생 먹어야 한다는 콜레스테롤 약도 그만 먹고 싶다. 안경을 안 쓴 눈을 갖고 싶고, 주변의 소리도 인상을 쓰지 않고 듣고 싶다. 만약 나의 몸이 지금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준다면,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흔히 사람이 여러 가지 만성병에 시달리다 보면, 나중에 몸이 건강해지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완벽하게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은 몸은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람에게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은 상태가 주어진다면, 아플 때 보다 좀 더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 또한 내가 나에게 허가된 기간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증명서가 주어진다면, 나는 더 온유한 사람으로 바뀔까? 지금보다 몸이 더욱 건강해지거나, 수명이 늘어난다고 해도 나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도대체 건강이나 장수가 무슨 부가가치가 있는 것일까? 고장난 기계는 고쳐지면 이전보다 훨씬 더 부가가치가 높은 역할을 한다. 가끔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면, "이 병만 고쳐 주시면 앞으로 더욱 착하게 살겠습니다"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다. 어쩌면 순서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지금 이 병이 없어지거나 더 오래 살 수 있다면 착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병이 있어도 우선 착하게 살다 보면 하늘이 동해서 병을 낫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옳은지의 문제이다. 왜 인간은 자신이 아프게 되면 그동안 선량하게 살지 않아서 이런 병이 생겼다고 믿는 것일까? 인간의 질병과 착하게 산다는 것이 서로 상관이 없다면, 왜 수많은 문학작품은 착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장면을 다룰까? 인간의 오감으로 느끼는 논리적인 정보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다. 오감을 뛰어넘는 신성의 속성인 사랑과 자비를 따르는 삶이 건강과 행복을 준다는 느낌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은 것 같다. 만약 나의 질환이 나아져도 내가 더욱 착한 사람이 될 자신이 없다면, 자신의 질병만 치유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이기적이고 자연훼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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