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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책임도 아닌
【다섯째 아이】

by 글로

도리스 레싱/ 민음사/ 1999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호텔처럼 큰 집을 산다. 데이비드 아버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때때마다 사람들이 몰려와 파티를 열고 자기 집처럼 편안해하며 오래 머물다 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그들의 바램대로 하나 둘 태어났으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은 흘러간다.


터울을 크게 두지 않고 계속 태어나는 아이들, 축복과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친정엄마 도로시의 도움을 받지만 헤리엇은 지쳐간다. 다섯째 아이는 다르다.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냥 있으면 고통을 느낄만큼 태동이 거칠다. 임산부임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잊으려 헤리엇은 빨리 걷고 때론 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녀를 수상하게 여긴다.


태어난 아이는 크게 울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사랑스러운 아이들과는 다르게 괴성을 지른다. 웃지도 않고 웅크리고 노려보기만 한다. 타인과의 소통이 어렵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방식도 사랑스럽지 않다. 특별히 모자라보이는 부분은 없지만 표현방식이 거칠고 폭력적이다. 집에 있는 작은 강아지와 고양이를 죽인다. 공포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넷째 아이 폴은 다섯째 아이 동생, 벤을 멀리한다.


벤이 나타나면 흥겹던 분위기가 깨지고 모두들 등을 돌린다. 데이비드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다. 오로지 헤리엇만이 자신의 분신인양 벤에게 갖은 시도를 해가며 소통하려 애쓴다. 벤 한 명 때문에 집안의 분위기는 얼어가고 그들을 찾던 사람들도 떠나간다. 시설에 보내야한다는 주변의 의견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벤이 떠난 후 집안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 듯 하지만 헤리엇의 마음은 편치 않다. 어느 비 오는 날 헤리엇은 시설을 찾아간다. 돌본 흔적이 없는 버려진 자들의 숙소인 듯한 곳에 도착한다. 아들을 겨우 찾아낸 헤리엇은 할 말을 잃는다. 약에 취해 의식 없이 널브러져 있는 벤. 마음속 윤리의식과 몸속 모성애가 소리친다. 내가 집에 벤을 데려갈거라고. 아주 긴 시간 주사를 놓아가며 벤을 데리고 집에 온다.


벤은 엄마를 기억하는지, 집에 대한 추억이 생각나는지 알 수 없다.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겨우겨우 안정을 되찾는다. 정원을 관리하는 존을 만나 벤은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헤리엇은 존에게 벤을 부탁한다. 하루 종일, 어떨 때는 며칠씩 벤을 데리고 다닌다.


존이 어느날 직장을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나고 다시 버려지는 느낌을 받는 벤. 거칠어지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시설에 보낼 거라는 위협 앞에 조용해진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자신의 표현방식과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 교류한다. 집에 몰려와 난장판을 만들고 엉망으로 행동하고 막말을 하지만 헤리엇은 그들을 잠잠히 지켜본다.


뉴스에는 강도들과 강간범들과 온갖 추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이 나오고 그들 곁에 있는 벤의 얼굴이 잡히기도 한다. 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원시부족의 피가 진화되지 못하고 떠돌다 헤리엇과 데이비드에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라는 작가의 생각은 설득력이 있는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흐르고 진화되어 예전의 인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들끼리 웃고 소통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정한 눈빛을 교환하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공감하고 슬퍼하는 것 말이다.




우리와 다른 이가 왜 생겨났는가? 다수라고 해서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다른 행성에 벤과 같은 이가 다수 있다면 기준이 흔들릴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다수가 평범한 정상인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 기준으로 벤이 이상하다는 것일까? 사회에 해악을 입히기 때문에 멀리하는 것일 것이다. 기본적인 사회화가 서툴고 타인과 사물을 해치는 자이기에 격리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가족이 그렇다고 해도 나머지 다수를 위해 벤은 따로 생활해야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으며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정상인이 피해자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않은 벤의 입장은 어떨까? 운명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벤은 억울하지 않을까? 선천적으로 장애를 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할 일이다. 그들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것이 아닐까? 끌어안기보다는 배제하고 격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벤은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를 대변한다. 이 존재가 타자의 삶 속으로 들어와 생활할 수 있도록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도와야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도 언제든 평범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다. 사고를 당한다든지, 뜻하지 않게 정신적인 질병이 생긴다든지 치매에 걸릴 수 있다. 평범이라는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는 자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는 그 사회가 얼마나 전체 인간들을 포용하고 끌어안는지 보여준다.


껄끄러운 대상을 배제한 채 추구하는 편안한 행복은 마음 어디선가 윤리의식에 대한 종을 계속 울려댈 것이다. 이 행복은 반쪽자리 아닌가? 이 행복은 진정한 행복인가? 내가 격리시킨 자는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할까? 계속 생각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벤과 같은 자로 인해 무너진 다른 네 명의 아이들과 부부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을까? 우울한 분위기와 폭력적인 냄새로 얼룩진 집안에서 계속 양육되는 아이들의 정신 건강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책은 우리에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황을 가정한다. 구체적으로 마치 벤이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준다. 그리고 고민하게 한다. 어떻게 할래? 무엇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까?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게 한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벤을 끌어안고 희생하며 함께 있어야할까? 벤을 버리고 나머지 식구들끼리 행복하게 사는 것이 좋을까? 질문은 시작되고 고민은 맴돈다. 열린 결말. 생각이 어떤 결론에 가 닿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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