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수분을 모두 뺏기고 뭉크러진 과일 하나. 그 하나에서 뻗어 나간 이야기가 숨통을 조여온다. 들어보지도 못한, 아니 내가 아는 의미의 일과는 다른 일을 하는 노부인, 조각.
어린 시절부터 기구한 인생의 여정을 걸어온 그녀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자아가 생기기 전의 세월은 부모나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미 그 길이 익숙하여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다른 집에 보내져 식모살이를 하고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려 쫓겨난다. 거리를 헤매던 조각을 받아준 류와 조. 방역업은 쥐나 더러운 것들을 옮기는 벌레등을 박멸하는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 방역업은 사람을 제거하는 일이다. 특징은 소리 소문, 냄새 없이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각은 해외에 머물다 온다. 하얀 눈에 덮이듯 모든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사라진다.
조각은 류를 마음에 품는다. 이제 노인이 되어 7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아직 사랑을 갈구한다. 방역업체를 돕는 장박사의 월급닥터 강박사를 다시 바라본다. 워낙 젊었을때부터 일을 하다보니 자신이 처리한 사람의 아들이 성장해 업계에 뛰어들어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처지가 된다. 어릴 때 바라본 조각의 뒷모습을 기억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조각이 산산조각이 되기를 바란다. 알약을 먹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정성스럽게 가루를 내어 먹여주던 여자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리라고 꿈에나 생각했을까?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잉태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제목이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일까? 대접을 받으려면 원하는 대로 내가 먼저 행동해야 하는데 인간의 인지와 행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풀기 힘든 타래가 얽혀있듯이 인간관계와 이해관계는 꼬여있다. 제거하고자 하는 자는 결국 같은 취급을 당하기 마련이다.
밥 먹듯 사람을 처리하는 일을 하지만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이 혹시 오랜 시간 방치돼 굶어 죽을까봐 문을 조금 열어놓는다. 잠복 중 거리에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의 쏟아진 종이박스를 줍느라 정작 자신의 일을 망쳐버린다. 조각은 이런 사람이다.
강박사의 딸을 납치해 자신을 협박중인 적의 소굴에 혼자의 몸으로 뛰어든다. 강박사가 무슨 상관이며 아이는 자신의 딸도 아닌데 목숨을 건다. 마지막 부분의 네일샵이야기는 충격적이다. 결국 팔을 잃었구나. 작가의 상상력에 한번 더 놀라며 깊은 숨을 쉰다.
냉장고 속 썩어가는 과일 하나는 작가에게 그저 트리거의 역할을 했으리라. 쉽게 죽이고 쉽게 살해당하는 현대사회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내 마음에 가시로 보이면 죽여서라도 없애고 싶은 극단의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던 걸까?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인과응보의 세상 이치를 일깨워주고 싶었던 걸까?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그 어디쯤에서 나를 헤매게 했다. 현실이 아니라고 도리질을 하기에는 어디선가 본 듯 하다. 우리가 먹고 즐기고 평화를 외치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고 어디선가 고문을 당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누가 옳은지 모르는 채 자기의 감정이 편하도록 세상을 움직이려는 자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극도록 싫으면 남의 목숨줄도 돈으로 매수하는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누구를 저 세상에 보낼 수 없다. 하물며 보상으로 돈을 받고 남의 명을 맘대로 쥐고 흔드는 방역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도덕과 윤리와 인간성과 최소한의 양심을 죽이고 없애고 말살하는 것이다. 그도 거울을 보겠지? 자신도 언젠가 등에 칼이 꽂힐지 모르는 불안감과 초조함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야기로는 긴장감이 최고조지만 현실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만 모아놓은 것 같아 읽는동안 기분이 상쾌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각이 조각이 되기까지의 한 인간의 삶으로는 안타까운 면이 있다. 누구든 환경에 조종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지기는 쉽지 않다. 나이 들며 점점 더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대답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고 받아들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듣다 보니 그렇게 되었나 보다.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으니 하물며 남들의 역사와 생각을 어찌 감히 말하라 할 수 있을까?
언제나 삶은 아슬아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과관계가 얽혀있겠지. 그 어느 줄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