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薔薇(のばら)
들장미(野薔薇)란 일본 동화가 있다.
서로 적국인 경계에 초소가 둘 있었다. 한쪽은 늙은 병사였고 한쪽은 젊은 병사가 근무했다. 둘은 처음엔 서먹서먹했으나 차츰 친해졌다. 얘기를 나누고 밥도 같이 먹었다. 어느 날 젊은 병사의 나라에서 전쟁이 터졌다. 젊은 병사는 노병에게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노병은 걱정하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해가 바뀌고 다음 해가 바뀌어도 젊은 병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늙은 병사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그의 물기 어린 눈에 들장미가 보였다. 붉은 장미는 까마득한 벌판을 배경으로 붉게 피어 있었다.
별다른 서사가 없는 내용이지만 울림을 주는 얘기다.
국가는 서로를 적대시하여 전쟁을 일으키지만 개인인 인간 존재는 그것과 다르다. 국가에 속한 개인이라도 상황에 따라 총을 겨눌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처한 허허벌판의 초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존재한다. 제도와 위계가 가르는 인간 상황은 위태로운 관계다. 만약 애국심을 발휘하여 한 사람이 상대에게 적개심을 보였다면 두 사람의 우정은 생겨나지 않았을 거다. 우리는 거의 맹목적으로 진영의 논리에 파묻힌다. 일체의 외피를 벗긴 자연 상태로의 인간 상황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는다. 진영 논리는 이분법적으로 작동해 우리 편의 이익을 편취하는 데 혈안이 된다. 상대의 약점과 결점을 물어뜯어 질식 상태까지 몰아가야 살아남는 논리다.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착종된 목적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약에 취한 듯 이성은 마비된다. 내로남불은 당연하고 상대의 발뒤꿈치가 이쁘다고 헐뜯는 격이다.
나라의 국격이 뭐가 중요한가.
남에게 비치는 체면을 강조하면 스스로의 허물조차 감추게 된다. 분단된 현실과 가난을 통과한 선진국의 형편에서 제일 낙후한 부면이 정치권이다. 일국의 지도자로 나서겠다는 이의 수준이 천박하고 모자라서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그의 노동관, 인권 의식,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접싯물인 담에야 기대할 것도 밀어줄 무엇도 없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건 그런 이를 광적으로 맹신하는 무리의 의식이다. 어쩌자고 저들은 마비된 정신과 두 눈 멀쩡히 뜨고도 보이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는가. 무지한 자가 거리를 활개 치며 설치면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 미래는 고사하고 반목과 분열로 사회 각층은 서서히 공멸할 것이 뻔하다. 누구의 말처럼 국가가 뭘 해주길 바라기보다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라는 얘기는 지난 가치가 되었다. 그만큼 국가는 통제와 감시의 거대 권력이 되었다. 그 사람을 보려면 그가 살아온 이력을 보라고 했다. 내 상처를 어루만지고 민중의 눈물을 씻어줄 후보를 택하는 게 낫다. 자신만의 공정과 상식을 외치는 이는 위태롭다. 그는 공정의 잣대를 무시로 늘렸다 줄였다 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슬러 근대사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병징을 모아놓은 것 같은 정당은 해체되어 마땅하다. 어쩌다가 이리된 건 아니다. 정조가 승하하고 귀양에서 돌아온 다산 선생이 세상을 뜨고 나서 조선 팔도는 양반층의 부패와 관료배의 탐학으로 전국에서 민란으로 들끓었다. 갓난아기에게 조차 군포를 매기는 독한 현실에 자신의 성기를 자른 세태는 성난 민중의 반역의 횃불로 활활 타올랐다. 외세의 침략과 무너진 왕조의 나약한 권위는 의병과 독립 투쟁을 거치는 동안 민중은 굶어 죽고 맞아 죽었다. 기회주의자는 언제나 틈을 타고 생기는 법이다. 민족과 자유의 가치를 배반한 사회 지도층, 문인, 일제의 관료들은 민중의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일신의 영달에 골몰했다. 그 후손의 후손들, 후예의 후예들, 자식의 자식은 전쟁과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에도 대대로 잘 먹고 잘살았다. 잘 배운 그들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 신념을 갈아타며 개돼지 같은 민중을 짓밟고 오늘에 이르렀다.
신념이란 무엇인가. 그들의 신념과 공동체의 가치와 정의는 고스란히 그들만의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제는 권력과 욕망이다. 돈이면 처녀 불알도 사는 신자유는 사회를 도둑의 소굴로 바꿔놓았으니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질투하고 통제하는 불신의 시대에 득세한 무리는 역사로부터 배워 온 배반의 무리다. 국가도 애국도 공동체도 전면에 내세운 가치는 언제든 바꿔 달 수 있는 간판에 불과하고 목표는 자자손손 호의호식하고 권력을 틀어쥐는 것뿐이다. 정치 노선과 정치적 득실 앞에서 판단을 중지하는 다수가 뭉쳐서 권력을 형성할 때 세상은 위험해진다. 자기 성찰은 사라지고 정치적 유불리가 옳고 그름을 대체하며, 자신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을 배제하고 억압한 채 오직 선악의 이분법만이 자리 잡는다. 누가 이런 오사리 잡년 놈에게 지지를 보내는가. 제 살 뜯어먹는 짐승에게 표를 던지는 우매한 민중은 역사에서도 과거에서도 배운 게 없다. 분노하지 못하는 민중은 노예의 비굴한 삶을 예약한 가는 신음만 뱉는 가을 매미다.
우리는 해방 이후 민주공화국 체제에서 수없이 대통령을 갈아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반민주 패거리에 의해 호도된 여론으로 지도자를 선출해 재임 기간 내내 고통을 받았다. 양민 학살과 고문과 투옥으로 민중은 고통으로 신음했다. 더러는 투쟁으로 정부를 뒤엎기도 하고 다시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지만 정치꾼의 농간으로 분열과 반목은 반복되었다. 최근 들어 언론을 장악한 우파 꼴통들은 가짜 뉴스를 만들어 생각 없는 민중을 자신들의 선봉대로 만들어버렸다. 역사에서 전직 대통령이 둘이나 감방에 들어간 예가 있는가. 강토는 둘로 쪼개져 대립을 단단히 굳힌다. 이를 빌미로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세력은 반민족 반민주 반생명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역할이 중요한 국면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재일 작가 서경식은 '인류사의 현 단계에서 우리는 아직 국가와 인연을 끊을 수 있을 법하지 않다. 국가는 당분간 우리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전횡과 폭주를 막고, 인간 사회를 보다 나은 것으로 바꾸어가려면, 개개인의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고 그 다양한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연대하며 국가를 견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발적 연대'는 깨어 있는 시민의 역할이다. 저들이 sns로 가짜 뉴스를 퍼뜨리면 연대하는 시민은 sns로 진실에 근거한 뉴스를 실어 나르자. 사특한 악마성을 공동체에서 몰아내자. 자신의 존엄과 모두의 존엄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