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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 파트너 이석재 Aug 21. 2020

사랑은 도전하게도 한다

마음이 방황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편한 제안을 하면서
은근히 연인의 마음을 떠 보는 때가 있다.


짝이 불편한 제안을 하면서 은근히 나의 마음을 떠 보는 때가 있다. 결혼을 한 후 짝은 하나 둘 나의 취약한 부분을 알기 시작했다. 어려운 부탁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랑스럽게 말하면 성공률이 높다는 것이다. 약속한 시간에 늦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 표현은 맞지 않는다. 그는 약속에 늦은 경우도 드물지만, 늦는 경우가 있다면 늘 미안해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추억은 역시 입덧과 관련이 있다. 어느 날 늦은 저녁에 짝이 청진동 해장국을 먹고 싶다는 것이다. 늦은 시각에 말이다. 지하철이 개통되기 전에 둔촌동에서 청진동은 대중교통으로 간다면 먼 길이다. 초보 운전자이지만, 결국 차를 끌고 갔다. 나는 이 과제가 앞으로의 삶에서 회자될 수 있는 중요한 과제임을 잘 알고 있다. 수컷으로 태어났는데 이 과제를 풀지 않으려 한다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짝의 마음을 얻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밀입국자가 꿈틀 거린다


  어느 날 나는 짝에게 밀입국자를 소개하기로 다짐했다. 2020년 코로나 19가 한창일 때 떨리는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여러 번을 망설였다. 그냥 무덤으로 데리고 갈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밀입국자가 고개를 드는 듯했다. 이전보다 더 실체가 객관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눈에 보일 가능성도 커졌다. 그러나 나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내 눈 빛은 불안하게 그 존재를 숨기고 있음을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천만다행이다. 짝은 아직 모른다.


주저하는 마음, 그 아픔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


  짝에게 말로 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내게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부친을 잃었다. 다정다감한 추억들이 많았지만, 모두 7살에서 멈추었다. 나는 가정을 꾸리면서 아이들이 장성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이별을 아픈 추억으로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마음대로 되기나 할 주제인가? 그러나 세상의 가장이라면 아마 이와 같은 소망과 다짐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입학식 날 학교를 가는 데 혼자 가야 했다. 그래서 미리 학교 가는 길을 먼저 가 보았다. 길을 외워두기 위함이다. 나의 첫 등교 길은 어린 마음에 슬픈 한 장면으로 각인되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부모의 손을 잡고 오는 데 나는 그 관경을 바라보면서 뒤따라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그들과 같은 모습의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떤 날은  운명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짝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이제 밀입국자를 소개할 때라고 다짐한 날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목에 막혀 겉으로 나오질 못했다. 짝은 몇 차례, "왜?"라고 묻는다. 이 순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때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도 맞는 것일까? 나는 웃으며 그 날을 그렇게 넘겼다. 내가 그리워하는 부친은 치과를 치료받다가 얼마 후 소천하셨다. 


  지금의 나이에 내 치아가 모두 튼튼한 것은 부친의 뒤를 밟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밀입국자는 바로 치아 밑, 턱 밑에 숨어 있다. 그곳에 안식처를 잡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은 바로 그곳에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짝에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에게는 놀라운 기쁨으로 가득 찬 짝에 대한 추억이 있다. 우리는 그 추억을 벨기에 브뤼셀 그랑플라스 먹자골목에서 만들었다. 맛나다는 홍합 등을 주문하고 와인을 한 잔 했다. 가족이 모두 있던 자리였다. 저녁의 노을이 처마 밑으로 떨어지며 넌지시 짝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이전에 보지 못한 행복에 젖은 짝의 옆모습을 보았다. 긴 세월을 함께 보냈지만, 여전히 짝에게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아름다움을 이역만리 이곳에서 꺼내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런데 밀입국자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 아름다움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슬픔을 줄 것인가?


사랑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냥 멈추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랑을 느낀다. 함께한 삶이 짝의 뒷모습에 있다고 생각한다. 짝이 화장을 마치고 일어섰을 때 나는 용기를 냈다. 


  "여기 좀 볼래?" 

  "뭔데?" 


  그렇게 밀입국자는 숨은 동거에서 사실적 동거로 신분을 드러냈다. 아내는 당혹해하지 않았다. 나는 짝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당혹함을 마음에 담고, 나를 위로하는 표정으로 대화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말이다. 짝은 동네 유명한 이비인후과를 찾아갈 것을 권했다. 그런데 여전히 동네 병원을 찾아가지 않았다. 코로나 19가 핑계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밀입국자와 직면하기를 주저했다. 두려움이 컸다.

  어느 날 짝이 외출을 했을 때 동네 병원을 찾았다. 적어도 혼자 많은 부분을 처리하고 싶었다. 이번 일로 짝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어려웠을 때 늘 위로하며 응원한 짝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여전히 동거 중이었을 것이다. 나는 동네 병원을 향하며 브뤼셀 저녁노을 빛에 빛나는 아름다움과 화장대에 앉은 뒷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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