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 파트너 이석재 Sep 05. 2020

당신을 안아 주어야 해

떠도는 마음에 답이 있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네 가지 삶의 과제


항암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큰 위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병과 관련된 단어들이다. 내가 병원에 입원과 통원 상담을 받으면서 완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생로병사가 삶이지만, 병과 가까이한다는 것은 실로 불편하다. 이제 생로병사의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삶을 살고 있다. 태어난 것은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삶의 네 가지 과제에서 세 가지를 풀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마지막 과제의 내용과 시기는 달라질 것이다.



사랑이 삶의 과제를 풀도록 도와준다
삶의 문제는 각자의 것. 그러나 문제의 힌트는 사랑으로부터 온다


  사람들은 삶의 한 방식으로 굵고 짧게 살 것인가 아니면 가늘고 길게 살 것인가를 말한다. 전자는 대의명분을 갖고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기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쓰일 수 있다. 의인, 충절, 살신 등과 같은 사회적 평판을 얻는 삶 말이다. 후자는 공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소시민의 삶을 사는 방식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면서 천수를 누리는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 내용이야 무엇이든 한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다는 요구를 강제할 수 없다.


  짝은 청춘일 때 도서실에 근무하는 동료의 소개로 만났다. 어느 날 도서실에서 자료를 찾아 대출을 하는 과정에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한 여성을 대출해 준다면, 이곳에 찾아와 도서 대출로 귀찮게 하지 않겠다. 단, 한번 대출하면 반납은 없다." 이 말이 씨가 되어 그는 친한 학과 동기를 내게 소개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와 결혼했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짝도 그렇기를 바랐다. 처음 소개를 받았을 때 크리스천이었지만 신앙심은 깊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판단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평가이다. 그러나 겉과 속은 다를 수 있다. 나중에야 알았다.


  짝은 신앙심이 돈독하다.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격랑이었다면,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데 짝의 신앙심이 한몫을 했다. 삶을 돌이켜 보면, 내 해석이 맞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어쩌면 신앙심을 키우는 데 내가 그 믿음을 필요로 하는 삶의 어려운 여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어린애 둘이 있는 가장이 해외 유학을 가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래도 짝은 내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생각을 실천하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속 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격은 때로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짝을 신뢰한다. 그 과정에서 심적인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바탕은 그의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으로부터 집까지 산책을 하기로 마음먹고 한참을 걸었다. 길도 지만, 코로나 등으로 산책을 하지 못해 체력이 달렸다. 2시간 30 정도 걸으니 집까지 1km 정도 남은 곳에 도착했다. 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야? 괜찮아?"

"지금 죽겠어. 길에 주저앉을 판이야."

"데리러 갈까?"

"그래 와주면 고맙지."


  나의 요청에 따라 버거킹이 있는 사거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참을 걷는  멀리 차가 보인다. 짝은 내가 있는 근처까지 와서 나를 태웠다. 그리고 당이 떨어졌을  있으니, 시원한 콜라를    오겠다고 한다. 목이 말랐던 차에  됐다고 생각했다. 사실 지금 상황은 콜라나 튀김 음식을 금해야 한다. 그런데 짝의 손에는 치킨 너깃과 시원한 콜라  잔이 들려 있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냉큼 받아 들고 목을 축이고 허기를 채웠다. 저녁 시간이 되어 외식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콩국수를 기가 막히게 하는 짝의 친구 분이 만들어  콩국수를 저녁으로 하기로 했다. 짝이 장을 보는 동안  안에서 쉬고 있었다. 잠시 후 짝은  아름 시장을 봐왔다. 차에 타자마자 나를 보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감사의 말 한마디


"내가 당신을 안아 주어야 해."


  이 한 마디는 그간 속으로 달래온 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감사로 표현한 말이다. 짝은 내가 병원에 가서 최종 검사 결과를 받기까지 초초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렸다. 비록 결과가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문자와 전화로 알려주었지만, 직접 만나서 소통하는 것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고 짝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전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서로 알고 있었지만, 아직 결과를 알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짝은 구역 식구들과 모여 소식을 기다렸다. 나의 소식에 모두 축하한다는 인사를 내게 전했다.


  부부라고 해도 어느 순간 각자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몸이 아픈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각종 시험을 보거나,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다른 중차대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부모라도 어찌할  없는 . 각자 삶의 난제에 직면했을  그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지지할 수는 있지만,  주인공의 대역일 수는 없다. 지켜보는 아픔이 당사자의 아픔보다    있다. 차라리 내가 아팠더라면이라고 말한다면, 지켜보는 아픔이  크다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부부라도 어찌할 수 없으니, 안아 주는 것으로 그 아픔을 공감하고 위안할 수 있다. 입원과 통원을 하는 동안 짝으로서 감정의 동요를 다스리고, 내게 평안을 주고자 아픔을 속으로 삭였을 것이다. 오늘 내가 감사한 것은 내 아픔을 지켜본 사람이 자신의 기다림과 아픔을 격하게 표현하지 않고 '안아 주어야 해'라고 완곡하게 말한데 있다.




작가의 이전글 검진 결과에 대한 기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