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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23. 2016

가을 동화

                                                                                               

아침에 일어나면 동쪽 하늘부터 살핀다. 오늘 아침의 하늘은 해가 올라오기 전부터 번쩍번쩍 빛이 났다. 세수하고 옷 갈아입는 사이에 햇살은 집에 들어차고 창문을 여니 바람까지 술렁술렁 들어와 집안 공기를 휘저어 놓았다.



오늘처럼 빛으로 가득한 아침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마음만 바쁘고 몸은 부산해서 일거리는 늘어나고 도무지 진전이라고는 없다. 빨래도 해야 하고, 냉장고 정리며 가을 옷 꺼내기도 해야 하고, 구석구석 먼지도 닦아내고 싶고, 이도 저도 몰라라 하고 집 밖으로 도망을 치고도 싶지만 생각이 많아질수록 하루가 짧아진다는 걸 이제는 아는 터라 고개 한 번 흔들면 대충 정리가 되는 내 마음속. 
책장에 내려앉은 햇살에 눈길을 주며 내려오다가 계단참의 그림자에 붙잡힌다. 계절마다 다른 그림자가 생기고 벽에 드리운 햇빛의 색이 다르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빛과 바람이 일렁이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마음도 두근두근이다.



어쩔 수 없다.
구경만 한다.
손 대면 끝이 없으므로 오늘은 그냥 놔두기로 한다.
거실 청소보다 더 급한 일들은 항상 있다.



토마토를 씻으면 보석 같다. 양파를 썰고 바질 이파리를 헹굴 때마다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다. 이걸 어쩌나 싶다. 



찬장 문을 열고 또 한 번 으악! 한다.
아마 얘네들은 내가 보지 않는 동안 무도회라도 했던 모양이다.
빛이 있으면 살림들은 빛이 난다. 



하늘은 파랗고
꽃은 핀다.



빨래도 설거지감도 그림이 되는 날.



언제부턴가 동화를 의심했었다. 주인공이 구박데기 소녀이건 구중궁궐의 공주이건 누군가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이야기. 그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의심도 하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긴 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동화는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였음을 알겠더라. 누구도 감히 동화 너머의 세상을 이야기할 수 없는 날들을, 아니 동화 같은 게 있었다는 걸 떠올리지도 못하는 세월을 오래 지내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공주와 왕자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란 문장은 '공주와 왕자는 오래오래 산 후에 그들이 행복했음을 알았습니다' 란 뜻이란걸. 아직도 햇살 한 조각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많은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지만 오늘같은 날은 감히 내가 참 괜찮게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 한창 싸움 중인 신혼의 아내들과 밤낮이 바뀐 아기 때문에 힘겨운 초보 엄마들, 아이들 학교 보내고 식구들 먹이고 입히느라 거울 볼 시간도 없는 젊은 아낙들은 힘내세요. 나중에 다 알게 된답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동화라고요. 물론 그 사이에 아주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지요. 주인공은 자신이고요. 우리 멋진 이야기를 한 번 만들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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