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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Oct 09. 2016

오즈 야스지로와 히라마쓰 요코

동경이야기, 어른의 맛

                                                                                                

며칠 동경에 다녀왔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이야기'에 야마다 요지의 '동경가족'의 몇몇 장면들이 겹쳐진 느낌이었습니다. 눈이 부셔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던 하늘과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햇살이 부서지는 작은 골목들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바라보았지요. 우리가 사는 이야기들은 별로 들여다볼 게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 아름다운 여주인공도 없고 영웅도 없는 영화, 그냥 우리의 며칠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는 건 충격이었어요. 남루하고 유치하고 그래서 들여다보기는커녕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하고 싶은 일상의 장면들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감독의 시선에 경외감을 느꼈던 오래전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꽤 여러번을 돌려 봤습니다. 볼수록 남루함과 유치함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이 보였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으나 결국 그건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었어요. 태풍이 지나갈 거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하늘은 쾌청하고 골목길은 빛나는 것, 그것과 같았습니다.



오늘을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하찮아 보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 정도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정성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든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최선을 다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은 따로 있을 수도 있겠다고. 이제부터 내가 욕심부릴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 말이지요.



작은 화면으로 바닷물이 도로를 덮치는 순간을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몇 년 전의 일본 대지진 때 하라주쿠 역에서 보았던 쓰나미 화면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 순간의 공포는 그동안 내 속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에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갔으니 괜찮다고, 참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그대로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습니다. 몸에서 뭐가 빠져나간 것처럼 나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몸은 분주했고 때가 되면 밥도 먹고 익숙한 찻집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앞에 두고 앉아있기도 했지만 생각은 오직 하나, 집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다리가 끊어지고 눈이 쏟아져 차바퀴가 헛돌던 순간들이 그리웠습니다. 함께 있고 싶었던 거지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동경이야기' 혹은 '동경가족'이 전하는 울림을 확실하게 이해했습니다. 언제 어디에 있건 내가 있는 곳은 지금, 여기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내게 지금, 여기는 바로 나의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히라마쓰 요코의 '어른의 맛'을 가지고 갔습니다. 식재료와 음식의 맛에 살아가는 멋을 더한 그녀의 글쓰기를 부러워합니다. 그중 '호사의 맛'이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밤중에 먹는 흔한 오차즈케일 뿐인데 굳이 와사비를 강판에 갈아 넣을 때, 백화점에서 누름초밥(보즈시)를 사려고 서서 '상'과 '특상'을 비교하다가 150엔 더 비싼 '특상'에 손을 뻗을 때, 대학 시절 찻집에서 탄산수를 주문하려다가 모처럼 왔으니 아이스크림도 추가할까 싶어 큰마음 먹고 크림소다를 주문할 때, 그럴 때가 참 호사스럽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달걀 다섯 개로 달걀말이를 하다가 일곱 개나 여덟 개로 크게 만들려고 하면 그 순간 달걀을 깨는 손이 주춤한다. 아주 가끔 쇼콜라 부티크에 들어가 하나에 250엔이나 하는 쇼콜라를 큰마음 먹고 사 버린 날이면, 그 호사스러운 기분이 하늘을 뚫고 올라갈 듯하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 바른 자세로 홍차를 끓이고 싶어진다.
                                                                        히라마쓰 요코, pp.20~21
                                                


호사스럽게 살고 싶어졌어요. 내게 호사는 조금 천천히, 느리게 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은 며칠에 한 번은 늦잠도 자고, 식사시간이 조금 늦어져도 동동거리지 않고, 마른 세탁물을 접으면서 설거지할 생각에 미리 지쳐버리지 않는 것, 싱크대 앞에서 차 마시는 버릇을 고치는 따위 시시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다가오지도 않은 일들을 걱정하고 지나가버린 시간을 후회하는 대신에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집중하는 것,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이런 거요. 
밖에서 사온 작은 만두 몇 개라도 얌전하게 접시에 옮겨 담기.
서랍에 넣어둔 매트를 꺼내서 접시 아래에 깔기.
아껴둔 종이를 꺼내서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
내일 아침에 일어날 걱정을 하지 말고 늦게까지 깨어있기.

우리 함께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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