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May 24. 2017

나의 사랑하는 생활 18 - 쓸모없음의 즐거움

                                                                                                                          

꽈리고추를 좋아한다. 꽈리고추가 수북하니 쌓여있는 걸 보면 절로 입이 벌어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넉넉하게 사서 봉지에 들고 오는 것 까지는 좋은데 집에 오면 머리가 지끈 아프다. 짭조름하게 볶은 반찬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만들기가 어디 쉬운가. 하루 이틀 고민하다가 꼭지 떼고 씻어 밀가루 묻혀 쪄내 무치는 게 고작이다.


꽈리고추 조림


조금 용기를 내서 멸치와 함께 볶아본다. 열에 두세 번은 실패고 대여섯 번은 그저 그렇다. 이번처럼 간도 맞고 식감도 좋게 볶아지는 건 한두 번에 불과하다.  꽈리고추를 작은 포크로 찔러 양념이 잘 베이도록 전처리를 하다가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꽈리고추의 맛이 아니라 그 풍부한 초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 건 어제, 아줌마들 여럿이 둘러앉은 상에서 반찬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면 놀란 눈에 활짝 열린 귀가 바빴던 건 오늘이다.


올리브절임


꽈리고추에 비하면 올리브를 사는 건 어렵다. 가격도 종류도 천차만별이라 올리브 통조림이나 병조림이 놓여 있는 곳에서 한참을 이걸 들었다 저걸 들었다 하다가 그냥 포기하는 날도 많다. 어렵게 사들고 오지만 먹어치우는 건 순식간이라 때로 허망하기도 하다. 어제 병에 남아있던 올리브들을 한데 모아서 올리브유와 마늘, 마른 고추와 타임, 월계수를 넣어 절임을 했다. 따져보면 꽈리고추나 올리브나 가격은 비슷하고 음식을 만들기에 그리 어려운 식재료도 아니다. 둘 다 집에 없으면 허전하고 지나다가 눈에 뜨이면 발길이 절로 멈춘다는 점이 닮았다. 쉽게 산 꽈리고추는 상에 어렵게 오르고 이것저것 따지고 망설이느라 힘겹게 집어 든 올리브는 쉽게 먹힌다. 이유, 알 수 없다.


모란


모란이 피면 꽃이 핀 가지를 뚝뚝 잘라서 달 항아리에 꽂아두고 싶었다. 아기들의 주먹만 한 꽃봉오리는 물론이요, 달처럼 희거나 새벽녘 하늘처럼 붉은 꽃들과 한껏 벌린 손바닥 같은 잎사귀들을 무심한 듯 잘라서 뭉텅이로 꽂아두는 게 봄 한 철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올해도 생각만으로 충분하였다.  해가 떠서 마당 위의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만드는 꽃 그림자, 바람이 불 때마다 치맛자락처럼 나부끼는 꽃잎, 모란이 핀 마당 한 귀퉁이를 지날 때마다 아우성치듯 분연히 일어나는 향기, 어두워진 마당에서 빛났던 등불 같은 꽃들이 내가 모란 가지들을 자르는 순간에 어디론가 달아나버릴 것만 같다.


은방울꽃


어여쁘기로 하면 은방울꽃도 모란 못지않고, 향기로 말하자면 은방울꽃이 한 수 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가위를 들고 모란 앞에서 얼어붙는 내가 은방울꽃을 이리도 잘 자르는 이유는 뭔가. 예뻐서 곁에 두고 싶다고 한다면 모란이 은방울꽃에 뒤질 것도 아니며 오늘 밤 하늘의 둥근 달만큼 환하고 커다란 꽃송이를 띄울 함지박도 마침 비어있거늘 고개만 돌리면 마주치는 모란은 비를 맞아 흐트러지는 것을 볼지언정 자를 수가 없으니 해마다 오월이면 인정머리 없이 싹둑 잘라 묶어 매달거나 유리컵에 꽂아 들고 다니는 은방울꽃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5월 마당


느닷없이 꽈리고추와 올리브, 모란이며 은방울꽃을 들먹이는 것은 오늘 혼자 다녀온 나들이 때문인데 결국 여행의 목적은 집을 그리워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떠올린 것, 같은 차를 타고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서로의 식성을 모르는 사이는 외로움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 올리브는 쉽고 꽈리고추는 어려운 이유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는 것, 모란과 은방울꽃을 비교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 그러니 그 차이를 탐구하는 것도 별무소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용을 알 수 없어 쓸모도 없는 것들이 종종 내가 기쁜 이유가 되어주니 알 수없는 노릇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사랑하는 생활 17 -은방울꽃과 제비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