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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02. 2020

여름 밤처럼 달콤하게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라즈베리와 블랙커런트는 신기해서 심었다. 책에서 글자나 사진으로만 보던 이국적인 식물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낯선 묘목들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마당이 딸린 집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그것들을 심을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블루베리도 심고 산딸기도 심었다. 앵두와 복분자도 해마다 몸집을 불려서 초여름이면 꽃이 진 자리에서 어김없이 작은 열매들을 볼 수 있었다. 붉고 검게 물드는 열매들을 찾는 일은 황홀한 즐거움이었으나 그건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며칠뿐이었다.

 

복분자, 산딸기, 앵두, 블랙커런트가 익어간다.


  해가 갈수록 나무들은 자라고 번져서 이제는 아무리 신기해서 탐이 나는 식물이라도 선뜻 들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좁은 땅에 촘촘히 고층건물을 짓듯 식물들을 겹쳐서 심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나무들이 자라면서 서로 간섭하는 일이 많아져서 감나무는 매화나무와 다투고 남천은 덩굴장미와 겨루는 모양새다. 산딸기가 으아리와 엉켜서 살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젊었을 때 성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던 부부가 나이 들며 서로 무심해져가는 모습과 닮았다. 지나온 계절만큼 수용과 포기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이다.


앵두와 블랙커런트


  봄이 지나 짙푸른 초록으로 마당이 옷을 갈아입으면 끊임없이 가위를 들고 자기주장이 강한 나뭇가지들을 정리해야 한다. 며칠이라도 한눈을 팔면 나간 집처럼 풀은 우묵장성이고 가지와 넝쿨들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어지럽다. 게다가 꽃이 지고 열매가 자라서 익기 시작하면 마당은 한결 비좁아진다. 물론 처음 몇 알은 여전히 귀하다. 작고 반짝이는 산딸기 몇 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감탄하다가 입안에 털어 넣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샐러드에 흩뿌려 멋을 내고 작은 종지에 담아 아침 식탁에 올려 보기도 하지만 곧 역부족이다. 냉장고에 보관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미룰 재간이 없다. 그렇게 잼을 만들 때가 온다. 앵두를 훑고 산딸기를 모으고 블루베리를 통에 담으면 그게 다 일이다.




  요즘은 거의 매일 잼을 만들고 있다. 잼을 좋아한다기보다 잼 만드는 걸 좋아한다고 하는 게 맞다. 빛이 곱고 향기로운 작은 열매들을 모아 끓이고 유리병들을 소독하는 일은 성가시기도 하지만 뭔가 특별한 일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서 잼을 담을 유리병이 냄비 속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서로 몸을 부딪히고 있는 걸 바라보며 주걱으로 잼을 젓고 있으면 보고 싶은 이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약한 불에 뭉근하게 과일을 끓여 잼을 만드는 일은 안부를 묻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잼을 만드는 동안 소란하고 부대끼던 마음이 조용해지고 넓어진다. 숨쉬기가 편해진다. 그래서 오늘 만들지 않으면 물러버릴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냄비에 과일을 담고 설탕을 부어 끓이고 젓는 일을 매일 밤마다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이미 어둠에 잠겼고 집안은 조용하다. 설탕에 버무려진 블루베리와 산딸기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달콤한 향기가 꿈처럼 퍼진다.


 세상이 완전히 어둠에 싸여 소리를 잃은 밤, 살짝 씻어 꼭지를 딴 딸기를 통째로 작은 냄비에 넣고 설탕과 함께 끓인다. 그것뿐이다. 그러면 밤의 정적 속에 감미로운 향기가 섞이기 시작한다. 어둠과 침묵 속에서 천천히 누그러지는 과실을 독차지한 행복감으로 벅찬 기분이 든다. 냄비 속 딸기가 스르르 부드러워지면 마무리로 레몬을 몇 방울 톡, 불을 끄고 그대로 둔다. 다음날 아침, 완전히 식은, 윤기 있게 빛나는 잼이 태어나 있다. 자, 막 만든 잼을 바삭바삭한 토스트에 바르고 베어 문다. 지난밤 냄비 속에서 펼쳐진 일이 비밀스런 꿈처럼 느껴져 아주 살짝 현기증이 난다. 그래서 한밤중에 잼을 졸인다.

                                                                                   히라마쓰 요코,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아마와 꽃양귀비가 한창이고 수국이 피기 시작하면 블루베리가 여문다.


과일들은 순서를 지켜 여물거나 익지 않는다. 유월의 태양 아래 복분자와 라즈베리, 블랙커런트, 산딸기, 블루베리가 앞다투어 농익는다. 백 퍼센트 산딸기잼이나 블루베리잼을 만들겠다는 건 지키지 못할 약속이다. 모두 함께 냄비에 쏟아붓는다. 과일들이 끓어오르는 걸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용해진다. 누구도 앞으로 나서서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순하게 섞여들어간다. 이도 저도 아닌, 무엇인지 모를 혼합물이 되면 어쩌나 했던 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향기도 좋고 빛깔도 곱다. 집 마당에서 함께 어우러져 자란 아이들이라 그런 걸까. 잼이 끓고 있는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단내가 좋다. 열매들이 뭉그러지고 거품이 나다가 이윽고 조용해지면서 반짝인다. 냄비 옆에 찬물이 담긴 흰 도자기를 놓아두고 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다. 잼이 잉크처럼 퍼지는 대신 한 몸으로 뭉쳐질 때, 아니 바로 그 직전이 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한 스푼 가득 떠서 아직 뜨거운 그것을 호호 불며 입으로 가져갈 때가 잼이 제일 맛있다. 달콤한 안부를 누구에게 전할지 바쁜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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