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장장 6년간의 모유수유에 마침표를 찍었다.
세아, 현준, 경준, 태준 모두 15개월씩 완모를 했으니 총 6년의 세월 동안 내 작은 가슴에 아이들을 매달고 산 것이다. 그건 엄청난 축복이고 행복인 동시에 손발에 족쇄가 채워졌다는 의미였고 내 몸이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6년간 나는 아이의 생명을 책임질 젖줄을 잘 관리하고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여자 사람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가슴을 풀어헤쳐야 하는 ‘엄마 사람’이었다.
시원섭섭했던 “마지막 수유, 단유”를 무사히 잘 마치고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던 날! 헐렁한 수유복을 벗어버리고 그동안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었던 예쁜 원피스를 꺼내 입던 날! ‘여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듯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이제 보란 듯이 나를 가꾸며 살리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지 열흘쯤 지났을까? 샤워를 하는데 왼쪽 가슴이 이상했다. 한눈에 봐도 심각한 기형이었다. 오른쪽 가슴보다 두배쯤 부풀어 있었고 단단했다. 통증도 느껴졌다. 가슴을 지그시 눌러보니 노란 액체가 삐죽 솟아올랐다. 이후 봉인해제라도 된 듯 가슴 아래로 줄줄 흘러내렸다.
‘단유 하고 아직 젖이 덜 말랐나? 안에 고여있던 모유가 나온 건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단단히 잘못됐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늦은 밤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해 초음파로 살펴보니, 왼쪽 가슴 전체가 하얗게 석회화로 뒤덮여있었다. 전체가 염증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더 쉽겠다.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오한이 느껴질 만큼 덜덜 떨려왔다. 오르는 열감과 함께 내 심박수도 점점 빨라졌다.
다음날 시아버님 제자 의사의 찬스로 “응급수술”을 받게 되는 행운을 누렸다. 그 행운이 독이 되었다는 건 수술 한 달 뒤에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단순 염증이니 고름만 잘 긁어내고 약만 잘 먹으면 곧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철석같이 믿었고 수술은 빠르게 끝이 났다.
퇴원 후 스테로이드제를 처방받아 한 달가량 열심히 복용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왼쪽 가슴은 수술 전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왼쪽 가슴 아래 5센티 길이의 선명한 빨간 줄이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얼굴이 둥근 달덩이처럼 변해있었다. 순간 불안했다. 알고 보니 스테로이드제 장기 복용 부작용인 ‘문페이스’였다. 혹시 이런 얼굴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사실 나보다 더 당황한 건 담당 의사 선생님이셨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약을 이 정도 쓰면 염증이 가라앉고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차도가 없으니 저도 당혹스럽네요. 어쩔 수 없이 조직검사를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수술을 진행할 때, 가슴을 열었을 때, 조직 검사를 미리 해두었더라면 무서운 검사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빙 돌아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서울 큰 병원에서 수술했지..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수술부위 실밥을 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가슴 X-ray를 찍는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멀쩡한 가슴을 찍어도 눈물 나게 아픈 검사인데, 지금 내 왼쪽 가슴은 손끝만 스쳐도 죽을 것같이 아픈 상태가 아니던가! 그런 가슴을 납작하게 짓누른다니.. 이건 미친 짓이다. 검사고 뭐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선생님.. 잘못하면 수술 부위 터질지도 몰라요.. 저 못 찍어요 선생님..”
뒷걸음치며 울다시피 애원했다.
“그러게요.. 딱 봐도 너무 아파 보이는데.. 일단 담당 선생님께 한번 더 여쭤볼게요..”
간호사 선생님도 무척 난감해하며 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담당 선생님 말씀이, 혹시 암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찍어야 된다고 하신단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내 신세가 너무 초라했다. 피할 수 없으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딱 한 번이니 이 악물고 참아보자고.. 그렇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기계가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찍어 누를 때는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진땀 흘리며 검사를 겨우 마쳤을 때 선생님이 발을 동동거리며 말씀하셨다.
“이를 어쩌죠. 살짝.. 흔들렸어요. 다시 찍어야 돼요..”
“흑흑흑..”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만 눈물이 터져버렸다. 세상이 다 원망스러웠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차가운 기계가 내 왼쪽 가슴을 또다시 잔인하게 짓밟았을 때는 “으악!!!” 비명을 지르며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기진맥진 검사실을 빠져나오니 이번엔 더 가혹한 검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총생검 조직검사’ 미세하지만 총끝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들이 순식간에 살점을 도려내는 검사였다.
“선생님.. 마취하고 하나요? 마취하면 안 아플까요?”
절실한 눈빛으로 선생님께 물었다.
“아.. 원래는 마취를 하고 총을 쏘는데, 환자분은 가슴 전체가 염증으로 뒤덮여있어서 마취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별 감정 없이 말했지만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네? 또 뭔데요..?!”
가슴이 쿵, 불안감이 덮쳤다.
“보통의 환자분들은 특정 부위만 검사하는 게 보편적인데, 환자분은 전체적으로 염증이 다 퍼져있어서 의사 선생님께서 8곳의 조직을 모두 채취해달라고 하시네요.. 마취가 안된 체 8번을 찔러야 돼서 많이 아프실 거예요. 피도 많이 날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지난 6년간 내 몸의 모든 물과 피와 살을 아이들에게 다 쏟아준 것 밖에 없는데.. 도대체 지금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거냐고 빈껍데기만 남은 몸으로 하나님께 따져 묻고 싶었다. 지금의 현실 전체를 부정하고 싶었다.
컴컴한 검사실 차가운 침대에 새우처럼 누워 8번의 총검을 왼쪽 가슴으로 받아냈다. 진짜 총상을 입은 사람처럼 시뻘건 피가 구멍마다 흘러내렸다.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닦으며 ‘이제 다 끝났다..’ 속으로 안도할 무렵, 이번엔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왼쪽 가슴 위에 턱! 올려졌다. 그냥도 아파 죽겠는데 꾹 누르면서 지혈을 하라니.. 온몸을 비틀어가며 겨우 겨우 마치고 나왔다. 흡사 고문실에서 살아 나온 사람처럼 너덜너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검사실 앞에서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신랑과 눈이 마주치자 애써 꾹꾹 눌러두었던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여보, 나 좀 살려줘! 나 죽을 것 같아.. 진통제 좀 줘!”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통증 중 최고 수준의 통증이었다. 네 아이들, 네 번의 출산을 할 때도 너무 잘 참아 모든 의료진들이 다 신기해했을 정도로 나는 아픔에 강했다. 처음 모유수유 때 함몰 유두가 갈라지고 피가 나고 찢겨 못 견디게 아팠어도 웃으며 젖을 물렸던 나였다. 친정엄마마저 독하다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신랑은 처음 보는 내 모습에 어쩔 줄 몰라했다.
검사 결과 “섬유선종”이었다. 일단 암이 아니라 안도했다. 그러나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섬유선종도 사람마다 증상이 다 다른데 나는 좀 치료가 힘든 케이스였다. 그 후 지인의 소개로 서울 삼성 제일 병원으로 1년간 치료를 다녔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길고 긴 끈질긴 싸움 끝에 완치가 되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아주 건강하다. 그 아픈 과정을 글로 쓰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테니, 섬유선종 이야기는 여기서 끝맺으려 한다.
그 시기 아이들의 나이가, 세아 9살, 현준 7살, 경준 4살, 태준 2살이었다. 엄마 손이 가장 절실한 시기였는데, 1년간 서울에 입원을 하거나 치료하러 갈 때마다 잘 견뎌줬다. 내 빈자리를 대신해 네 아이들을 케어하느라 신랑과 친정엄마가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네 아이들에게 모든 걸 다 주어서 내 몸의 면역력이 0이어서 생긴 병이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 덕분에, 그때 이후 우리 부부는 아이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건강과 서로의 행복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그 아픔의 시간들로 인해 나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다시 일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일을 사랑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그 아팠던 시절 덕분에 더욱 성숙했고 더욱 단단해졌다. 전원주택에서 자연과 벗한 덕분에 빠르게 호전되고 깨끗하게 완치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어느 날 서울로 치료받으러 가는 저를 안타까워하며 함께 가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신랑이 있었습니다. 고속터미널까지 배웅과 마중을 나와준 고마운 신랑이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주고받았던 잊을 수 없는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눈빛을 “시”로 남겨봤습니다.
슬픈 비 기쁜 비 (모두맑음/윤현주)
섬유선종으로 아픈 가슴 끌어안고
서울 삼성 제일병원에 가던 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남편은 내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조심스레 남편 손을 풀어내고
뒤돌아 버스 계단을 오르는데
가슴속 뭉클함이 솟구쳐 올랐다.
버스 창 밖
남편의 슬픈 눈이
내 젖은 눈으로 뛰어 들어왔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꿈뻑이며 시선을 흩어내기 바빴다.
눈으로 나누던 대화가 점점 멀어졌을 때
후드득! 소나기가 내리고
빗소리가 삼켜주는 울음이 컥컥 쏟아졌다.
‘쓸쓸한 치료 후
통증을 끌어안고
낯선 길
이 길을
얼마나 더 아프게 걸어야 할까?’
돌아오는 내내 빗줄기는 흐르고 있었다.
질척이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남편이 남색 우산을 펼쳐 들고 있었다.
우산 끝자락에 물방울이 흩어지며
피어난
한 줌 무지개가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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