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같았던 그 날밤의 기록
9년전, 고요하고 평화로운 토요일 밤이었다.
하루 종일 흙에서 뒹굴고 뛰어다녀 꼬질꼬질해진 아이들을 욕실 앞으로 집합시켰다. 먼지가 친구 하자며 들러붙은 아이들 옷을, 훌훌 벗겨 탁탁 털고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욕조에 얌전히 모여 앉은 아이들 머리 위로 샤워기를 틀어주니, 쏟아지는 물줄기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좋다고 깔깔거린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메아리쳤다.
“얘들아, 이제 그만 씻고 나가자.”
반신반의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네, 엄마.”
고분고분 욕조에서 나오며 아이들이 대답했다.
‘어라? 이 녀석들이 웬일이지? 단체로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아님 갑자기 철이 드셨나?’ 빨리 씻겨 내보내려는 나와 욕조를 사수하려는 아이들 간의 실랑이는 매일 밤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믿기 힘든 반응이었다.
‘야호!’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모든 것이 나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10개월 된 막둥이만 씻기면 드디어 나에게도 금쪽같은 휴식시간이 생길 것이다.
수건으로 막둥이 몸의 물기를 닦아낼 때는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백도 복숭아를 꼭 닮은 막둥이 엉덩이에 마지막 로션을 바를 때는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앙’하고 깨물었다.
드디어 욕실 영업 종료를 알리며 크게 소리쳤다.
“여보! 태준이 다 씻었어. 이제, 나 씻을게”
욕실 문을 닫으려는데, 닫히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내 바지 끝단이 태준이 손에 인질처럼 붙잡혀 있었다.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있는 힘을 다해 꼭 잡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태준이 눈망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 나도 욕실에 엄마랑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사랑스러운 막둥이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태준아, 엄마 금방 씻고 나갈게. 아빠랑 누나 형아랑 잠깐만 놀고 있어.”
말은 부드러웠지만 태준이를 매정하게 밀어내고 이내 문을 쾅 닫았다.
“휴..”
드디어 해방이라는 듯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흥겨운 칫솔질을 시작했다. ‘아이고 깜짝이야!’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웃음이 빵 터졌다. 아이들을 흉볼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입꼬리는 춤을 추고 있었다. ‘주말 밤인데 아이들 얼른 재우고 영화 보면서 시원한 커피 한잔 마셔야지! 어떤 영화가 좋을까?’ 행복한 고민으로 한껏 들떠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칫솔질을 멈췄다.
“여보! 밖에 무슨 소리야?”
입안 가득 물고 있던 치약거품을 뱉어내면서 소리쳤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욕실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다보니, 여덟 살 된 딸 세아가 입을 틀어막고 울고 있었다.
“세아야, 무슨 일이야?!”
너무 놀라 다그치듯 물었다.
“엄마, 태준이 피.... 피.....”
세아가 계단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세아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신랑이 태준이를 안고 있었다. 태준이는 조용했지만, 왼쪽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귀 너머까지 선명한 빨간 선을 긋고 있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태준이가 계단에서 구른 거야?!”
신랑은 설명 대신 태준이를 안고 현관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여보, 내 말 잘 들어. 지금 빨리 장모님께 전화해서 와달라고 하고, 장모님 도착하면 당신도 처남 차 타고 단국대 병원 응급실로 와! 나 먼저 가있을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급히 뛰쳐나갔다.
마음을 진정하며 생각했다.
‘별일 아닐 거야. 단순히 계단에서 구른 걸 거야. 타박상 정도 일거야..’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신랑이 다시 뛰쳐 들어오며 크게 소리쳤다.
그때부터 우리의 악몽은 시작되었다.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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