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선배가 은퇴한 남편이 집안의 모든 시계, 달력을 없앴다고 말한 일이 생각난다. 그 남편은 은퇴를 기점으로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는 삶의 방식에서 온전히 벗어나기로 작정했던가 보다. 하지만 그의 아내인 나의 선배는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본인의 일상을 꾸려 가는데 불편함이 없었는지, 환한 미소로 남편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음을 드러내었다.
나는 평생 “천재의 머리보다 둔재의 메모가 더 쓸모 있다.”는 기치를 받들며 일정을 관리했다. 몇십 년째 애용하는 ‘양지 다이어리’에 사안별로 색을 달리해 꼼꼼하게 기록하고, 휴대폰 일정에도 올리고, 최근에는 ‘똑딱 메모’까지 사용했다. 특히 절대로 차질이 있으면 안 되는 일정은 메모지에 써서 현관문에 턱! 하니 붙여 두기도 했다.
컴퓨터 작업창에 늘 시간이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목시계를 수시로 확인하고, 집안 곳곳에 시계를 배치해 두었다. 여담이지만 그런 강박증(?) 덕분인지 몇십 년 강의하면서 수업에 늦은 일이 한 번도 없었으며, 약속시간을 어긴 일도 없었다.
학자라면 누구나 하는 연구논문을 쓰고, 학술지에 투고하며 심사받아 게재하는 활동을 얼마 전에 완전히 정리했다. 학술활동과 관련한 공적인 모임이나 행사에서도 벗어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을 뿐, 결국 발을 뺐다. 이름 옆에 병기할 소속기관도 없다. 그러니 은퇴라고 말하기 멋쩍지만 은퇴는 은퇴이다. 평생 새벽잠을 뜯어가던 기상알람에서도 해방되었다.
아, 새벽 알람에서 벗어난 아침은 얼마나 여유 있고 한가로운지! 꽉꽉 막힌 도로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며 시계만 자꾸 들여다보는 초조함에 시달릴 일도 없어졌다.
평생 하던 일을 정리하며 어수선하고뒤숭숭한 감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의 삶에 순하게 순응하며 나아가려 한다. 누군가 짜서 내 앞에 던진 일정이 아닌 내가 짠 일정대로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날을 보낸다.
내일은 또 새로운 나의 날이 뜰 테이고, 나는 또 무언가 하면서 나름 살고 있으리라.
조금 더 끄적끄적...
커다란 학문적 족적을 남긴 조선시대 장유(1587 ~ 1638)라는 학자의 시가 기억에 남는다. 동생이 방문하여 자신이 지은 시를 보여주니, 그를 읽고 감흥이 일어 지은 글의 일부다.
그 시에서 장유는 말했다.
청명하고 새로운 자네의 시율이 기쁘기 한량없다
이제 늙은 형은 은퇴해도 괜찮으리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선 이들이 지녀야 할 덕목을 알려준다. 후세대를 인정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성취를 기뻐해 주는 일이다. 그게 은퇴 이후의 삶을 위해 은퇴자가 갖춰야 할 주요한 가치관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