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좀도둑이 확인한 사랑
이어령 선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 중에, 다락에서 꿀 항아리를 발견하고는 정신없이 손가락으로 퍼먹다 어머니에게 들킨 일화가 있다. 회초리를 들고 오시리라 생각하며 벌벌 떨었는데, 말없이 나간 어머니는 숟가락을 들고 돌아오셨다. 그것은 그가 평생 간직한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나는 다락에서, 포도를 몰래 먹다가 정신을 잃은 일이 있다. 어릴 적, 우리가 살던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안방 벽 한쪽의 작은 문을 열고 사뿐히 기어오르면 만날 수 있는, 제법 아늑한 공간이었다. 아이였던 나에게 다락방은 꽤 넓게 느껴졌고, 낮게 나 있는 작은 창문 덕분에 그리 어둡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10살도 채 안되었을 무렵정도로 기억한다. 다락에 올라가니 커다란 유리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병 속에는 설탕에 버무린 듯한 탱탱한 포도 알갱이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포도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다. 나는 맛이 다르다는 것도 모르고, 그 다디단 포도알을 정신없이 집어 먹었다. 차가운 병 안의 포도는 하나같이 과즙이 물씬 나오는 통통하고 매혹적인 맛이었다. 그러다가…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어렴풋이 정신이 돌아올 때쯤, 머리맡에서 할머니와 엄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포도주 담그느라 소주에 절여둔 포도를 집어먹었나 보더라…”
“에그, 얼마나 먹었기에 … 정신들면 꿀물이라도 줘야 겠어요…”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이불을 덮고-자리 보전하여-안방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뿐, 나를 꾸짖지 않으셨다. 이어령 씨가 숟가락에서 사랑을 느꼈듯, 나 역시 그 조용한 반응 속에서 사랑을 확인했다. 술 취한(?) 나를 깨우지 않으려는 그 따뜻한 목소리에서,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포도는 오래된 과일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절부터 기록이 남아 있고,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즈음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 곳곳에서도 포도주가 등장한다.
값비싼 한 말의 술은 아첨하기에 좋아
옛사람들은 귀인의 집안에 바쳤지
어리석고 졸렬한 산옹은 기교가 없어
헛되이 포도주 마시며 시골에서 늙어가네
포도주는 권력자에게 벼슬을 구하며 아첨을 떠느라 바치는 귀한 술이었다. 자신은 어리석고 졸렬하여 그럴 위인도 못되므로, 혼자 포도주를 마신다는 자조적인 시다.
내 어릴 때만해도 꿀과 포도주는 여전히 귀한 물품이었다. 그 꿀을 손가락으로 후벼 먹었든, 포도주 담그는 포도를 맨손으로 헤집어 놨든, 이어령 선생이나 나나, 무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 마음에 남은 사랑을 확인한 사건으로 삶에 자리매김했다.
다락방의 그 포도알 사건은 실수하기 마련인 어린시절, 내가 받은 너그러운 사랑의 이름으로 남았다.
<달콤하고 어지럽던 포도>
낮은 문을 열고 오르던
여름 오후의 후덥진 숨결
창문 사이로 스며든 먼지빛 햇살에
보랏빛 포도알이 반짝였다
혀끝에 닿는 달콤함에 취해
나는 그 맛이 영원할 줄 알았다
쓰러진 나에게
이불을 당겨 덮어주던 손길
말없이 전해진 포근한 온기
그날 이후
포도의 향기는
너그러운 사랑으로 새겨졌다.
Seon
본문 인용시 출처 : 『근재집』 1, 시(詩), 화주 은자가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권하다
인용한 사위의 일화 출처 : 『삼탄집』 9, 시(詩), 사위 이 학정 맹사 의 시에 차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