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생장에서 산티아고 까지

by 쌈마이작가
2025년 5월 14일 2장을 받았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완주증을 받고 나니 세상 분하다.

34일 동안의 여정이 알아볼 수도 없는 종이 쪼가리 하나로 퉁친다는 게 말이다. 뭐. 자격증도 그동안의 노력을 글자 몇 줄로 나타 내는 거지만, 이건 너무 허무하다. 내가 허무를 위해서 고생을 한 건 아닌데 말이다.


멋떠러지게 쓴 내 영어 이름과 날짜로 보이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779라는 숫자가 보였다.

779킬로미터??? 800킬로미터라고 알고 왔는데, 그 보다 내가 걸은 거리는 족히 1000킬로는 된다.

뭐야 내 21킬로 어디 갔어. 생각하지도 못한 카드 수수료를 떼인 거 같았다. 억울하다. 왜 779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아니 왜... 왜...

라는 내 생각을 안다는 것처럼 산티아고 완주증 발급해 주는 사무실에 계시는 한국분이 세상 다정하게 공식적인 거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공식적이라는 말에 내 생각도 한 번에 정리 됐다.

그래 내가 실제로 걸은 거리는 비공식적인 것이다. 내가 걸으며 한 고생은 개인적인 것이다. 허무한 감정은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이다.


산티아고 대 성당

생장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까지 34일 동안 공식적으로 779킬로미터, 비공식적으로는 약 1000킬로미터를 걸었다. 아무 사고도 없이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알베르게에 침대가 없어 체육관에서 잠을 잤었고, 족저근막염 오른쪽 발에 통증이 심해 쩔뚝거리며 걸을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혼자 걷는 길이 무척 외로웠다.


매일매일이 피곤했다. 거리도 거리지만 내 체력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았다. 내 체력으로 33구간을 34일 동안 걷는다는 게 무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닥치면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산티아고 출발 전 다짐했던 매일 글을 쓰지 못했다. 매일 유튜브 영상 업로드 하지 못했다.

첫날부터 글을 쓰고, 영상편집을 했다. 새벽 1시에 잠을 자고, 다음날 걷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먹고 노트북 켰다. 5일째 되는 날 걷는 것도 힘들고, 글 쓰는 것도 힘들고, 영상편집도 힘들어졌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싶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영상을 선택했다. 영상 속에 그날의 감정을 남겼다. 한국으로 돌아가 영상을 재 편집 할 때 글도 같이 쓰자. 그러면 되겠다 싶었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매일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를 못했다. 핑계는 인터넷 환경이 좋지 못했다. 밤 9시면 알베르게 불이 꺼진다. 밤 9시가 되면 졸렸다.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하루하루 걷는 것만 계획해도 벅찬 하루하루 속에 나는 뭘 하나 싶었다.

33구간 동안 32일을 혼자 걸었다. 혼자 밥을 먹었다. 외로웠다. 외로움이 때론 힘이 되는 걸 알았다.

꾸역꾸역 유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해 왔다.

아직 10여 일의 영상이 더 남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업로드를 마칠 계획이다.


산티아고 알베르게 앞에서 보는 마지막 낙조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날 알베르게 창이 붉게 물들었다. 1층으로 내려갔다. 벌써 외국인들은 맥주와 와인잔을 들고 낙조를 보고 있었다. 나도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처럼 여기 이 사람들도 오늘이 마지막 날인 거 같았다.

처음 보는 색의 낙조는 점점 낯익은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익은 검은색 속에서 내 생각은 점점 뚜렷해졌다.

내 산티아고 순례길의 마지막 날이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