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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Oct 29. 2024

하나님 나라, 도대체 뭐지?

마태복음 13장

하나님 나라는 물리적 공간일까? 한국 사람이 서양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경책을 읽다가 ‘하나님 나라 Kingdom of Heaven; Kingdom of God’란 단어를 마주치면 열에 아홉은 저승을 떠올린다. 저승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이다. 그곳이 과연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관해 아는 한국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승에서 못다한 바람과 꿈을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을 일생 중 단 한 번이라도 꿈꾸어 본 적이 있다면 저승이 존재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를 ‘저승’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는 한국 사람에게 역시나 저승과 비슷한 곳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문명이 서양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해준 해병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으니, 하나님은 염라대왕(閻羅大王)보다 더 강력한 존재로 한국인에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고,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는 저승보다 더 좋은 곳이여야만 했다. 한국전쟁 후 한국의 모든 경제가 미국의 지원 예산으로 굴러가던 시절을 살아낸 한국 사람은 미국을 도로조차 금으로 포장된 나라로 상상했음은 거짓말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는 수많은 사람에게 스스로 깨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 배에 올라 바닷가를 조금 벗어나 닻을 내리고 배를 멈춘다. 해안가에 몰려든 수많은 군중을 한 눈에 바라보기 위해서였고, 잠시 후 입을 열어 짤막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다: “한 농부가 밖에 나가 씨를 땅에 뿌렸는데, 어떤 씨앗은 길거리에 떨어져 새들이 날아와 곧바로 먹어버렸고, 어떤 씨앗은 돌짝밭에 떨어져 씨앗이 재빠르게 싹을 튀었지만 흙 부족과 연관된 수분 부족으로 해가 뜨자마자 말라 죽었고, 어떤 씨앗은 가시밭에 떨어져 싹은 났지만 가시밭의 압박으로 인해 제대로 자라지 못한 채 얼마 못가 죽고 말았고,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잘 자라나 30배, 60배, 100배에 달하는 열매를 맺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 설명하는 일’이 비유(比喩/譬喩)라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하고자 한 바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이야기 속 등장 인물과 사건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 명의 농부는 대체 누구를 뜻하는 거지란 질문이 제일 먼저 마음에서 생긴다. 농부는 하나님일까? 그런 거 같다. 그런데, 하나님이 씨앗을 세상에 뿌리는 방식이 그다지 바람직한 거 같지는 않다. 씨앗이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면 왜 하나님은 씨앗을 불공평하게 각기 다른 환경 속에 던지셨을까? 모두가 다 금수저로 태어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게 현실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손 댈 수 없는 게 현실일까? 전지전능(全知全能: 어떠한 사물이라도 잘 알고,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음)한 하나님은 시작부터 존재하지 않았단 말이겠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으로 군림하게 된 돈은 이제 모든 이의 삶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궁극적인 목표가 된지 오래되었다. 길바닥, 돌짝밭, 가시밭, 토양이 좋은 땅은 시작부터 그곳에 떨어진 씨앗의 미래를 예측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예수가 측근에 두고 지낸 제자에게만 알려준 해석을 차분하게 읽다보면 비유 속 농부, 씨앗, 토양이 만들어 내는 삼각구도는 돈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란 걸 알게 된다. 살다보면 인간은 공평하게 예기치 않은 시련과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다. 가난으로 허덕이는 사람은 허덕거림이 불러오는 각종 신체적 고통으로 힘겨워한다. 가난에서 벗어난, 혹은 가난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사람은 신체적 고통은 벗어던질 수 있겠지만 그 대신 정신적 고통으로 허덕이며 산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확실한 삶이란 여정 중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확실성을 경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길바닥과 돌짝밭, 가시밭과 토양이 좋은 땅은 본능적으로 확실성을 추구하는 우리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다른 이와 우리 자신에게 보여주는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건 아닐까?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마음은 확실성이 보장될 거 같으면 순식간에 길바닥에서 돌짝밭으로, 다시 가시밭으로의 변화를 거듭한다. 결국 우리 마음이 다다라야 할 곳은 토양이 좋은 땅이지만, 그 길은 멀고도 험하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 바는 마음 상태다. ‘하나님 나라 = 마음 상태’란 등식은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예수의 다양한 하나님 나라 비유에 모두 적용 가능하다. 절대 평안과 평정으로 무장된 마음 상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몸에 어떠한 자극도 주어지지 않을 때, 인간의 몸은 마음에 ‘자기 성찰’이라는 자극을 가한다. 뇌 연구가들이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낸 사실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은 적어도 인간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을 되새김질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동물이다. 가만히 있을 때, 마음에는 악령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이란 표현으로 비신화한 ‘악령’은 사실 우리가 잊길 원했던 과거에 행한 잘못이 쌓이고 뭉쳐서 이뤄진 결과물이다. 예수는 또 다른 비유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추수 때가 될 때까지는 좋은 감정과 생각,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 둘 다 모두 뒤섞여 자라도록 내버려둬라.”


왠지 모르게 찾아오는 울적함과 우울함에 짖눌리던 한 날 캐롤 데피(CarolDeppe)가 번역한 <도덕경(Tao Te Ching)> 꺼내 읽었다. 제 40장을 읽고 나서 문장 전체를 노란색 형광펜으로 칠했다. 40장 전문을 아래에 옮긴다.

 

In seeking knowledge, day by day something is added. In following Tao, day by day something is dropped. Day by day you do less and less deliberately. Day by day you don’t do more and more. You do less and less and don’t do more and more, until everything happens spontaneously. Then you act without acting, and do without doing, and achieve without forcing. And nothing is done. And nothing is left undone.

 

지혜를 구할 때, 우리는 매일매일 무언가를 더한다. 도를 따를 때, 우리는 매일매일 무언가를 버린다. 하루하루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더 많은 걸 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일어날 때까지, 하는 일을 줄이고 더 많은 걸 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면 행동하지 않으면서 행동할 수 있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억지로 무언가를 시도하지 않지만 성취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지 않은 채로 남겨진 게 없다.

 

‘하나님의 나라’로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마음의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닐까?


2024.10.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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