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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에서 축제 기획자로 한 달 살기 (10)

10. 삶에 대한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보게 되는 일

by 이양고


1. 평화로운 나날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한다.

오늘은 뭘 해야 하더라?


그렇게 고민하는 것이 크게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퇴사를 앞두고 있을 때,

하기 싫은 일은 자꾸 명확해지는데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의 윤곽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 시절엔 아침에 일어나는 게 참 힘들었다.


아침 일찍 눈을 떠도 30분 동안이나

애써 출근을 외면하며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그땐 내가 왜 이렇게 게을러졌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번아웃 상태였던 모양이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는 게 이토록 즐거운 걸 보면.




오늘의 첫번째 일정은 점심을 먹는 일.

의령 칠곡면에는 국수집이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얼마 전 방문했던 ‘국수네’ 집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방문할 “자굴산 촌국수”라는 곳이다.



사실 겉모습만 보면 장사를 하지 않는 가게처럼,

간판과 외벽의 색이 다소 바래 있었다.

하지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점심을 먹으려는 손님들로 꽤나 북적거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의령 칠곡면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후루룩 식사를 때우고 일어설 수 있는 면요리가

유독 인기가 많다고 했다.






가게 곳곳에는 마을 어르신 댁처럼 정다운 것들이 많았다.


가령 손으로 쓴 ‘자기 수저는 자기 것만 만진다’라는 종이라든가,

멋드러지게 손글씨로 적은 메뉴판 같은 것들 말이다.


요즘은 시골에 가도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간판이나 메뉴판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의령 ‘자굴산 촌국수’는 의령이라는 지역과 닮은 인테리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더 좋았다.


아마 이런 인테리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건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고,

오래 남았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일 테지.






가게 이름이 ‘촌국수’일 정도로

메뉴는 단촐한 편이었다.


물국수와 비빔국수,

여름에만 하는 콩국수와 겨울에만 하는 떡국만이

메뉴판에 남아 있었다.


한 식당에서 메뉴가 많을수록

모든 음식을 맛있게 만들기 어렵기 마련인데,

이곳은 국수를 메인으로 하는 만큼

국수 맛에 대한 기대가 컸다.



‘국수‘네 국수는 조금 더 현대적인 입맛에 가까워서

젊은 사람들이 먹기에도 좋을 것 같은 맛이었다.

두부가 들어 있어 단백질을 채우기에도 좋았다.


반면 ‘촌국수’는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듯한,

정겨운 촌국수의 느낌이 강했다.

여긴 두부가 없는 대신, 기본 1인분의 양이 꽤 넉넉한 편이었다.


만약 의령 칠곡면에 오게 된다면

두 곳 모두 들러서,

어디가 더 마음에 드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수를 먹은 우리가 향한 곳은 칠곡면에서

가장 트렌디한 카페, ‘가배목림’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도 손님들로 북적였는데,

오늘도 여전히 인산인해였다.

빈자리가 없어 잠시 웨이팅을 해야 할 정도였다.


사각사각 하우스와 홍의별곡이 있는 근처엔

농가와 논, 그리고 몇 마리의 작고 귀여운 고양이들뿐이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건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해졌지만 묻지는 않았다.





커피 한 잔과 약간의 디저트를 사서 다시 홍의별곡으로 향하는 길.


우리가 점심을 먹었던 자굴산 촌국수 앞에

두 분의 어른이 나란히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리틀 포레스트이 한 장면처럼 보여

먼발치서 사진을 찍었다.


tmi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이다.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빌런이 없어서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영화엔 그런 계절감이 잘 담겨있다.

특히 배우 김태리의 잔잔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나레이션을 들을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쩌면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시골에서 보냈던 19년의 시간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맛있는 커피도 사왔으니

이젠 일을 할 차례였다.


브런치에 써야 할 글이 남아있어서

얼른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단순 포장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단순 작업을 하면서는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은중과 상연>을 틀어두었는데

천상항... 정말 잘생겼더라.




한참 작업을 하다가 통화할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한 광경.


홍의별곡 근처 한 집의 어르신이 길고양이와 함께 놀고 계셨다.


고양이가 너무 어여쁘고

장난감까지 사서 놀아주는 모습이 참 따뜻해보여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다가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키우는 고양이냐고, 너무 예쁘다고 말씀을 건네자

그분은 그냥 집에 밥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에요, 하고 웃으셨다.


길고양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집에 밥을 챙겨두고 장난감까지 마련해 놀아주시는 그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2. 노는 게 제일 좋아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


우리는 여느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점심을 먹고 나면 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가 향한 곳은 맛집으로 소문난 ‘함양식당’이었다.


닭볶음탕이 맛있다고 칭찬이 자자한 곳이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이윽고 닭볶음탕이 나왔다.


안주로 먹기에도 딱 좋은 메뉴라

맥주를 한 잔 시킬까 하다가 꾸욱 참았다.


곧 추석이 될 테고, 추석이면 가족들과 맥주잔을 기울이게 될 테니까.


이런 좋은 안주를 두고 안 마시다니 아쉽다, 하며

메뉴판을 올려다보자 좋은 술친구를 만난 듯 망고가 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 모두 음주를 하지 않는 걸로.





저녁을 먹은 우리는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

리치리치 페스티벌이 열릴 장소 —

즉, 우리가 머니플레이를 진행할 부근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했다.


앞으로 4일 동안 오전부터 오후까지 내내 일해야 할 테니,

미리 익숙해지자는 이유에서였다.




리치리치 페스티벌은 의령에서도 꽤 규모 있는 축제라

이미 많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준비가 한창인 현장을 보니,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의령을 찾고

이 작은 도시가 떠들썩 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령 리치리치 페스티벌은 2022년 처음 개최된 의령 가을 축제다. 의령 관문에는 남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남강에 솥을 닮은 바위가 하나 있다. 이를 솥바위라 한다. 예로부터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8km 안에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좋은 기운을 관광객분들과 함께 하고자 솥바위의 부자기운을 테마로 하는 의령 리치리치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우리는 윤곽이 잡혀가고 있는

리치리치 페스티벌 공간을 구경하다가

놀이터에서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타며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어렸을 때는 서른쯤 되면 완전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30대가 되고 보니

노는 걸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이와 다를 게 없다.


다만 이제는 바깥의 시선을 의식해

천방지축으로 놀고 싶어하는 마음을 애써 숨기게 되었고

그 마음을 숨길 줄 알게 된 만큼

체력도 함께 떨어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른, 뭐 없다.

그리고 그 ‘뭐없는 어른’이 굳이 되고 싶지도 않다.

노는 걸 좋아하는 어린 아이로 남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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