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내 오고 싶었던 제주에 드디어 오다.
의령에서 집으로 돌아온지 며칠이 지났건만 체력이 돌아오지 않는다.
무리를 단단히 한 것인지 몸이 으슬으슬하고,
어깨와 허리, 팔에도 약간의 근육통이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4일간 야외 일정으로 무리가 가고
환절기라 갑자기 추워진 탓에 몸이 정신을 못 차리는 듯
코피가 자주 났고,
한 번 터진 코피는 멈출 생각 없이 오래갔다.
몸이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이럴 땐 푹 쉬어줘야 상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꼭 가고 싶었던 제주 워홀 3기가 곧 시작된다.
무리한 일정을 잡은 걸 후회해봐도 돌이킬 수는 없고,
시간은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으니까
병원 가서 몸살 약도 지어오고 오랜만에 엉덩이 주사도 맞고 왔다.
제발 내일 컨디션은 괜찮기를 바라면서 잠에 들었지만 잠은 오질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새벽에 터진 코피는... 멎질 않고...
그런 첫째가 걱정된 둘째와 셋째는
김해공항까지 태워주는 걸로도 모자라, 공항 안까지 배웅해주었다.
가끔 외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남매 사이가 어쩜 그렇게 우애가 좋냐며 비결을 묻곤 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때 가장 많이 웃고,
그때의 내가 제일 잘 웃는 사람이 된다.
동생들이 데려다준 덕분에
덜 피곤한 몸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치앙마이 갈 땐 5시간을 타느라 잠깐의 감흥만 느끼고,
비행기 의자의 불편함만 깊이 새겼던 것 같다.
하지만 제주도로 갈 때는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비교적 편안한 몸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자의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자다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도착한 제주도.
크지 않은 공항에서 위탁 수하물로 부친 짐을 찾기 위해 한참을 기다리다가
천천히 나오는 캐리어를 잡아 끌고 나오니
제주도스러움의 끝판왕 '야자나무'가 반겨준다.
갑자기 궁금해서 찾아본 "제주에 야자나무가 많은 이유"
제주에 야자나무가 많은 이유는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종려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어 ‘남국의 이미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주에서 흔히 "야자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는 사실 "코코넛 야자"가 아니라 중국 종려나 워싱토니아 야자, 캔디다 종려 등의 종류로 열대 지방의 야자나무처럼 생겼지만 코노넛은 열리지 않는 '비슷한 외형'의 나무라고 한다.
이번에 내가 신청한 프로그램은 "제주 워홀로 즐기는 로컬 생활"인데,
이 프로그램은 모슬포항 근처에 있는 "제주 버킷"이라는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제주 버킷은 제주공항 4번 정류장에서
102번이나 151번 버스를 타면 된다.
어떤 글에서 151번이 약 20분 정도 더 빠르다고 해서
151번을 타고 모슬포항으로 향했다.
제주 버킷은 151번의 종점에서 내리면 되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으면 된다.
내가 탄 151번은 좌석버스라 쾌적했고,
두 개의 캐리어도 짐칸에 실을 수 있어 훨씬 편했다.
제주공항에서도 제주의 느낌을 물씬 받을 수 있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검은 돌과 바다가 비로소 제주를 확실하게 느끼게 했다.
나는 퇴사 후 제주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었는데,
다양한 지역에서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알게 되면서 제주로 오는 걸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선정되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그토록 원했던 제주도라니.
물론 처음 기대했던 것처럼 여유롭게 글을 쓰고
사색의 시간을 길게 가지는 건 어렵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일생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으니
2주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1번 버스를 15시가 약간 넘은 시각에 타서
16시 40분쯤 되어서야 내릴 수 있었다.
제주공항에서부터 약 한 시간 반이 걸린 셈인데,
버스가 꽤 덜컹거려 편하게 잠들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드디어 도착한 버킷 제주!
사실 151번 버스에서 캐리어를 들고 내리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그들이 버킷 제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도로 검색조차 하지 않고, 그냥 그들을 따라갔다.
나는 그런 ‘감’을 잘 알아차리는 편이다.
합천 해인사에 갈 때도 버스에 오르는 한 사람을 보고
왠지 같은 방향으로 갈 것 같다고 느꼈는데,
정말로 해인사에서 마주쳤다.
순천에서도, 심지어 청양행 버스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물론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있으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낯선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겐
특유의 묘한 긴장감이 있다.
자주 창밖을 확인한다거나, 차가 멈추면 고개를 들어 기사님을 바라본다거나 하는—
그런 낯섦이 공기처럼 묻어난다.
함께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어색하게 1층에 서 있는데, 총괄 담당자로 보이는 분이 나왔다.
이곳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부터 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셨다.
방 안내를 받기 전 잠시 기다리던 동안 마주친 고양이.
작고 어여뻐서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방을 골라야 해서 먼발치에서 아쉬운 일방적 인사만 건넸다.
버킷 제주는 방 구성이 꽤 독특했다.
하나의 방 안에 2층 침대가 여러 개 놓여 있을 만큼 공간이 넓었다.
방마다 테마가 있다고 설명해주셨지만,
한 번에 많은 방을 둘러본 데다 따로 메모를 하지 않아
각 방의 테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제주 버킷’을 검색해 이 글을 찾아온 분들이
방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길 바라며
찍어둔 사진들을 두서 없이 올려둔다.
순서는 엉망일 수 있으니, 각 방의 분위기만 가볍게 봐주시길.
나는 16시쯤 도착해 방을 골랐다.
앞서 말했듯이 함께 버스를 탔던 사람이 꽤 많아,
네 명이 동시에 방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중 나와 단발머리인 한 분이 302호를 골랐고,
나머지 두 분은 다른 방을 선택했다.
각 방은 테마에 맞게 꾸며져 있었지만,
2층 침대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았다.
전체적으로 우드톤 인테리어라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후기들을 보니 여름엔 꽤 덥고 습했다고 하는데,
가을에 온 나는 덥지 않은 대신 약간의 습기가 느껴져
짐을 풀며 에어컨을 켜 두었다.
이곳은 1.5층에 있는 코워킹 마루다.
좌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낮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어 글을 쓰기 좋은 공간이다.
이용 시간은 오전 7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다만 노트북 작업을 오래 하기엔 테이블 높이가 다소 애매해
허리도, 다리도 아프지만… 지금 이 글을 코워킹 마루에서 쓰고 있다.
여기는 내가 사용할 302호.
2층 침대가 두 개 들어간 방이 두 개 있어, 총 8인실이다.
가운데에는 거실이 있고, 소파도 놓여 있다.
방 안에 널찍한 거실이 있는 덕분에 옷을 거실에서 말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러 방을 둘러보았지만 선뜻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는데,
302호를 보자마자 ‘여기다’ 싶은 마음이 들어 바로 선택했다.
두 번째 사진에서 보다시피,
이번 제주에는 캐리어 두 개를 챙겨 짐이 많은 편이었는데
다행히 캐리어 두 개를 펼쳐도 충분할 만큼 공간이 넓었다.
이건 3층에서 내려다본 전경이다.
버킷 제주는 3층에서 1층이 보일 정도로
각 층이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감이 있다.
그래서 어디에서 보더라도 숙소가 답답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짐을 풀고 나니 밥을 먹은 기억이 사라진 듯 허기가 밀려왔다.
생각해보면 집에서 출발할 때 집어 먹은 김밥 몇 알이
오늘의 전부였으니 당연히 배가 고플 수밖에.
같이 302호에 묵는 분과 함께 주변을 둘러볼 겸
간단히 식사하러 바로 근처에 있는 CU로 향했다.
의령에서는 가장 가까운 CU를 가려 해도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기에 늘 심리적인 부담이 있었는데,
여기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편의점을 좋아하는 줄은,
이렇게 도시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는 줄은 나도 몰랐다.
즉석식품은 많지 않아 김밥 한 줄과 두유 하나를 골라 계산한 뒤,
편의점 야외 자리에 자리를 잡고 먹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려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김밥만 서둘러 먹고 자리를 일어났다.
룸메이트 분은 주변을 좀 더 둘러보고 싶다며 자리를 떴고,
나는 홀로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들고 코워킹 마루로 향했다.
코워킹 마루에 앉아 글을 쓰다 보니,
함께 버킷 제주에서 지낼 사람들이 하나둘 체크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느껴지는 이 기분,
묘하게 들뜨고 설레는 이 감정이 나쁘지 않다.
물론 좋기만 할 수는 없겠지만,
건강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뜻깊은 시간으로 잘 빚어나가야지.
버킷 제주는 평일에 삼시세끼를 제공한다.
아침은 8시부터 8시 40분까지, 점심은 12시부터 13시까지,
저녁은 18시 30분부터 19시 30분까지 먹을 수 있으며
식단표도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밥이 맛있다는 후기를 본 적이 있는데,
식단표에서 느껴지는 메뉴들만 봐도 ‘공’이 느껴졌다.
아직 맛을 보지 않았지만, 정성스러운 맛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매일 밥을 먹을지 여부를 투표로 정하는데,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믿는 나는 아마 웬만하면 모든 끼니를 챙겨 먹을 것 같다.
그렇게 잘 챙겨 먹다 보면
무너졌던 면역력도 서서히 되살아나지 않을까.
이번 제주살이의 목표는 단순하다.
건강하게 잘 지내기, 그리고 매일 브런치에 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