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제 맥주 세 캔의 여파로 숙취가 선명한 가운데,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오늘은 준영 이사장님이 처음부터 내내 강조한
‘단체 프로그램’ 중 하나인 해안도로 아침 러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준영 이사님은 선택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빠져도 되지만
단체 프로그램은 웬만하면 빠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고,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알딸딸한 가운데에도
러닝을 하기 위해 세수도 하지 못한 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함께 술을 마신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그들보다 가장 상태가 안 좋은 건 바로 나...
(으이구 자랑이다)
어떻게 코스를 돌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숙취 탓에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메슥거렸다.
세 캔이면 무리해서 마신 양도 아니었는데,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상태에서 피로가 누적된 데다
안주도 없이 마신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 메뉴는 토스트와 계란,
그리고 막걸리잔에 담긴 흰우유였다.
사실 해장이 필요해 국물이 있는 게 간절했지만,
준비된 아침이 빵이니 이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세수도 하지 못한 채 러닝을 다녀왔기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빵 두 개 중 하나만 급히 욱여넣고 근처 CU로 달려갔다.
혼자 편의점으로 가던 길에 만난 작은 강아지.
버킷 제주 근처 자원봉사자의 집에서 키우는 아이였다.
너무 작고 귀여워서 한 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경계심이 많은 아이라 결국 손끝 하나 닿지 못했다.
CU에 들러 라면 국물을 마시듯 해장을 하고 돌아오는 길.
저만치 보이는 바다가 어여뻐서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바다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고.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마주하게 될 풍경일 텐데도,
제주의 바다는 볼 때마다 새롭고, 어쩐지 더 어여쁘다.
차를 타고 대정 오일장으로 이동하는 길.
제주에 열 번은 넘게 왔지만, 오일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행으로 제주를 찾는 것과
프로그램을 통해 제주를 체험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여행과 달리,
이번엔 조금 더 다양한 결의 제주를 바라보게 된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다니며 느낀 건,
‘여행으로 도시를 경험하는 것’과
‘며칠, 혹은 몇 주간 그곳에서 살아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살아본다는 건,
그 도시를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일이다.
대정오일시장은 6·25전쟁 당시 문을 연 곳으로 제주도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오일시장이다. 당시 대정읍에는 비행장과 육군훈련소가 있어 필요한 생활용품 및 물자가 오가다 보니 점차 커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대정읍 내에서 자리를 몇 번 옮기며 지금은 현재의 자리인 대정읍 하모리에 자리를 잡았다.
제주도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은 우리에게는 특별히 살 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시장을 둘러본 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일장을 다녀온 뒤, 우리의 다음 일정은 이준영 이사장님의 특강이었다.
부제가 ‘고립 청년에서 로컬 기획자가 되기까지’라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 훨씬 말씀을 잘하셔서 기억에 남는 내용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수많은 실패를 해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겁내지 말고, 도전하라는 이야기.
나는 늘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특히 누군가를 앞에서 이끄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견디며
보석처럼 단단해졌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순천의 희주 PD님, 청양의 소철원 대표님, 의령의 안시내 대표님.
로컬 프로그램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접점조차 없었을 멋진 청년들이다.
그리고 이제, 그 리스트에 이준영 이사장님이 새롭게 합류했다.
멋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목표를 달성한 사람 등
세상에는 각자의 기준에서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참 많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따라갈 수는 없다.
나는 단지,
내가 선택한 길을 믿고 한 걸음씩 걸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누군가는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존재일 뿐이다.
오늘의 점심은 간장불고기와 두부조림, 버섯볶음이었다.
전날 밤 술을 마신 탓에 국물을 먹고 싶었는데
내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계란국이 나와서 맛있게 먹었다.
(다른 글에서도 밝혔지만 가장 좋아하는 국은 미역국)
다른 글에서도 보았듯이 밥이 입에 너무 잘 맞다.
우선 간도 삼삼하지 않고 약간 짠 편에 속하는데,
짠 걸 좋아하는 내 입에는 안성맞춤으로 맞다.
제주도에 온 이후 하루에 만보 이상을 꾸준히 걷고 있는데
살이 빠지지 않는다면 아마 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14시까지 자유시간이었다.
순천은 하루에 한 가지 정도의 일정만 있어 자유시간이 많은 편이었고,
의령은 축제 기획자로 일하던 곳이라
18시 이후에야 자유시간이 생겼다.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냈기에
다양한 곳을 돌아다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활동을 소화할 수 있었던 곳은
상주나 청양처럼 2박 3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상주의 매력과 청양의 이야기를 담아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제주도는 어떨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막상 와보니 이곳도 쉼 없이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공식 일정이 끝난 뒤에도 선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이 많아 하루가 정말 짧게 느껴진다.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하지만 생각해보면,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할 만큼 바쁘다는 건
그만큼 기록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게 꽤 기쁘다.
14시부터는 차량을 타고 제주다운 투어를 나갔다.
돌고래가 자주 나타난다는 스팟을 들렀고, 이어서 해안도로 위를 드라이브했다.
예전에 동생과 함께 제주에 왔을 때도
바다를 중심으로 해안도로를 자주 달렸지만,
그땐 유명한 곳 위주로 다니느라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이번엔 제주를 잘 아는 래현 팀장님이 안내해 주신 덕분에
사람이 거의 없고, 평일의 여유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참고로 첫번째 사진에 있는 미니 펩시는 스피커였는데,
스피커로 노래를 들으면서 드라이브 하니까 더 좋았다.
제주 버킷에는 3대의 스타렉스가 있는데
한 대는 연두색, 한 대는 진한 초록색, 하나는 회색이다.
각 차량은 영민 팀장, 동기 팀장, 래현 팀장님이 운전을 해주시는데
매번 탑승하는 차량이 달라지지만
이번엔 래현 팀장님이 운전하는 차량에 탑승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도구리알.
멀리서부터 거대한 풍차가 보였는데, 아마 풍력발전소가 있는 곳인 듯했다.
그 말은 곧, 바람이 몹시 강하게 부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겠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즐겁기만 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이야기했고, 쉬지 않고 웃었다.
사실 제주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처음이라
모두와 친해지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 친해지면 좋겠지만,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려는 건
불필요한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막상 제주에 와보니
각자 가진 매력과 이야기가 너무 다채로워
그 힘에 자꾸 이끌리듯 말을 걸게 된다.
시덥잖은 이야기라도 좋으니,
그들에게 계속 무언가를 묻고 싶어진다.
제주 바다 미쳤나봐 진짜.. 너무 예뻐.
제주 바닷바람이 이렇게 차가울 줄은 몰랐다.
겉옷을 챙겨오지 않은 게 후회돼
어제 들렀던 다이소에서 후리스를 하나 사왔다.
한철 입고 버려도 될 정도의 퀄리티였지만,
지금은 5,000원짜리 이 옷이
나를 감기로부터 든든히 지켜주는 아이템이 되어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나와 같은 후리스를 입은 정범 오빠가
“사진 찍어줄까?” 하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얻은 사진 속 나는,
모자이크로 얼굴은 가렸지만
잔뜩 웃고 있었다.
정말, 뭐가 그렇게 신났던 걸까.
바람이 많이 불었고, 하늘은 흐렸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풍경들이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 바다가 주는 힘을 믿는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을 만큼,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제주 바다는
언제나 내 마음을 가장 설레게 만든다.
삼삼오오 모여서 바다를 구경하던 우리 멤버들.
그 중에 래현 팀장님은 구경하는 우리를 끊임없이 찍고 계셨다.
두번째 사진 제목은
우리를 찍어주는 래현 팀장님을 찍은 나.
래현 팀장님이 돌고래 스팟을 돌며
1기에도, 2기에도 단 한 번도 돌고래를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엔 다를 거라며,
우리는 운이 좋아 꼭 보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정말로 돌고래 가족을 발견했다.
우리 차가 맨 앞에 있었기에
우리가 멈추자 뒤따르던 차량들도 모두 멈춰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예전에 동생과 제주에 왔을 때도
돌고래가 보인다는 카페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 기다림의 보답이라도 받은 듯 기뻤다.
돌고래 영상을 동생에게 보여주자 얼른 소원을 빌라며 웃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지내게 해달라고 조용히 빌었다.
오늘의 저녁은 떡볶이와 고구마튀김, 햄구이, 콩나물잡채.
사실 전날 술을 많이 먹어서 속이 쓰린 상태였는데,
오늘 저녁이 전반적으로 약간 매콤해서 속이 더 쓰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기진 않았다.
오뎅국도 약간 매콤해서 속이 쓰렸지만,
함께 먹는 자리라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우리 방 룸메이트 맹수가 키위를 나눠줬다.
키위를 반으로 쪼개 숟가락으로 퍼먹는데,
안의 심지가 하트 모양이라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밖으로 나왔는데,
1층에 모인 친구들이 옹지공기 모여있는 게 귀여워서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이들은 다들 제주 버킷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인 '홍마트'에
걸어가기 위해 모인 친구들이었는데
나도 이들 속에 섞여 홍마트로 향했다.
제주도에서는 마트에서 파는 회도 이렇게나 종류가 많고 다양합니다.
나도 회를 좋아하는 편이라
회를 먹겠다는 친구들 틈에 끼어서 몇 점 먹을까 했지만
아까부터 내내 속이 쓰려왔으므로 회는 패스.
숙소로 걸어 돌아온 우리는
소희, 다빈이, 솔휘는 앉아서 무알콜 맥주에 회를 먹기 시작했고,
속이 쓰리고 목이 칼칼한 따뜻한 생강차를 마셨다.
생강차를 마시면서 우리방 룸메인 주이가 가진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가진 인사이트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뻤다.
이윽고 이어진 래현 팀장님의 ‘세바버(세상을 바꾸는 버킷)’ 시간.
래현 팀장님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릴 땐 사실,
누군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늘 궁금했던 건
‘지금 내가 왜 이런 기분인지’,
‘내가 왜 이걸 좋아하게 되었는지’ 같은,
나 자신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아마도 확립되지 않은 정체성을
내 안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나에게 좋은 인사이트로 다가오고,
그 인사이트들이 쌓여
결국 나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래현 팀장님의 이야기가 끝난 뒤,
모두 1층에 모여 맥주를 마셨다.
나는 그들 틈에서
아직 다 쓰지 못한 브런치 글을 완성하려고 따로 앉았지만,
피곤함 때문인지, 아니면 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인지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노트북을 들고 조용한 코워킹 마루로 향했다.
코워킹 마루에는 함께 홍마트에 다녀온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블로그를 쓰거나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 틈에 앉아 내 브런치 계정을 알려주고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노트북을 덮었다.
이런 상태로는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층으로 내려가니
아까 술을 먹던 멤버들
맹수, 주이, 포비, 민석, 영민, 택민, 래현 팀장님, 지민이가 모여 있었다.
결국 나도 그 자리에 합류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또다시 맥주를 마셨다.
=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오늘 화의 부제를 이렇게 붙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