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각, 반쥴

엄마의 대학 시절 단골이던 카페

by 정구름

종각역 12번 출구로 나와 젊음의 거리로 접어든다. 밤이 되면 인도의 중심부에는 주황색 천막들이 일어나고 널찍한 간이 포장마차와 붕어빵 노점, 닭꼬치 트럭, 타로 점집이 영업을 시작한다. 퇴근한 직장인들과 어학원에서 쏟아져나온 학생들 사이로 간간히 외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띈다. 온통 화려하게 번쩍대는 네온사인 간판들을 외면하고 좁은 골목으로 꺾어들면 삼삼오오 담배 피우는 이들 뒤로 자그만 입간판 스탠드의 가지런한 폰트가 보인다.

2층의 족발집을 지나 3층에 올라서면 잠깐 딴세상 같다. 조도 낮은 조명과 오래된 의자들, 제일 넓은 벽면을 차지한 수동 그라인더 컬렉션. 카운터 왼편에는 반쥴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공정무역 브랜드의 찻잎이 보관된 유리병들이 진열되어 있다. 방문할 때마다 제법 다양한 종류를 선택해봤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취향인 차는 '콩고 봉고'. 일전에 방문객 이벤트를 하실 때에 티백을 하나씩 주셨는데, 그때도 같은 차를 두 번이나 가져갔었다.


<반쥴>은 사실 우리 엄마의 단골 카페였다. 엄마가 80년대의 여대생일 무렵에도 종각에는 <반쥴>이 있었다. 이제는 내가 더 자주 가는 카페가 되었다. 단골 카페 삼는 나의 기준은 이렇다. 1 음료가 취향일 것. 2 화장실이 깨끗할 것. (생각보다 되게 중요하다. 카페에 가서 뭘 마시든 화장실을 한 번은 이용하게 되어 있는데, 견딜 수 없을 만큼 쾌적하지 못하면 무엇을 했든 모든 경험이 부서지니까.) 3 이용하는 좌석이 편안할 것. <반쥴>은 이 모든 걸 충족하는 종각의 거의 유일한 카페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카페를 굳이 서치하지 않고, 근처에 오면 무조건 <반쥴>로 직행해 차를 마셨다. 차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 멋스러운 공간을 좋아하는 지인도 데려오고, 이따금 과외 학생과 기분 전환을 위한 수업을 하기도 했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혼자 방문해 할 일을 하기도 했다. 오늘은 간만에 얼그레이 밀크티를 시켰는데, 여기서는 따뜻한 차를 서브할 때 예쁜 티팟에 아기자기한 티워머를 입혀 귀여운 찻잔과 함께 주신다.

어딜 가든 단골인 티를 잘 내지 않는 편인데,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직업적으로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소의 스몰톡이 나오지 않아서 그렇다. 특히 혼자 방문할 때에는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아진다. <반쥴>을 오간 지 못해도 칠팔 년은 되었는데, 그동안 사장님과도 딱히 기억에 남는 스몰톡을 한 적이 없어서 나는 날 기억하지 못하시는 줄 알았다. 게다가 종각 자체가 집에서 멀어서 비정기적으로 오는 편이라 더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까는 주문을 받아 주시면서 쿠폰을 다 썼냐고 물어봐 주시더라. 자주 가는 카페의 쿠폰을 모으는 편인데도 사실 실제로 사용해본 건 여기, <반쥴>과 연남의 <우니쿠스> 밖에 없었다. 다 모을 때쯤 되면 갈 일이 없어지거나, 아니면 거의 다 모았는데 잃어버리거나, 보통은 둘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특히 <반쥴>은 언젠가부터 새 쿠폰은 발행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한 상자를 찾으셨다면서 전에 쿠폰을 쓰신 분들한테만 한 장씩 더 주신다고 해서 새로 받았다. 첫 번째 칸에 꾹 찍히는 도장을 보면서, 이번에 모으는 쿠폰은 나중에 그냥 갖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 쓰는 다이어리에 도장 한 번 찍어주시라고 부탁해서 간직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밀크티 쟁반을 받아 자리에 앉으면서, 언젠가 과외를 했던 학생이 <반쥴>에서 알바를 하고 싶어했던 게 기억이 났다. 삼사 년쯤 전에 입시 수업에서 만난 수강생이었는데, 나보다 고작해야 서너 살 어려서 꼭 사촌동생처럼 느껴졌었다. 영화 만들기를 시작하고 싶어하는 여느 이십대 초반처럼, 꿈과 불안과 희망과 절망이 전부 뒤섞인 반죽 같은 걸 끌어안은 상태였다. 사실 그녀보다 몇 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을 뿐인 나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연락하고 있지 않은 그 친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도 영화를 좋아할까? 영화를 만들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 영화는 쳐다도 보지 않을까?


<반쥴>의, 세월이 쌓인 공간에 놓여 있다 보면 필연에 따라 이런 식으로, 다른 생각에 생각을, 생각의 꼬리를 물고 또 물게 되기 때문에 사실 오래 작업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 타이밍이다. 이쯤 되면 티팟에 남은 차도 거의 막바지. 재즈가 흐르는 내부를 시끄럽게 물들인 중장년층 모임도 몇십 분 전에 해산했고, 남아 있는 건 가까이 붙어 앉아 밀어를 속삭이는 젊은 커플, 딱딱한 자세만 보면 아마도 소개팅 중인 것 같은 또 다른 커플, 손을 맞잡고 눈을 들여다보는 커플, 그리고 무슨 조합으로 모인 건지 모르겠는 남성 셋의 테이블 정도. 아마 다른 손님들이 보기에도 혼자 앉아 맥북을 두들기는 삼십대 초반의 여자는 뭘 하는 중일까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는 지금 단골 카페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중이다. 방금 티팟을 완전히 비웠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