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내가 식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이다. 어떤 음식을 먹는지, 어떤 장소에서 먹는지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통 어떤 상대와 식사를 하냐에 따라 맛의 기억은 바뀌기 마련이고 그날의 분위기 역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내게 있어 최고의 행복 중 하나는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요 근래 식사라는 것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에서 사람과 밥을 먹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가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지면서 혼밥을 자주 하게 되었고, 시간에 쫓겨 항상 '전투 식사'를 했다. 맛을 음미한다거나, 새로운 메뉴를 시도해보는 건 요즘의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편의점 김밥이나, 1인 식당 등을 애용하게 되면서, 마치 호주에 핫도그 빨리 먹기 대회에 나간 참가자 마냥 말 그대로 식사 '10분 컷'을 끊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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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나에게도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하게 된 기회가 생겼다. 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던 회사 사람과의 저녁 식사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같은 층의 가까운 자리에서 근무했던 때에는 용기가 없어 점심 식사 같이 하자고 말도 못 꺼내던 나였다. 하지만 나의 자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나서부터는 쓸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났고, 그분에게 저녁을 먹자고 말을 건넸다. 그리고 정말로 감사하게도 그분은 그러자고 승낙을 해주었다.
세상에 식당이 이렇게 많지만, 나와 그분을 위한 아주 적절한 식당을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 인지 몰랐다. 그분이 사시는 곳 근처의 나름 유명하다는 식당들을 동서남북 방위 별로 하나하나 찾아보았지만, 그 식당들은 웨이팅이 길다든지, 메뉴가 호불호가 갈린다든지 등의 저마다의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소주나 한잔하자는 나의 아재 취향을 절대로 그분에게 알려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종로의 탑클라우드 꼭대기 뷔페 디너를 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극과 극을 달리는 취향 사이에 서로가 만족할만한 합의점을 찾고 제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센스라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찾은 답은 양고기 오마카세 식당이었다. 내 나름의 기준으로 5점 만점 중 3점 이상은 되어 보이는 식당이었고, 이만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도 모르는 그날의 저녁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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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 1시간 전에 일찍 도착하여 식당에 가서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적고, 근처 카페에 가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분에게 가장 자연스럽고도 매력적으로 보일까 고민을 했다. 기다리면서 서 있는 자세부터, 말투, 어떤 방식으로 인사를 건네야 할지 하나하나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짜게 되었다. 이미 여기서부터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치 침을 삼키는 일을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했지만, 이 행위 자체를 의식하게 되면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처럼, 나의 태도나 자세 행동 모두가 어색해져 버렸다.
카페에 나와 홀로 기다리면서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의 실루엣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마치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한 구절 같은 시간이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너였다가 너 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의 실루엣에 쿵쿵대는 내 심장을 부여잡으며 기다리는 그 시간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조금은 늦게 나타난 그분은 모든 실루엣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언제나처럼 환하면서도 뭔가 쑥스러운듯한 미소를 건네며 다가왔고, 그 모습은 나에게 아직도 강렬히 남아있는 장면으로,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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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간 양고기 오마카세 식당은 생각보다 내부가 매우 좁았다. 바 형태의 식탁과 좁은 공간은 아직 말도 서로 놓지 못한 우리 둘 사이를 고려하면 썩 어울리는 공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옆에 바로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또 다른 불편한 느낌을 준다. 내 왼쪽 얼굴이 더 오른쪽 얼굴보다 더 못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그분이 내 왼쪽에 앉게 된 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최대한 사선으로 앉아서 위트 있는 이야기들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사 시작부터 꼬였다. 처음 보는 일본식(?) 그라인더가 있었고, 그 그라인더로 마늘을 잘 갈아 보이며, 앞으로 부엌에서도 유능하게 일할 수 있는 나의 매력을 어필해야 했지만, 그놈의 그라인더는 사용하기가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늘은 서툴게 갈려져 우리 둘이 찍어 먹어야 할 소스에도, 앞으로 있을 우리 사이에도 풍미를 더해주지 못했다. 내가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외에도 아까 말했듯이 식당 내부의 공간은 매우 좁았는데, 그분 왼편에는 남자분들이 앉게 되었다. 심지어 난 그것마저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쿨한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살아있는 질투의 화신이지만 오래 좋아했던 나의 아이돌 같은 그분 앞에서는 그런 티를 절대 내서는 안될 터였고, 속으로 식당의 작은 내부 공간을, 비싼 열정도의 임대료를, 코로나 시국에 자리 사이의 칸막이도 마련 안한 식당 주인의 방역지침에 대한 부족한 센스를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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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고기 맛은 기억도 안 난다. 아니 맛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모든 오감을 그분에게 신경 쓰느라 이것이 양고기인지 개고기인지도 몰랐고, 그분은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많이 드시지 않았다. 몇 술 뜨지 않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이번의 식당 선택은 완벽한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과 나의 바보 같은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하기 시작하자 의기소침해지기 시작했고, 식사와 곁들인 하이볼로도 나의 텐션은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분과 여기서 이대로 그냥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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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나온 거리는 한산했고, 불빛은 뭔가 슬프게 아름다웠다.
"맥주 한 잔이라도 하실래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 막혀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지 그때 깨달았다. 술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 탓일까. 나는 그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고, 그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코올 대신 카페인을 선택한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설프고 자신 없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건넸다.
"괜찮으시다면... 뭐 이 근처에... 커피 같은 거라도 한잔하실래요"
커피면 커피지, 커피 같은 거는 뭘까? 나는 새로운 음료를 창조하려고 했을까? 커피를 커피 같은 거라고 말하는 나 같은 거는 오늘도 또 다른 흑역사를 갱신하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흑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그분의 거절일 테고.
"제가 아는 곳 중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데가 있는데... 여기 어딘가 2층에 있을 텐데... 거기 가는 건 어떠세요"
머릿속에서 종이 딸랑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남들은 첫 키스를 할 때 들린다는 그 종소리가 나에게는 그때 들렸다. 아직까지 말도 놓지 못한 우리였지만, 그분의 저 한 마디에 70살이 되어서 이 분과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상상까지 머릿 속에 펼쳐졌다. 사랑은 액션과 리액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허접한 양고기 액션과 커피 같은거(?) 액션에 그 분은 맥주로 리액션 해주셨던 것이었고, 같은 회사 사람으로서 어려울 수도 있는, 카페인 대신 알코올을 선택한 용기 있는 그 분의 선택이 고마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동안 의미 없던 나의 식사시간이 이제부터 소중해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분이 말한 2층의 맥주집에는 화려한 네온 조명이 가득했는데, 마치 무채색이었던 나의 삶에 앞으로 다양한 색깔이 칠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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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높은 맥주집의 계단을 올라가며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식사는 '무엇'을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는 정말 좋은 저녁 식사 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