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편으로 이어진다는 나의 구직기는 마음속으로 이미 쭉 연재되고 있었다.
5,6,7월을 다 보내며 내게도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내 가슴속 손가락들은 '이렇게 써야지!' 하고 바삐 움직였으나 마음 속이라는 것이 함정이었다. 어쨌든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기 전 짬을 내본다. 그간 나의 일상과 구직의 노력을...
이후 셋째는 만 이틀간 열이 났고 (진단키트로 검사에는 음성) 3일째에 말끔히 털고 있어나 쌩쌩해지는가 했는데 이번엔 첫째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슬슬 제일 먼저 감기에 걸린 남편을 째려보게 되었다.
'여보세요! 아저씨!!!'
그렇게 토요일은 동네에 새로 생긴 무진장 넓다는 그 키즈카페에 데려가려고 표도 예약해 뒀는데...
우리는 그렇게 집콕을 시작했고 이렇게 조용히 우리의 주말을 보내는구나 하며 나도 모르게 안방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둘째가 내가 읽던 책을 가위로 아주 깜찍하게 작은 조각으로 마구 자르고 있었다.
"앗!!!"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 지르며 일어나 아이를 말리는데 밖에서 똑같이 잠들어버린(결국 애들끼리 놀고 있었었던 것인가!) 남편이 들어와 둘째와 실랑이하며 방을 나가다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건 팔이 빠진 거다.
그렇게 아픈 남편과 첫째, 셋째를 집에 두고 나는 자다 일어난 눌린 머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토요일 오후 4시, 동네 정형외과는 모두 닫았고 응급실은 멀었다. 그때 팔이 빠지면 자신에게 오라던 친정어머니 지인인 그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번뜩 생각나 엄마께 전화로 그분의 행방을 물었다.
다행인지 이미 퇴근하셨다던 선생님은 마침 병원 주변에 있으니 빨리 오라셨다.
얼른 차를 그 병원으로 몰아 아이를 안고 달려갔다.
마스크를 쓴 채 의사가운차림이 아닌 등산복 차림의 선생님에게 노상에서 아이를 팔을 맞추게 될 줄이야….
고맙게도 단 2초 만에 아이는 펑펑 울다가 갑자기 “안 아파.” 말하고는 시크하게 정색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집으로 오는 길...
팔 빠진 게 아닐 거라던 남편이 야속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팔이 빠졌을 때랑 아이 행동이 너무 비슷하고 부위까지 같아서 나는 바로 의심했는데, 역시 엄마는 이런 점이 다른 건가?
그렇게 부랴부랴 토요일이 가고 일요일 밤까지 쭉 아플 줄 알았던 첫째는 다행히 자기 직전에 열이 내렸고, 간이 키트로 코로나 음성이 떴다. 그리고 대망의 월요일 날이 밝자, 나는 빨리 이 세 아이들과 헤어져서 운동을 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주말 동안 밥만 해대고 나는 운동도 못했다며 다이어트 걱정에 체중계에 올라간 순간이었다.
막내가 성큼성큼 내 옆으로 오더니 바로 직진! 내 왼쪽 서랍 위에 있던 멀티탭을 당겼고 그 여파로 옆에 있던 벽돌사이즈의(그만큼 무게도 벽돌) 휴대용 배터리가 막내의 발등으로 떨어지며 튕겨나갔다.
하…
막내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고 나는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아이를 안고 일단 남은 두 어린이의 등원 후에 병원행을 결심했다.
시간이 급했으므로 미리 빼뒀던 레깅스에 운동복 차림으로 그냥 나섰다.
아이 둘을 등원시키고 쫄바지 차림으로 막내를 안고 간 동네 정형외과.
내가 일을 하면 애들이 이렇게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빨리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부모님들께서 대처해 주신다고 하면 발생할 수 있는 아쉬움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월요일 아침 정형외과 환자들의 대기만큼 너무도 진취적인(?) 나의 고민들도 길어지기 시작한다.
누가 취직이라도 시켜줬니? 왜 미리 고민해?
아이는 의외로 조금 덜 울고 발이 닿으면 "아파, 아파"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어린이집이 아니라 엄마와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당연히 수순으로 엑스레이를 찍었고 의사는 큰 골절은 없으니 미세골절 같다며 반깁스를 추천했다.
모자도 갑갑하다고 안 쓰는 아이에게 깁스라니 반깁스를 굳히고 붕대를 감는 동안 몸이 잡힌 막내가 울어댄다. 괜스레 눈물이 나왔는데 다행히 일주일 정도면 붙을 테니 풀지 말라고 괜한 걱정 말라는 식으로 간호사들이 덕담을 건넨다.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니 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일을 하지 말라는 신호인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하늘에 계신 분이 그렇게나 한가하실 리가 없다.
굳이 온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일해보겠다는 나 하나 말릴 리가.
능력을 썩히고 있다면 쌍수 들고 등을 떠밀어줘도 시원찮을 텐데.
신이 있다면 굳이 나한테 그럴 리가 없어.
일단 취직이든, 뭐든 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아.
선택하기 전에 혼자만의 에너지를 쓰는 건 옳지 않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병원을 나섰다. 고민은 취직을 하고 나서 하는 걸로!
라고 써두고 벌써 몇 개월이 지났던가?
해가 바뀌고 3월 말이 되었다.
과연 나는 취직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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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묵힌 글들이 벌써 여럿인데 글들마다 혼자 고민하고 생각한 흔적만 가득하다.
올해엔 짬이 나는 대로 애 셋, 워킹맘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업데이트는 언제?)
그렇다.
나는 작년 11월에 한 번(단 2개월의 기간제 공무원), 올해 두 번째(계약직)로 취업했다.
두 번 다 전에 일하던 분야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정규직은 아니어서 할 말은 없다. ㅎㅎ
엄청나게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이 업데이트도 안 되는 애셋맘 구직기에 응원을 보내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또 나와 비슷한 상황에 계신 누군가 일하고 싶은 엄마가 있었다면, 어쨌든 보이지 않았던 그 응원 덕분에 일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일하고 나니 일하기 전과 다른 또 여러 가지 고민이 가득하다. 그런 걸 나눠보려고 한다.
결혼하고 경력이 단절된 사람은 많고 그 단절을 끊고 세상에 나온 사람들의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에. 또 애 셋, 워킹맘의 정신없는 고단함을 글으로라도 남겨두지 않으면 내 마흔의 날들이 서른의 날들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신은 있었다. 그리고 굳이 나를 방해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내가 나를 오히려 방해했을지도.
(쓰고나서 다시 너무 거창해서 오글거린다. 누가 보면 대단한 일 하는 줄;; 고작 취업한 걸 가지고 ㅎㅎ. 그렇지만 5년 반을 육아하며 집에서 있었던 과거의 나는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다. 애들을 두고 뭘 한다니 상상이 안됐고 푹 쉰 나를 누가 써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때를 생각하며 기록을 남긴다. 언젠가 인생에서 또 절망할지도 모를 나를 위해서 지금의 내가 애쓴 흔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