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양_#8
지난 몇 년간 직장 상사에게 지독한 가스라이팅과 괴롭힘을 당했고, 멀쩡한 회사도 반강제로 퇴사했다. 결혼을 해도 모자랄 나이에 남자친구와는 서로 온갖 상처만 주고 헤어졌다. 그동안 목적 없이 달려오기만 한 나는 부정적인 생각의 관성에 매일 휘둘렸고, 온갖 걱정들이 내 어깨 위에 다시 올라앉는 걸 느꼈다. 그 짐들을 내려놓고 도망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을 가지기 위해 나는 달리기를 결심했다.
그렇게 그냥 무작정 양재천을 뛰기로 했다. 100일 동안 양재천을 달리기로 했다. 100일 뒤의 나는 어떨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때의 나는 딱히 그 뒤를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양재천을 뛰면서 100일을 채운다고 변하는 게 있을까? 진짜 내 어깨 위에 있는 탁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덜어낼 수 있을까? 더 망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지금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모르겠다. 내일도 모르는데, 100일 후를 어떻게 알겠어? 그리고 지금보다 더 망할 수가 있나? ’
그렇게 양재천을 달리려고 보니, 문득 그 옆으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때 나는 살고 있던 집의 짐도 다 정리하고, 이사를 핑계 삼아 그동안 있었던 안 좋은 일들도 그 집에 남겨두고 떠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결심에 ‘양재천 100일 달리기’라는 명분이 더해졌다. 나는 바로 집을 보러 갔다.
아직도 후덥지근한 9월의 어느 날, 부동산에 들어가 사장님을 만났다. 키가 작고, 굵은 파마머리에 검은색 조끼를 입은 사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그녀는 손가락에 낀 굵은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목소리는 짧게 잘린 파마머리만큼이나 단호하고 약간 거친 억양이었다.
“아? 그 전화했던 아가씨?”
퉁명스러운 말투에 잠깐 당황했지만, 나에겐 지난 과거를 버리고 양재천 옆으로 이사해야 한다는 미션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제 이 정도의 까칠함에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지난 2년간 받은 트레이닝이 있지 않은가?
“네, 안녕하세요. 양재천 옆으로 집 좀 보려고요.”
사장님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따라오라 손짓하더니, 부동산 문을 철컥 잠그고 나를 데리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녀는 걷는 내내 시선은 앞에 둔 채 마치 혼잣말처럼 빠르게 정보를 쏟아냈다.
“아가씨 이사 날짜가 언제야? 요즘 월세가 갑자기 많이 올랐어. 허긴, 언제는 뭐 월세가 내려간 적이 있나? 내가 여기 양재동에서 부동산 30년 했거든. 이 근처 내가 관리하는 집만 300군데가 넘어. 근데 월세가 너무 비싸. 계속 오르잖아, 안 그래?”
‘월세 비싸다고 하면 집 보러 온 사람이 계약 안 하지 않나? 좀 특이하시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장님은 말의 속도도 빠르고, 말투도 시니컬했다. 나는 얼른 이사할 집만 보고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몇 군데를 둘러보고, 그냥 마지막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오래 둘러볼 기운도 없었고, 그때는 원래 살던 집만 나오면 그뿐이었으니까.
부동산으로 돌아오자 사장님이 나에게 물었다.
“아가씨 직업이 뭐야?”
나는 얼마 전 퇴사했는데, 갑자기 직업을 묻자 당황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엉뚱한 대답을 해버렸다.
“저요? 저… 공무원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회사 그만두고 망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창피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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