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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기다리는 것들

by 소향

한때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라 믿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고, 꽃은 피고 지고, 사람들은 떠나고 또 돌아오니, 이토록 견고한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의 감정 따위는 금세 희미해질 거라 여겨졌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내 생각이 어느새 가장 오랫동안 기다리는 기다림의 문이 되었다.

기다림은 어느 특정한 사건이나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기다림이 수북이 쌓여 있다. 누군가의 안부일 수도 있고 어쩌면 한때 내가 놓쳐버린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하루가 저물 때면 나는 묻곤 한다. 지금 내가 그토록 기다리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내 유년이 살던 어느 시간의 한 순간이 있다. 겨울이 깊어갈 무렵, 나무들은 앙상했고, 마당 한편에서 강아지가 바람을 막아가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불을 햇볕에 널어두고는 얼음보다 차가운 물에 조용히 고구마를 씻었다. 그때 나는 마당 끝을 바라보며 저기서 누가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서 그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나는 그때부터 기다리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내가 성장했을 때에도 그 마음은 같이 자라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손을 놓고 돌아선 뒤에도, 어느 풍경 속에서 조용히 멈춰 선 뒤에도, 나는 줄곧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언젠가 다시 시작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삶의 특정되지 않은 일들 같은 것이다. 모두가 지났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도 늘 혼자 기다리고 있었고, 다시 피어날 조용한 기적의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기다림은 바람과 닮았다. 방향도 모르게 스며들어와, 때로는 나를 흔들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스쳐간다. 사람들은 흔히 ‘잊지 못함’을 기다림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단순한 미련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다림이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깊은 사죄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아직도 기다리는 것들 중에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훨씬 더 많다.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있는 약속들, 용서하지 못했던 순간들, 혹은 오해가 빚은 안타까운 얼굴들이 그렇다. 그 모두가 마음속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조용히 앉아 있다. 그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나는 결국 그들을 내 안에서 되살려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자리에 머무는 일이다. 세상이 지나가도, 시간이 쓸고 가도, 한 발짝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그건 어쩌면 가장 고독한 사랑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끝을 알 수도 없는 기다림이지만, 나는 그것을 나의 방식대로 품고 살아간다. 어떻게 보면 과거에 묶여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기에 내 마음에 품는 것이다.

어느 날, 낙엽이 지고 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람은 차고, 거리는 어두웠으며, 주머니 속에 있는 손은 빨갛게 온기를 배설해 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문득,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계절의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기다림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기다림을 안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이름을 놓지 못한 누군가를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미처 시작하지 못했지만 바라는 삶을 기다린다. 또 어떤 사람은 그저 자신 안에 고요히 피어나는 마음의 짐이 해결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오래 품을 수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잊혀진 안부를 기다리고, 누군가의 조용한 뒷모습을 기다리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내일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나를 온전히 완성되지 못하는 나를 기다린다. 언제쯤이면 지금의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지나간 모든 시간을 품고, 나 자신에게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괜찮았다고, 잘 버텼다고'

기다림이라고 해서 모두 등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다림 그 자체가 살아있는 활력소가 되고 증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조용히, 아주 오래된 것들을 기다린다. 누구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는 내 안의 등불 하나를 잘 살려 이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면, 쉽지 않은 많은 일들 가운데 결국은 기다림이 가장 큰 힘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든, 나를 향한 믿음이든, 그 모두가 나를 조금씩 살아 있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이제는 놓아야 할 때'라고,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어떤 기다림은 놓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기다림 안에서 나는 매일 조용히 간직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이름을 위해, 잊혀진 얼굴의 온기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는 나를 위해서 말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가슴에 담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들과 함께 숨을 쉬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소중한 하루가 되기 때문이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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