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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일에 대하여

by 소향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 한쪽에는 조용한 그림자가 자란다. 처음에는 연약한 선 하나였는데, 시간이 쌓이며 굵어지고, 그 속이 비어 있던 공간에는 바람과 먼지가 쌓인다. 그 그림자 속에서, 기다림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사람은 끝이 없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끝이 오면 허무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쪽도 믿지 않기로 해 본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가 내게로 오거나, 혹은 내가 그 자리를 떠나거나 하는 순간일 것이다.

떠나는 일보다 어려운 건 머무는 일이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보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다그치고 있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새로움을 향해 가라고 한다. 하지만 기다리는 자리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세상의 리듬과는 조금씩 다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히 스쳐가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빛이 기울어지는 속도를 느껴본다. 이런 느림 속에서만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 해가 지나고 다시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었고, 가지 끝은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다 멈춘 손처럼 허공에 서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머무는 일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이 한 자리에 닻을 내리는 일이며, 머무는 것은 그 닻을 스스로 지켜내는 일이다.

머무는 동안 세상은 변한다. 사람도 변한다. 어떤 기다림은 처음 품었던 빛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머무름 속에서 서서히 다르게 빛나는 것도 있다. 처음엔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다림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나보다 먼저 이 자리에 와 있던 것이 내 이름을 부르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막연히 차오르는 예감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듯한 익숙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기다림은 머무름과 닮았다. 어쩌면 기다린다는 것은 결국 내가 나 자신과 다시 마주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을 핑계 삼아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다.

머무름에는 고통도 따른다. 움직이지 않는 동안 세상은 내 어깨 위에 먼지를 쌓아놓고 마음의 표면을 무겁게 누른다. 그리고 그 무게가 나를 주저앉히는 순간이 돼서야 나는 비로소 발아하는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작은 씨앗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일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여도,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순간이다. 머무는 나날이 쌓일수록 마음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변화가 발아하듯 일어난다.

어느 해 초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늘 오가던 길에 서서 발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 눈송이들이 처음에는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까맣게 보이며 점점 커지며 하얗게 변해 천천히 얼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회상의 순간을 통해 기다림은 언제나 무언가를 데려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계절이든, 혹은 오래 잊었던 나 자신의 목소리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머무른 자리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사람들은 기다림을 싫다며 빨리 끝내려 한다. 그러나 끝냄 보다는 머무는 사람은 알게 된다. 끝이라는 것은 기다림의 대척점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언가를 기다리다 보면, 결국 그 기다림이 나를 길러내는 일로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머무는 시간을 통해 나는 더 평온해지고, 더 오래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머무는 일은 용기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떠나는 건 선택이지만 머무는 건 결심이기 때문이다. 그 결심 속에서 나는 매일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낮의 밝음과 밤의 적막을 측량하며 산다. 그리고 언젠가 기다리던 것이 오든 오지 않든, 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을 온전히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날이야말로 기다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며 또 다른 시작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평온하게 하루 속에 머문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그러나 어제와 다른 마음을 준비하고서 내일을 바라본다. 머무는 동안 내 세포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바람과 빛과 그림자를 조금 더 오래 품어본다. 그렇게 머무는 순간을 통해서 조용한 기다림을 계속 이어가 본다. 그것은 여전히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힘이며, 내가 나 자신을 잃지 않게 붙드는 한 줄기 닻줄이기 때문이다.

머무는 일은 결국 기다림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사랑은 언젠가 내가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밝게 비춰줄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숨 쉬며, 기다리는 나를 향해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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