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사랑에 빠진 이를 두고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고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속담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실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던 사람이 눈부시게 빛나고, 분명한 결점조차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 순간에는 다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불리한 약속이나 계약조차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연인만이 유일한 중심이 된다. 이른바 ‘콩깍지’는 단순한 시각의 변화를 넘어, 사고와 판단의 방향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종종 사랑에 취한 이의 선택을 두고 “정신이 나갔다”거나 “판단력이 흐려졌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정말로 우리를 심신 미약 상태에 빠뜨리는 것일까?
드라마 속 변론과 법의 잣대
최근 방영된 드라마 '에스콰이어'는 이 질문을 극적으로 다뤘다. 한 여성이 연애 시절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교묘한 방식으로 작성된 동의서 때문에 법적 대응이 막힌다. 변호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랑은 심신 미약이다. 정상적 판단이 어려운 상태에서의 동의는 무효다.” 드라마의 대사지만, 어쩐지 설득력이 있다.
법은 이성을 전제로 한다. 계약은 자유의지에 따라 맺어지며, 서명은 그 자체로 법적 책임을 남긴다. 그러나 사랑의 영역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 순간의 동의가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판단력을 잃은 상태에서의 착각이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뇌과학이 말하는 사랑
실제로 심리학과 뇌과학은 '사랑=심신 미약'이라는 주장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연구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연인과 관련된 정보에는 탁월한 기억력을 보이지만, 그 외의 정보에는 오히려 소홀해진다. 인지 자원의 대부분을 연인에게만 쓰기 때문이다.
주의력 또한 달라진다. 중요한 일에는 몰두하지만, 불필요한 자극을 걸러내는 능력은 떨어진다. 언제 올지 모를 연인의 연락을 기다리느라, 늘 주의가 분산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남성의 경우, 사랑에 빠지면 오히려 공감 능력이 높아진다는 연구도 있다는 사실이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무의식적으로 강화되는 것이다.
사랑, 예술 그리고 무아지경
이쯤 되면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비합리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은 차갑게 이성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은 본능과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법적 동의서 한 장은 평소라면 무게 있는 서류지만, 사랑에 취한 사람에게는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랑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이런 상태로 만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음악에 빠져 연주하는 순간, 화가가 붓질에 몰두하는 순간, 관객이 예술 작품 앞에서 숨조차 멈춘 듯 서 있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그것을 '무아지경'이라 부른다.
무아지경의 순간에는 자기 경계가 허물어진다. 계산은 뒤로 밀려나고, 오직 대상과의 일체감만이 남는다. 사랑의 콩깍지가 연인을 중심으로 세상을 좁히듯, 예술적 몰입은 온 세상을 지워버리고 한 점에만 마음을 모으게 한다. 사랑과 예술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다. 둘 다 인간을 ‘합리적 존재’에서 벗어나게 하고, 기꺼이 불합리를 선택하게 한다. 손해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만큼은 손해마저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사랑과 술, 본질의 차이
'심신 미약'이라는 법적 개념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사랑보다 술에 취한 상태다. 둘 다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게 만들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사랑은 감각과 감정을 고도로 증폭시키는 힘을 가진다. 연인에 대한 기억력은 더없이 뛰어나고, 작은 표정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세상의 다른 것들은 흐릿해져도, 사랑하는 대상만큼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즉, 특정 대상에 대한 집중력이 극도로 높아지는 상태다.
반면, 술은 감각과 감정을 둔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알코올은 뇌의 기능을 억제하여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기억력 또한 손상시킨다. 술에 취한 사람의 행동은 외부 대상에 대한 몰입보다는, 통제력을 잃고 충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가깝다. 평소 숨겨두었던 공격성이나 취약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법적 해석의 중요한 차이가 발생한다. 술은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초래한 상태이기 때문에, 심신미약이 인정되더라도 책임을 완전히 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랑은 누가 사랑에 빠지기로 의도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랑은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시작되는 감정의 영역이다. 따라서 법의 잣대로 ‘사랑으로 인한 심신 미약’을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삶을 지탱하는 힘
결국 우리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은 이성의 차가운 계산이 아니다. 사랑과 몰입,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사랑은 때로 우리를 심신 미약 상태로 몰아넣는다. 예술적 무아지경 또한 일상적 합리성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삶의 깊은 의미와 행복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이의 눈빛 하나에 하루가 달라지고, 한 곡의 음악에 가슴이 요동친다.
삶이란 결국 이런 순간들을 이어가는 과정 아닐까.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따뜻하고, 예술적 몰입이 있기에 세상은 풍요롭다.
사랑은 심신 미약일까? 아마도 그렇다. 하지만 그 심신 미약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상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