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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루하 Oct 30. 2024

멀어지려는 미소와 다가오는 명호

14화

맥주 서너 캔을 마시니 잠이 솔솔 왔다. 미리 문을 닫고, 차 문단속 마친 후에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소나기였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기 전부터 벌써 여름을 즐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먼저 아침부터 챙겨 먹고, 설거지 거리를 가지고 샤워실로 향했다. 모든 것을 마치고 차로 돌아왔을 때 반가운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오명호.


멀리서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던 걸음을 멈출 만큼 그의 대한 존재감은 확실했다. 나를 향해 돌아섰으면 하고 싶은 마음과 돌아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게 부딪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못 본 척을 해야 할까? 지금 그를 만나는 것은 도박이었다. 그러나 생각도 정리하기 전에 그가 내 쪽을 향했다.


비가 오는 것도 모르는지 멈춘 내게로 걸어오는 모습이 인상 깊게 뇌리에 박혔다. 마치 어떤 것도 나에게 오는 길은 막을 수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은 전장에 나가는 전사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한들 받아줄 수는 없었다. 우린 서로 가까워졌지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걸어오는 그와 달리 내 시선은 그 시선 너머에 있었다.


드디어 몇 발자국 서로 앞에 두 세발 자국이 남았을 때 그는 자리에 멈췄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그를 스쳤다. 어깨가 스치는 것만으로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 역시 조금씩 빨라지던 심장이 최고조에 향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영원 같았고 지나는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그 눈빛 하나로 ‘보고 싶었다’ 한 마디를 가득 담고 있어 하마터면 지나지 못하고 멈출 뻔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는 비가 오는 밖에서 나는 차에 있었다.


“어젯밤에 당신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우연한 발걸음에 ‘명호 씨’라는 말이 들렸어요. 듣자마자 ‘아, 당신이구나’ 싶었죠. 텐트의 조명으로 보이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바로 당신께 가고 싶었지만, 사실 용기가 없었죠. 그런데 오늘 아침에 문득 이대로 당신 놓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달려왔어요. 저 받아주면 안 돼요? 당신도 나 생각했었잖아요?”


물론 생각했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멈출 수가 있을까? 아파한다고 사라질 그런 기억도 아니고, 떨쳐내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데 별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저 사람은 미련처럼 붙잡았다.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받아줄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떨 때는 솔직함이 가장 큰 무기가 되는 법이니까.


“저와 있으면 당신은 불행해져요. 그러니까 가세요. 저를 찾지 말아요.”

“아뇨. 당신은 불행의 아이콘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당신을 아프게 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제게 당신은 천사이고, 행복의 아이콘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제게 와요. 제가 당신 손 절대 놓지 않을게요.”

“놓고 안 놓고 문제가 아니에요. 저는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는걸요.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을 해요?”

“제가 가르쳐줄게요.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줄게요. 그러니까 마음만 열어줘요. 아니면 제 손이라도 잡아요. 그거면 돼요. 네?”


간절했다. 너무 간절해서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가 그의 손을 잡을 뻔했다. 하지만 문을 잡는 순간 멈췄다. 아닌 건 아니다.


“가세요. 관리동에 전화하기 전에 가세요.”

“제발요. 한 번만 날 믿어봐요. 네?”


커튼 너머 보이는 그는 내리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매달리고 있었다. 레이스 커튼 너머로 그의 표정이 너무 잘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저를 힘들게 하지 말아 줘요. 정말 저를 좋아한다고 한다면 제발 가줘요. 당신이 이러면 제가 너무 힘들어요. 저는 단 한 번도 엄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도 좋아해 본 적도 없어요. 당연히 믿는다는 것도 없죠.”


이 말을 하면서 양심에 찔렸다. 요즘 은하와 팀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자와의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닐까? 내가 그들을 믿는 것과 남자의 마음을 믿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왜 힘든 사랑을 하려고 해요. 당신 좋다는 사람 많다면서요? 그러니까 그 사람과 만나요.”

“저한테 관심도 없다면서 제가 말한 건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해요?”


뜨끔했다. 하지만 반응하지는 않았다. 


“제게 말 걸어온 사람이 당신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뇨. 당신이 제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 마음에 더 이상 거짓말하지 말아요. 당신도 분명 나를 좋아하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제발 인정해 줘요. 인정만 해줘요.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네?”

“저는 인정하지 않아요. 당신 생각한 적도 기억한 적도 없어요. 어젯밤은 당신이 분명 잘못 들은 거예요.”


이젠 나도 알았다.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불행의 삶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하아. 어떻게. 인정하고 말았어. 엄마, 어떡해? 나 어떡하면 좋아. 저 사람 좀 보내줘. 제발 저 사람 좀 가라고 해. 엄마. 나 저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엄마도 한숨을 쉬었을까?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엄마라면 말이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눈물이 났다. 결국 나는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에 설치된 텐트의 지퍼를 여는 순간 그를 볼 수 있었고,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안았다. 울고 있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주면서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고마워. 나온 것만으로 충분해요. 당신 얼굴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저는.”

“윤미소예요. 당신 아니고, 윤미소라고요.”

“윤. 미. 소.”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며 웃었다.


“이거면 충분해요. 미소 씨.”

“당신보다 5살이나 어려요.”

“누나였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은 변함없었을 거예요. 사랑에 나이는 걸림돌이 안 되거든요.”

“후회할지도 몰라요.”

“후회하지 않아요.”


한결같이 푸른 소나무처럼 그의 대답은 변함없다.


“미소 씨. 다시 한번 말해요. 당신을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당신은 제 마음만 알아주면 돼요. 당신 마음에 반하는 행동만 하지 말아요. 그거면 돼요.”


반년이었다. 그와 만나고 반년 만에 다시 그의 고백을 들었다.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긍정도 부정도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제 말대로 해줄 거면 고개만 끄덕여 줘요.”


시키는 대로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표정이 점점 밝아져 오는 것을 보면서 웃었다. 


“그렇게 웃어요. 항상 웃게 해 준다는 약속은 못하지만, 최대한 당신 웃게 제가 노력할게요. 아니 울어도 돼요. 저한테 기대서 울어요. 제가 위로해 줄 수 있게 제 곁에서만 울었으면 좋겠어요. 식상한 말인 거 알아요. 하지만 사랑은 그렇게 유치한 거예요. 특별한 사랑은 없어요. 단지 스스로 특별하다고 여기면 되는 거예요.”


진지한 그의 표정은 어른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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