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나는 교양 수업 하나를 듣게 되었다. 강의명은 <사랑과 죽음>이었다. 사랑과 죽음이라, 이 얼마나 철학적인 수업인가? 사실 이 수업을 듣게 된 진짜 이유는 강의 내용은 쉽고 학점은 잘 주는 이른바 ‘꿀강’이라고 해서 듣게 된 것이었다.
수업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들. 사실 수업을 들은지 너무 오래돼서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시간이 지나도 이 수업의 중간 과제만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 수업은 레포트로 중간고사를 대체한다.”
나이스! 교수님의 한 마디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벼락치기로 허겁지겁 공부해서 허탈함만 남게 되는 시험보다는 오랫동안 천천히 준비할 수 있는 레포트가 나는 훨씬 더 좋았다. 시험도 꾸준히 공부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은 제발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벼락치기를 하는 것은 놀면서 공부를 미뤄서가 아니다. 벼락치기가 시간별 공부 효율이 극대화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 안 믿는 것 같은데? 아무튼 진짜다!
하지만 이어지는 교수님의 말은 당혹 그 자체였다.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의 주제는 바로 부모님과 영화 한 편 보고 두 장의 감상문을 써오는 것이었다. 차라리 사랑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 고찰을 10페이지 분량으로 써오라고 하시지! 부모님이 대서양에 표류하고 계신 것이 아닌 이상 모두 과제를 해오라는 교수님의 말을 끝으로 그 날 수업은 끝이 났다.
우리 가족은 다섯 가족이지만 그 다섯 명이 온전히 다 모인지가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대학에 붙었을 때? 아니면 고등학생 때? 그것도 아니면 훨씬 더 전? 레포트 과제를 하며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거의 1년만에 보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
학창시절 우리들의 교육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는데 나는 엄마가 유독 나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기분을 항상 받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숙제하고 있으라며 장을 보러 가신 적이 있었다. 두 분이 돌아오셨을 때 나는 할 일을 끝마치고 동생은 티비를 보느라 숙제를 덜 한 상태였는데 엄마는 동생을 다섯 대, 나를 여덟 대 때리셨다. 동생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0년도 훨씬 더 된 얘기지만 아직도 그때의 서러운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엄마는 내가 장녀의 몫을 다해 부모님껜 든든한 지지자, 동생들에겐 존경스러운 언니, 누나로 있어주길 바라셨다. 내 본가는 포항인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주에 지진이 났었다. 꽤나 규모가 큰 지진이었기에 그 여파는 포항까지 몰려와 한 밤 중에 야자를 하던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뛰쳐나왔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학교는 교내 전자기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어 핸드폰을 모두 제출했었는데, 그 때만큼은 선생님들이 교무실에서 아이들의 핸드폰을 모두 가져와 가족들에게 연락하라는 명목으로 돌려주셨었다.
하지만 나는 고3때 공부한다고 핸드폰이 없었기에 가족에게 연락을 할 수 가 없었고, 그렇다고 겁에 질려 울며 부모님과 통화하는 다른 아이의 핸드폰을 섣불리 빌려달라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당시 기숙사생이었는데 나와 함께 방을 쓰는 룸메이트 친구가 너희 어머니께 전화왔다며 급히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이 없는 나로서는 문제집 구입 등의 문제로 엄마께 연락을 드릴 때 피치 못하게 룸메이트의 핸드폰을 빌려 사용했었는데, 그 때 아마 엄마가 친구의 번호를 저장해 놓으셨던 모양이었다. 엄마 성격상 이런 일로 괜찮냐는 말을 하실 분이 아닌데 사실 그 때 굉장히 기뻤다. 엄마가 나를 걱정해서 친구를 통해 전화를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의 엄마는 뜻밖에도 괜찮냐는 걱정 대신 수시 원서를 낸 대학에 제출해야 할 서류 내역을 물으셨다. 당시는 수시 원서 제출 기간이라 아이들이 이제 막 자소서를 최종 수정하고 있을 때였다. 다른 아이들은 울면서 부모님과 서로 괜찮냐는 말을 주고 받는데 이 소란 속에서 대학에 제출해야 할 서류가 무엇이냐 묻는 우리 엄마가 너무 대조되어 내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속상함과 서운함을 넘어서 엄마가 밉고 원망스러웠던 것 같다.
지금 위에 말한 것은 내 기억 속 몇 부분일 뿐이지만 살면서 엄마가 미웠던 적은 굉장히 많았다. 엄마는 내가 커갈수록 당신과 친구처럼 지내길 원하셨지만 나는 성장할수록 엄마가 점점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는 엄마와 함께했다.
외할아버지 팔순 잔치 기념으로 외갓댁 식구들이 모일 기회가 있었고, 그 때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사실 심적으로 더 편안한 것은 아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락할 일이나 얼굴을 뵐 일은 엄마가 훨씬 더 많았다.
가족 행사가 아닐 때 따로 시간을 내어 본가에 내려가 찾아뵐까 했고, 과제를 내주신 교수님의 의도도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조금 솔직해지자면 나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내 돈과 시간을 쓰며 멀리까지 가 부모님과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정이 없어진지는 오래이고, 그래서 이 과제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영화는 공효진 주연의 <도어락>을 보았다. 사실 장르가 스릴러이니만큼 부모 자식간의 정을 나누고 소통하기에는 꽤나 부적절한 영화라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나고 엄마는 너무 잔인하다고, 영화 잘못 골랐다며 팔짱을 낀 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았을 때는 아마 중학생 때인 것 같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국제시장>이었나. 그 때까지도 엄마와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나름대로 엄마와의 사이가 많이 발전했다. 상담도 받아보고, 개인적 마인드 컨트롤의 결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때 당시 내가 느낀 엄마와의 심리적 거리는 그렇지 못했다.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를 본 후의 우리 사이는 건조했다. 꼭 과제 때문에 보는 것은 아니고 그 영화가 보고 싶어서 영화관을 간 것이었지만 정말 영화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상영관을 나서는 엄마와 나를 다른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모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평범하지만, 어쩌면 평범하지 않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친구들이 내 주변엔 생각보다 많았다. 친구들이 엄마와 장난스레 농담을 주고 받으며 통화하는 것을 지켜볼 때면, 나도 자연히 부러운 기분이 들고 나 역시 엄마와 그런 사이로 발전하고 싶었다.
영화가 끝난 후 조수석에 앉아 쳐다본 운전하는 엄마의 옆 모습은 확실히 오랜만에 봬서 그런지 세월이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은 삭막했으나, 시간이 아주 흘러가 버리기 전에 엄마와 친구가 되는 상상을 창 밖으로 그려보았다. 과제를 하는 그 때 당시는 엄마와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