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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Oct 14. 2021

아이 보다 내가 우선인 엄마

워킹맘 다이어리

최근 재혼해 둘째를 출산한 방송인 K씨가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아이에게 올인하지 않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아이를 위해 희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방적인 희생을 몸소 경험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므로, 무어라 반박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조금 이상했다. "그럴 거면 왜 낳았냐." 무조건적인 헌신과 일방적인 희생 없이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래서일까. 좋은 댓글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상에 부모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무책임한 일들을 벌이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니, 아예 안 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비난받을 말은 또 아니지 않는가. 


며칠 전 비슷한 인터뷰 내용이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에 댓글들을 읽은 적이 있다. 방송인 Y씨의 인터뷰 기사였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두 아들이 아니었다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에는 "저는 제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어감과 맥락의 차이가 작용했겠지만, 난 되도록 많은 부모들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목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부모가 아이보다 나를 우선 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부모들의 다양한 생각과 행동들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가 되길 바란다. 


Y씨의 인터뷰 기사 내용을 읽다 보면 정상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아빠와 엄마, 아이가 있는 가족이 정상 가족처럼 비쳐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가족도 많거든요." 실제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정상가족 프레임을 볼 수 있다. 아이가 보는 동화책과 만화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큰 건 아빠, 작은 건 엄마. 파란색은 아빠, 분홍색은 엄마. 직장인은 아빠. 가정주부는 엄마.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이런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깨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해오고 있지만, 가장 먼저 달라져야 할 것은 '아이들의 볼거리'다.



헌신과 희생. 그런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없는 고결한 정신임에는 틀림없다. 


희생 희犧, 희생 생牲. 희생

두 한자 모두 부수로 소우(牜) 자가 있다. 소는 평생 우리에 갇혀 살고, 여물을 먹고 밭을 갈다가 도축당한다.


드릴 헌獻, 몸 신身. 헌신

몸과 목숨을 다한다는 의미의 헌신이라는 단어. 

희생과 헌신. 두 단어 모두 목숨을 걸고 한다는 전제로 한 단어들이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이를 만난다. 의료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임신과 출산은 목숨을 담보로 한 과정이다. 이미 희생과 헌신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그 터널은 육아에서도 계속 된다. 출산 후 3개월도 안 되어 복직. 아이들이 접하는 볼거리 그 어디에도 없는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날. 나는 출근 첫날 스스로를 '핏덩이를 두고 나간 매정한 엄마'라고 자책하며 출근길에 소리내어 울었다. 일터에서도 cctv로 아이가 베이비시터 선생님과 잘 있는지 확인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을 못 믿어서라기 보다 스스로를 못 믿었던 마음 때문에 더 자주 cctv를 들여다보았던 것 같다. 


복직 전에 남편과 복직시기를 두고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3개월만 휴직을 내라.", "누구는 휴직하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아냐." 그 핏덩이가 벌써 세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편과 나는 각자의 입장 차이로 분분하다. 오늘도 근무 중에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린이집에서는 당연하게 엄마를 찾는다. 휴대폰에 어린이집이라는 단어가 뜨는 순간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아프구나. 데려가야 하는구나.' 2주 전에도 열감기로 조퇴를 했는데, 또 열감기란다. 지금은 둘째까지 임신하고 있어 병원 진료로 휴가를 쓰는 일이 잦은데, 벌써 아이 때문에 3년째 단축근무 중인 것을 감안하면 회사에서 눈치를 안 줘도 스스로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땐 꼭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남편의 얼굴은 얄미우면서도 짠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아주 당연하게 내가 도맡는 것이 화가 나다가도 업무에 치이는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면 짠하기도 한 것이다. 이런 복잡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볼멘소리를 한다. "다음에는 여보가 데려갔으면 좋겠어." 그러면 남편은 자동응답기처럼 이렇게 말한다.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할까?" 


남편은 익숙하고 당연하다는 듯 어머님이란 존재를 찾는다. 나라고 딱히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지금 상황에선 어머님 외에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는 이름으로 또 누군가의 엄마라는 존재를 공용의 존재로 소진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직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싶다가도, 그렇게 대단한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닌데 일하는 것이 이렇게 버거운 일이 되어야 할까 싶다. 초등학교 들어가면 그때가 정말 워킹맘들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라고들 하는데, 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밥 먹듯이 해도 되는걸까. 뱃속에 있는 둘째까지 생각하면 머릿속은 온통 기우로 가득하다. 

 

앞조카 뒤딸 


"그럴 거면 왜 낳았냐." 이 말이 꼭 나에게 달린 악플 같다. '내가 바로서야 아이가 바로 선다'는 그 말을 뒤집어서, '내가 살아야 아이가 산다'로 바꿔 읽는다. 어린이집 하원 하는 순간에도 신발장에 남은 신발 개수를 새어보는 습관이 있다. 작디 작은 신발들을 보다가 주책 맞게 눈물이 고인다. 내가 나인 것은 알아도, 내가 어떤 엄마인지, 내가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 건지는 여전히 모른다.   


"너무너무 잘하고 있어요." tv 너머로 들리는 오은영 선생님의 한마디 말에 또 왈칵 눈물이 고인다. 아이를 낳고 나는 울보가 되었다. 얼마 전, 방송인 S씨의 내담 내용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인데, 아이가 최우선인 엄마도 어떤 것이 정답인지 몰라서 탐구하고 자문한다. 애청하고 있는 육아상담 프로그램을 보면서 늘 생각한다. 우리 모두 성심을 다해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것이라고. 사회가 개인이 갖는 고민의 무게를 대신 짊어질 수는 없더라도, 존중해주기를 정말 원하고 있다. 무 자르듯이 반듯하게 반반 육아는 할 수 없더라도, 고민의 흔적이 남편에게도 있기를 바란다. 다행이다, 브런치라도 있어서. 이렇게 활자로라도 하소연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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