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하지 못해 미안해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옛날 드라마 속의 한 장면. 무스로 한껏 세워 촌빨이 작렬하는 닭벼슬 앞머리에 빨간 립스틱의 아가씨가 샛노란 미니스커트를 입고 껌을 소리나게 딱딱 씹으며 시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다방 커피 배달을 가고 있다. 그 뒤에서 노점상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걸진 목소리로 소리친다.
"아따 망할 가시내. 누구를 꼬셔뿔라고 그리 '히푸짝'을 씰룩쌜룩 흔들고 다녀쌌냐! 궁뎅이 좀 작작 흔들어라. 썩을 년."
강렬했던 그 장면으로 인해, 힙(hip)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제일 먼저 연상하는 나는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신조어를 처음 들었을 때, 당최 이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 무슨 뜻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문자 궁뎅이? 글 엉덩이? 이건 뭔 '강아지 야옹, 고양이 멍멍' 같은 맥락 없는 만남인가. 라고 생각하던 중.
Hip 미국∙영국[hɪp]
1. (허리와 다리가 만나는) 허리께[골반 부위]; 둔부, 엉덩이; 고관
2. 엉덩이가 …한
3. 유행에 밝은
출처: 옥스퍼드 영한사전
옥스퍼드 영한사전의 세번째 뜻에 따르면 hip은 형용사로 '유행에 밝은, 트렌드에 민감한'라는 의미이다. 요컨대 '라떼'는 '쿨(cool)하다'라고 하던 것을 요새는 '힙(hip)하다', 즉 '세련되고, 멋지다'라고 한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텍스트힙(Text Hip)'의 뜻을 이해했다.
'텍스트힙(Text Hip)'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힙하다(Hip, 멋있다', '개성 있다)'를 합성한 신조어로, ‘독서 행위가 멋지고 세련된 활동으로 인식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특히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MZ세대들은 독서를 단순히 책을 읽는 취미 활동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SNS에 독서 중인 사진, 인상 깊은 문구를 공유하며 자신의 지적인 매력을 표현하는 도구이자 자기표현과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라고 한다. 올헤 서울에서 열린 도서전이 미어터졌다고 하더니, 이유가 있었네. 그런데, 단어의 뜻을 찬찬히 읽어보니 '힙'한건 '텍스트' 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책을 읽는 것'이 힙한 게 아니라 '책을 읽는 나의 모습'이 힙하다는 거구나. 그럼 '텍스트힙(Text Hip)'이 아니라 '텍스트 리딩 포토 힙(Text Reading Photo Hip)'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MZ 세대가 보기엔 시조새 격인 X세대 아줌마가 쿨하지 못하게, 아니지.. 힙하지 못하게 꼰대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어른들로 가득한 이 시대에 이렇게라도 책과 친해지다 보면 책읽기를 진짜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면 어릴 때부터 책을 장난감처럼 바닥에 깔아주고 그 위에서 놀게 하라는 육아 고수의 조언은 이미 클래식이 되었으니.
장중딩 꼬꼬마 시절에 나도 그랬다. 이 아이를 기필코 '책 읽는 어른'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하에 '알집 매트' 대신 그림책을 깔아 두고 그 위에서 뒹굴거리게 했다. 그렇게 꼬꼬마장은 '달님 안녕'을 왼발로 딛고,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를 오른발로 밟으며 징검다리 놀이를 하듯 겅중거리다가, '강아지 똥'을 깔고 앉아 '구름빵' 한 귀퉁이를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놀았다. 수업하고 돌아와 목이 쉬어버린 날에도 엄마 올 때까지 안 자고 눈이 말똥한 녀석을 겨드랑이에 끼고 앉아 안 그래도 쉬어버린 목소리가 완전히 맛이 가도록 늦게까지 책을 읽어주었다.
이렇게 자란 장중딩은 된 지금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청소년으로 자랐....으면 참 좋았겠지만 , 생은 늘 그렇듯 맘대로 되지 않는다. 녀석은 '게임하고 싶으면 책 읽어라' 하는 에미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반강제로라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한' 중딩이로 성장했다.
독서 습관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 평생의 숙제이다. 하물며 요즘같이 책 말고도 보고, 듣고, 읽고, 즐길 꺼리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진짜 '애서가'가 되는 건 어쩌면 '책 써서 부자가 될 확률'보다도 낮을지도 모르겠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5/09/17/QYW6GSHMOBBILNU4MEUHSZDURY/
얼마 전 서울 청담동에 오픈한 루이뷔통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었다. 배경으로 쓰인 사진에서도 보이듯 전면의 높은 천장이 온통 책꽂이로 가득 찬 인테리어가 텍스트 힙의 유행을 보여준다고 한다. 오픈하자마자 이미 3개월치 예약이 다 찼다고 하는 이 카페에서 파는 만두는 세 알에 4만 8천 원이다. 만두피의 겉면에는 루이뷔통의 로고가 촘촘히 박혀있어 이걸 먹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 만두의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먹기 아깝다는 평을 한단다.
책을 쓰는 작가들은 여전히 가난한데, 가장 화려하고 '럭셔리'한 곳에서 책은 공간을 채우는 소품으로 쓰이고 있다. 루이뷔통 만두 세 알을 먹기 위해선 대체 책을 몇 권을 팔아야 하는 거냐. 이곳에서 만두의 예술성을 논하는 이들이 저기 손도 안 닫는 높은 곳에 꽂혀있는 책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지언정, 책장에서 꺼내어 책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에 나의 손모가지... 까지는 아니고 루이뷔통 로고가 찍힌 만두피 100장을 걸겠다.
장중딩이 다니는 수학학원의 원장님이자 나의 인생 멘토, 교육 멘토이기도 한 '장연희 소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이큐(IQ), 이큐 (EQ) 아무리 높아도 엉큐 높은 아이를 따라갈 수는 없다.'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고 앉아 집중하는 힘을 의미하는 '엉큐'는 꾸준한 노력과 집중력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야말로 '힙의 힘'이다.
다시 엉덩이(hip)로 돌아온 김에, 단모음 hip( 힙)과 비슷한 발음의 이중모음 heap (히입~)은 명사로는 '쌓인 더미', 동사로는 '쌓아 올리다'를 의미한다.
heap 미국∙영국 [ hiːp ]
[명사]
1.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더미[무더기]
The building was reduced to a heap of rubble.
그 건물은 부서져 깨진 돌무더기가 되어 버렸다.
2. 많음
There’s heaps of time before the plane leaves.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시간이 많아.
[동사]
3. (아무렇게나) 쌓다
Rocks were heaped up on the side of the road.
도로가에 암석들이 마구 쌓여 있었다.
책 한 권을 읽고 그 속에서 건져 올린 단 한 문장이라도 내 것으로 체화한다면,
그로 인해 나의 삶이 조금이라도 가치 있어지고 좋은 쪽으로 변화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짜 멋진 일, '텍스트힙'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텍스트 읽기가 의미 있는 경험이 되기 위해선
진득하게 힙(hip)을 붙이고 앉아 책의 내용을 찬찬히 음미하며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고 거기에 나의 사유를 연결, 확장하는 시간을
오래도록, 꾸준하게 힙(heap) 해야 한다.
책이 가득 찬 책꽂이를 배경으로 앉아,
밑줄이 잘 보이도록 펴놓은 페이지를 찍거나,
명품 만두만 씹는다고 힙해지는게 아니다.
그저 내 힙이 푸짐해질 뿐.
'텍스트 힙'이라는 이상한 신조어 말고, 차라리 '글자의 힘'이라는 정직한 문구를 보고 싶다
이런 인간이고 보니... 힙하기는 애시당초 글렀고, 다소 촌스럽지만 이번 연휴에는, 이제는 아줌마가 되어 펑퍼짐해져 버린 나의 '히푸짝'을 진득~하니 붙이고 앉아 4만 8천 원짜리 루이뷔통 만두대신 우리 동네 슈퍼에서 '원뿔원'에 4천8백 원 주고 사온 고향만두를 씹으며 길고 두껍고 재미까지 없는 책이나 보련다.
힙(hip)하지 못해 미안해.

사진출처= 여성조선(http://woman.chosun.com)
사진=SBSB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