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쯤이었나 보다.
모든 일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나쁜 일이 생길까. 어제 나빴던 일이 오늘은 얼마나 더 나빠질까를 확인하기가 무서워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기를 바랐던 날들이었다. 점점 나빠지는 상황에 짓눌려 그야말로 몸도 영혼도 다 포기하고 자빠지고 싶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날마다 일이 터지던 와중에, 당장 다음 주까지 메꿔내야 하는 큰돈이 가장 다급한 문제였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하루가 가는지도 모를 만큼 휘청이던 그때의 감정은 걱정을 넘어 공포였다.
아침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듣던 KBS FM 라디오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 목요일 아침마다 하는 퀴즈 코너가 있다.
Q: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입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어머니는 누구일까요.
1번 베토벤 2번 모차르트 3번 헨델 4번 조수미
뭐 이런 식의, 청취자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틀리려야 틀릴 수가 없는 쉬운 난이도의 문제를 내는 이 퀴즈 코너에 나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문자를 보냈다. 당첨을 기대해서라기 보단, 아이와 함께 하는 등굣길 목요일 아침의 소소한 이벤트 같은 거였다. 당첨 선물도 커피 쿠폰 정도였으니 로또라면 모를까, 그야말로 되면 좋고 안되면 당연하고. 딱 요 정도 기대를 하는.
그러나, 뭐라도 붙들어야 했던 그 무렵의 나는, 그날 아침 목요일 퀴즈를 들으며 문득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오늘 퀴즈에 당첨되게 해 주시면, 저는 당신이 이 일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징표로 믿고 오늘부터 걱정을 내려놓겠습니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그 일들을 겪으며 20년 만에 다시 성당에 나갔다. 내 발로 갔다기보다는 그냥 끌려갔다고 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울며 성당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성당에 가서도 한참 동안 하느님을 원망하며 미사 중에 기도를 올리지도, 성가를 따라 부르지도 않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제대 뒤 십자가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어처구니없었을게다.
그 후 차츰 순종하기 시작했지만, 그분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날 아침의 기도는 그러니까, 어리석고 불량하기 짝이 없는 어린양의 당돌한 도전 같은 거였다.
나한테 확실히 보여주면 나도 확실히 믿겠다는,
감히 당신의 존재를 시험하겠다는,
약해빠진 조건부 믿음.
커피 쿠폰 그까짓 거 당첨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이었던 퀴즈의 당첨여부는 로또 1등보다 간절한 바램이 되었고, 문자를 보내고 클래식 음악 한곡이 흐르는 3분 남짓의 그 시간이 3년인 듯 길게만 느껴졌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줄 무렵, 정답을 보낸 청취자의 끝자리 전화번호로 당첨자를 발표했는데, 나는 내리는 아이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는 늘 하던 인사도 잊고 방송에 초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결과는,
당연히 5명의 당첨자 중 내 번호는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들어주실 리가 없지. 감히 당신에게 까불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속으로 되뇌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번번이 신호에 걸려 평소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영영 해결안 될 것 같은 일들로 터질 것 같고, 약을 먹어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용량을 더 늘려야 하나.. 고민을 잠시 했다.
보통은 방송이 끝나는 9시 5분 전에 주차장에 도착해 클로징 멘트를 듣지 않고 내리는데, 그날은 신호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려서 마지막 곡을 듣게 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곡입니다. 끝번호 0000님이 신청하신 모차르트 플룻 협주곡 2번 D장조....."
나는 그대로 멎었다.
음악을 신청한 적이 없으니 내 번호일리는 없고,
그러니까, 나와 뒷번호가 같은 누군가가 신청한 곡이 그날의 끝곡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전국각지에서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신청곡 중에
나와 같은 뒷번호를 가진 어떤 이의 신청곡이
그날 방송의 마지막 곡으로 선택이 되고,
평소에는 듣지도 않던 방송의 마지막 부분을
신호등에 지체되는 바람에 끝까지 듣게 되었고...
퀴즈에 정답을 보낸 많은 사람들 중에 뽑히는 것보다
훨씬 더 여러 겹의 우연에 우연이 거듭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확률...이라는 인간의 얄팍한 계산으로는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다 보고 계시는구나. 다 듣고 계시는구나.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감히 당신을 시험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내려놨다.
어떻게 해주시겠지.
그리고 어찌어찌 해결이 되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애쓰고 노력한다고 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게 2년 전의 일이다.
이 터널 속에 들어온지 5년이 넘었나...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그 일의 여파로 나와 우리 가족은 여전히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고, 아직도 끝은 보이지 않는다. 해결해야 할 일들은 아직 산적해 있고 많은 돈을 잃은 것도 거지만, 여전히 구멍 난 자루를 길에 끌고 가듯 줄줄 새고 있기도 하다. 인간관계도 인간에 대한 시선도 나의 가치관도 바뀌었다. 이 일을 통해 배운 점도 많지만 여전히, 다 되돌리고 싶은 맘. 누구에게랄 것 없는 원망과 분노의 마음도 남아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날 그 겹겹의 우연을 뚫고 4개의 숫자로 당신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셨듯이 그 후로도 그분은 항상 딱 죽지 않을 정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 완전히 회복 불능까진 아닐 정도로 해결해 주시고 살려주셨다.
그렇다고 내가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그분의 기적을 널리 전파하고, 간증을 하고... 이럴 깜냥은 아니다.
솔직히 가끔 쫄리기도 하는데, 이제 뒤로 넘어가도 머리 깨지게 두진 않으시겠지.. 생각한다.
어차피 내 힘으로 안될 일은 그냥 맡기자... 까불지 말고, 대들지 말고 그분 뜻에 따르자....
생각해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이 글쓰기도 나의 순종의 증거인 듯하다.
내내 도망 다녔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편히 살고 싶어 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나의 쓸모를 무시한 죄,
세상에서의 나의 쓰임에 무지했던 죄값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또 한 번 순종할 일이 생겼다.
두렵고, 겁도 난다. 그러나.
이제는 반항해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걸 안다.
그저 뜻대로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