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별
국민학교 3학년 때 서울로 다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의 직장이 1년간 부평으로 옮겨지셨기 때문에 한 해를 부평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다시 서울로 오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과 한 해를 그곳에서 지냈는데도, 나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지낸 곳과 같이 늘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당도 처음 다니기 시작했는데, 부활절에는 성당에서 주는 선물도 받았습니다.
형은 성당 다니는 데에 관심이 없어서, 그날 친구들과 함께 경찰대학 뒷산에 칡을 캐러 갔었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못 받았습니다.
하루는 형이 학교에서 오면서 모자 속에 무언가를 넣어 왔습니다.
열어서 보여 주는데, 하얀 토끼 두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찌나 귀여운지,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토끼장을 바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토끼들은 가족처럼 마루에서 같이 보낼 때가 많았는데, 내가 안아주면, 내 어깨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마당에는 조그만 웅덩이도 있었고, 나지막한 풀들이 깔려 있었는데,
그곳은 나의 자연 실습장이었습니다.
여름방학의 식물채집 숙제도 마당의 풀들로 채웠고,
곤충채집도 일부는 마당에서 잡은 벌레들로 채웠습니다.
자연을 마음껏 누린 한 해였습니다.
부평에서 1년을 보내면서 자연 속에서 즐겁게 잘 놀다가 일 년 만에 서울로 오니, 그 복잡함에 주눅이 잔뜩 들었는데 학교 수업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로 가득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항상 어리숙하게 지냈습니다.
당시는 베이비붐의 시대였고 아이들에 비해 국민학교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부평에서는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받았고, 서울의 학교는 우리 학년만 열두 반이었는데, 한 반에 110몀이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천명이 넘었던 동기들을 지금도 거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인데, 매일 아침 운동장에서 조회를 했고 체육시간에는 반대항 시합이 많았던 것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도 동기들을 만나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시의 동기들 이야기가 주된 메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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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친구들은 공부들을 모두 잘했습니다
경기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목표였지요
그런데 과외공부 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학교수업이 충실했고 모의고사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매달 집에 가져가서 부모님께 확인을 받아야 하는 성적통신표 때문에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업 사이사이의 쉬는 시간은 15분간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우리들은 운동장에서 공놀이도 하고 정글짐에서 놀기도 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퀴즈 맞추기를 하곤 했지요. 그리고 성냥개비로 삼각형 사각형 만들기를 하면서 난해한 문제를 내고는 누가 제일 빠르게 해답을 맞출 것이냐로 경쟁을 했습니디
그러는 가운데 모르는 사이에 가까운 친구들이 생기고 등하교 시간에 동행하는 짝꿍이 만들어져 갔습니다.
거기에서 나의 첫 친구이자 평생의 친구가 생겼습니다.
나보다 키와 몸집이 작은 편이었지만 작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그 친구.
어느 순간부터는 쉬는 시간에는 거의 함께 지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친구가 더해져서 우리는 늘 붙어살았는데. 집은 서울의 동서남북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만 예정도 없이 우리 집에 모이면 집에들 알릴 생각도 않고 모여서 신나게 놀고는 저녁 늦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각 집에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라서 집에 연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는데도 그렇게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이 돌이켜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아이들이 집에 늦게 들어와도 그러려니 하는 집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한 집에 아이들이 적게는 4명 많게는 8명이었으니 아이들 하나하나에 신경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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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 노량진이었기 때문에 한강이 바로 앞이었습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힐 진구가
" 야, 오늘 성진이네 집에 가자!"하고 바람을 잡았는데, 모두 동의해서 노면전차로 용산까지 가서 내렸습니다
왜 집까지 가지 않았는가 하면, 가는 중에 한강에서 뱃노리 하자는 것이었죠
모두 용산에서 내려서 한강으로 내려갔습니다
여름 철이 지났기 때문에 보트들은 모래사장에 정박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이 배에서 저 배로 건너 다니면서 신나게 놀았지요
한참 놀다가 한 친구가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나는 옆의 보트에 있었기 태문에 그 배로 건너가려고 했는 데 그 친구가 갑자기 힘차게 노를 저어댔습니다
내 한 다리는 이쪽에, 다른 힐 다리는 저 쪽 보트에 걸쳐 있었는데 보트가 서로 멀어지면서 나는 풍덩 하고 한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 이제 죽는구나!"
강바닥은 내 다리가 닿지 않았고 나는 수영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마음은 절망적이었지요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니 보트의 바닥이 보였습니다
가만히 있으니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손이 보트의 바닥에 닿았습니다
천천히 바닥의 나무를 두 손으로 조금씩 대면서 올라갔습니다
드디어 내 머리가 수면 위로 올라갔습니다
친구들의 얼굴이 보이더군요
지금도 경이롭게 생각이 되는 것이 물속에서 숨도 못 쉬면서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는지, 생각할수록 기적이었습니다
우리 집으로 가자는 계획은 그 자리예서 없어지고
나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너 노량진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어머니는 야단치지 않으시고 나를 씻기시고는 새 옷으로 갈아 입히셨습니다
머리끝부터 신발 바닥까지 흠뻑 젖어서 다리를 건너고 있었으니 볼만했을 겁니다
이렇게 맺어진 우리 네 명은 그 이후 삼십년이 넘도록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
한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 까지는 말이죠
내일 계속해서 이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