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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Nov 21. 2024

손창섭 단편

공휴일

〔한국소설 읽는 방〕에서 다음 책을 선정한다고 해서 나도 추천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한국 소설이 많기에  사실 내가 추천한 책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이런 책도 있고 무지 재밌다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몇몇 작가님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도 재밌게 읽고 있는 최은영 작가님을 시작으로 , 성석제, 오정희, 김애란, 장강명, 정지아, 이기호, 스승님이신 조성기선생님까지 몇몇이 아니라 끝없이 떠올랐다는 말이 정확하다. 그중에서 나도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뒤적이다 고른 책이 바로 손창섭 작가님의 책이다. 




손창섭 단편 전집 1권과 2권




큰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원에 있을 때 미선언니가 두유 한 박스와 아기용품들을 잔뜩 들고 신랑과 함께 우리 동네까지 찾아왔다. 그때 회복하면서 읽으라고 선물해 준 책이 바로 이 손창섭의 단편 전집이다. 고등학교 시절 고교생이 알아야 할 소설 시리즈가 있었는데 아빠가 사준 그 책 시리즈를 재밌게 읽었다. 읽고 또 읽고 어느 날은 생각보다 두꺼운 그 책을 무겁게 들고 다니기 싫어서 전부 잘라서 집에서 수제로(?) 제본을 한 뒤 가볍게 한 권씩 가지고 다닌 기억도 있다. (사실은 그냥 칼로 자르고 너덜너덜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이인직의 '혈의 누' 같은 작품도 얼마나 재밌었는지 손에서 놓지 않는 걸 보고 아빠는 고전 시리즈까지 전부 다 사주셨는데 월명사제망매가, 정철관동별곡도 푹 빠져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 신선이라고 술 취해서 헤롱헤롱 거리는 주정 같은 이야기 부분에선 어찌나 웃었는지 모른다. 얇게 포를 뜬것처럼 가벼워진 책들 중에 자주 들고 다닌 단골 책이 몇 권 있는데 그건 바로 이상의 '날개'손창섭의《비 오는 날》과 《잉여인간》이었다. 주인공들이 어딘가 암울하고 우울하고 결핍이 있는 듯한 모습이 묘하게 끌렸다. 실제로 다리를 절거나, 절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모습들이 찐따 같다고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짠한, 묘한 공감을 일으켰다. 답답하고 이상하고 어딘가 우울한데 또 신기하게 자꾸만 읽고 싶은 책이 바로 손창섭 작가님의 책이었다. 두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뭔가 지독한 사랑의 시련을 겪은듯한 경험이 생생하게 다가왔고 실제로는 젠틀하고 깔끔할 것 같은 작가님의 얼굴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아이를 낳은 후에 고맙게도 산후 조리원이란 곳이 있어서 덕분에 몸도 잘 회복하고 내 시간도 가장 많이 쓸 수 있었다. 조리원에서 시간이 편하고 좋아서 오히려 집에 와서 당황하고 힘들었던 기억도 난다. 거기에서 수유하는 시간을 빼고는 마사지를 받고 요가를 하면서 책을 읽었다. 손창섭의 책과 헤르만 헤세의 책이 있었는데 손창섭 작가님의 글을 읽었다. 그렇게 만난 '공휴일'이다.









짧은 단편이다. 그런데 단편집에서도 가장 첫 번째에 수록된 이 소설이 가장 마음에 들어왔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미선언니도 공휴일을 읽고 손창섭 작가에게 반했다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휴일이라서 별로 좋을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한 안 좋을 것도 없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도일이 공휴일에 겪은 반나절을 보여주고 있다.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같이 가자는 동생의 제안을 거절하고 약혼녀인 금순이 찾아오면서 부고장 같은 청첩장, 연애도 할 줄 모르는 맹추라고 오빠를 얕보는 여동생, 비계가 번지르르한 약혼자(금순)로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는 도일이었다. 그러다 전 여자친구 아미의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한바탕 소식을 도숙으로부터 전해 듣고 도일은 새로운 결심으로 집을 나선다.



세상에 장소 변화도 없고 그냥 집구석에 뒹굴뒹굴 빈둥거리는 오빠의 하루를 보는듯한 이 소설은 뚜렷한 갈등구조도 보이지 않는데 엄청 재밌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깨알 같은 반전에 웃고 심드렁한 듯, 하지만 현실에 있을법한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 말투가 친숙하고 상상할수록 웃음이 나온다.



충치에 박힌 밥알을 성냥개비로 쑤셔내며

피둥피둥 살찐 어깨에서, 전에 동물원에서 본 기억이 있는 하마의 등덜미나 엉덩짝을 연상하며 현기증을 일으킬 뻔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쌔완한 생각이 들거든요. 

별수 없는 미꾸라지와 붕어 새끼와의 결혼!


중요한 내용과 관련되는 표현을 빼다 보니 부분만 적을 수밖에 없지만 특유의 유머와 매력이 넘치는 소설이다. 내가 특히 가장 많이 웃었던 구절은 주인공이 뜬금없이 뚱딴지같은 말로 엄마에게 자기를 낳았냐고 묻기도 하고 혈연관계 역시 애정이나 확신이 느껴지지 않아 여동생에게




도숙 씨!




라고 한 번 불러보는 장면이다. 암만해도 자기 여동생으로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뜬금없이 부른 이 말의 대답은 현실남매답게 

"오빤 미쳤수?"로 화답한다. ㅋㅋㅋ



이 책은 광복 후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서 고향 평양으로 돌아간 작가가 1948년 다시 월남해 52년에 문예지에 발표한 첫 작품이라고 한다. 이 단편소설을 시작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니 첫 번째로 실릴만하다. 그의 작품이 문학계에 새로운 전율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주리고 헐벗은 소외'문제를 다룬 주제 의식이 전후 물질적 결핍, 물리적 황량함으로 폭넓게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인 지즈코 여사와 결혼을 했으며 외동딸 이름이 바로 이 공휴일에 나오는 여동생 '도숙'이다. 외동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으면 이렇게 첫 소설에 등장시켰을까 작가의 다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키가 길쭉하니 꽤 커 보이는 작가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말끔한 외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학교 수학선생님일 것 같은 인상이기도 한데 웃으면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 곱슬머리와 뿔테 안경이 인상적이다. 




책 뒤에는 아마추어 작가의 변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도 실려있는데 이 글이 또 한 번 내 마음을 찌르는 것 같았다. 



따뜻한 가정과 사랑이란 것을 모르고 어려서부터 거칠고 냉혹한 현실의 가파름 속에 던져져야 했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된다는 발악과 함께, 육체와 정신은 건전한 발육을 가져오지 못하고, 나날이 위축되고 야위어가고 일그러져만 갔다. 진부한 말이지만 이렇듯 기구한 운명과 역경 속에서 인간 형성의 가장 중요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온 내가 비로소 자신을 자각했을 때, 나의 눈앞에 초라하게 떠오른 나의 인간상은, 부모도 형제도 고향도 집도 나라도 돈도 생일도 없는, 완전한 영양실조에 걸린 육신과 정신이 피폐한 고아였던 것이다. 

「아마추어 작가의 변」 중에서, 손창섭



일본에서 대학까지 배울 만큼 배웠음에도 '여러 의미에서 학력다운 학력이 없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통하는 듯한 문장, 영양실조에 걸린 육신과 정신이 피폐한 고아, 스스로를 꿰뚫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작가구나, 갑자기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구한 운명과 역경을 버티게 한 게 또 문학이었을 테고. 그의 글에도 삶의 흔적과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만 같다. 무너지고 싶은 순간에도 살아남아 그래도 웃기도 하고 독자를 즐겁게 해주는, 생각하게 해주는 작가가 되었으니 손창섭 작가님의 인생이 행복했는지 알 순 없지만 덕분에 나는 행복한 시간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 든다. 





웃는 얼굴이 친근해 보이는 손창섭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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