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나들이 I
아이쿠, 국박이라는 단어가 '국립중앙박물관'인 줄도 몰랐다. 그림이 보고 싶을 때 떠오르는 작품이 있을 때마다 국박으로 나들이 간다는 심선생님 이야기에 아, 국립중앙박물관을 저렇게 줄여서 부르는구나, 지적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줄임말인가, 웃음이 났다. 어렸을 땐 부모님 손을 잡고 많이 갔던 곳인데(엄마가 민속 박물관, 민속촌이나 박물관을 좋아했다. 어쩌면 지금도 앤틱 가구와 골동품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과 박물관은 맞닿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어른이 될수록 세상엔 더 재밌는 곳이 많아서 박물관은 잊고 살았다. 박물관, 오래된 유물이 있는 곳이라 생각하니 재미가 없어졌다. 언니네 식구들을 보러 영국에 갔을 때 가이드 경험이 많으신 사돈 어르신(언니의 시아버님)과 함께 대영 박물관에 갔다. 직접 가이드를 해주시겠다기에 주저하지 않고 단둘이어도 따라갔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온갖 보물들을 안 보고 가면 또 아쉬울 것 같았기에. 거기다 영국은 비싼 돈을 내고 봐야 하는 박물관 미술관이 대부분 공짜다! 이런 특별한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영국 대영 박물관에 가서야 박물관이 압도하는 힘을 새롭게 발견했고 수많은 석조 조각품들을 영리하게 지하로 깔아놓은 구성마저 감탄스러웠다. 그래, 무너지더라도 거대한 석상에 깔려 죽을 순 없지. 지하부터 빼곡하게 들어선 생생한 역사의 한 조각들이 실로 어마어마했고 생생했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역시, 내 흥미를 더 끌었던 건 박물관보다도 미술관이었다. 그것도 고전 그림 위주로만 쫘악 구성된 내셔널 갤러리, 현대 미술도 볼 수 있는 테이트 갤러리 같은 곳이 박물관보단 편안했고 즐거웠다.
대만 고궁 박물관에 가서도 정교하게 옥으로 조각한 배추 같은 작품에 감탄하긴 했지만 무수히 반복된 배추며 메뚜기, 나중엔 동파육 조각 같은 걸 보노라니 허허, 한 번씩 쳐다보며 웃긴 했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그 앞에 노니는 거대 잉어가 박물관 안에 있는 작품보다 흥미를 끌었던 것 같다. 사실 박물관 내부에 무슨 작품이 있었는지도 잘 몰랐기에.
아,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려 하고 알면 알수록 재밌어하는구나.
오래된 유물 중 몇 점만 알았어도 눈을 빛낼 수도 있었을 텐데 뭐가 뭔지 모르니 살아있는 잉어가 더 좋을 수밖에 없었던 거다. (사실 잉어들이 지나치게 커서 속으로 좀 징그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방대하고 어마어마한 양, 범접할 수 없는 크기,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끌리는 대로 다니는 편이라 박물관에 발을 딛자마자,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전부 다 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런, 시작부터가 잘못 끼워진 단추 같다. 이런 생각이었으니 당연히 박물관을 걸으면 걸을수록 지칠 수밖에 없었다. 봐도 봐도 끝은 없고, 언제 다 보나 싶고 기회는 왠지 오늘이 마지막일 것도 같고, 이렇게 뭔가 쪼이는 느낌이 들면 자연스레 창 밖, 박물관 앞 공원이나 정원이나 카페에 저절로 눈이 갈 수밖에.
대부분 아이들은 박물관을 싫어할 거다. 아니, 박물관을 좋아하는 어른들도 과연 몇이나 될까, 반대로 묻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박물관에 나들이 가자, 하면 어떨까, 한 번에 전부 볼 수 없어도 하루에 하나씩, 다음번엔 또 흥미가 생기는 부분을 두 개씩만(아시아관/ 그리스 로마관 이런 식으로) 잡고 가도 좀 더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올여름, 경복궁 안에 있는 고궁 박물관을 시작으로 우리 가족들도 박물관 나들이에 나섰다. 9시까지 운영하는 박물관이 있다는 것부터 놀랍다. 〔국립 중앙 박물관 역시, 주말에는 9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박물관을 천천히 구경하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귀한 작품들이기에 불빛에도 훼손될 수가 있어 빛을 최소화한 덕분에 해가 지고 난 뒤, 박물관에 가면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특히 고궁 박물관 천문관 쪽은 너무 어두워서 핸드폰 불빛을 플래시처럼 아래로 비쳐야만 길이 보였다. 우리 가족만 그곳에 남아 별자리를 구경했는데 '만약 나 혼자라면' 생각하니 무서워서 그냥 뛰쳐나왔을 것도 같다. 곳곳에 근대화된 우리의 궁전 내부 가구들과 식기, 물건들을 보면서 엄마 생각도 나고 엄마는 틀림없이 여길 좋아할 거란 확신도 들었다. 커튼이며 장식장, 놓여있는 은식기, 도자기 그릇, 엄마의 관심을 끄는 물건들이 한가득이다. 박물관은 취향을 타기도 한다.
토요일은 9시까지 박물관이 열려 있어요.
이곳에서 느긋하게 유물, 서화, 도자기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심심하면, (아니, 사실 심심할 틈도 없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며 사시지만 ㅎㅎ) 박물관으로 나들이 가시는 심선생님 덕분에 우리의 '마지막 토요일 국박 나들이'모임이 시작됐다. 박물관으로 나들이가자는 제안을 직접 받은 셈이다. 생각한 대로 바로 실행에 옮기시는 선생님 덕분에 시작할 수 있었다. 원래는 아이들과 함께 한 달 한 번이 목표인데, 10명 남짓한 인원이 모여 시간이 될 때마다 하루에 하나, 두 개정도의 관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분주한 토요일 밤,-10월 마지막 토요일 혜진씨와 만나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함께 가는 길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이 얘기, 저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같이 걷고 배우고 이야기할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거구나, 기분이 좋았다. 공기는 적당히 선선했고 저녁을 거른 탓에 꼬르륵꼬르륵 배는 고팠지만 박물관을 향해 걷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박물관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7시가 넘는 시간에 희한하게도 우리 둘은 박물관으로 향해 걷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올여름, 장이(혜진쌤의 아들)에게 빌려서 재밌게 읽은 책 『클로디아의 비밀』이 떠올랐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서 먹고 자고, 심지어 분수대에서 목욕까지 전부 해결했던 요 맹랑한 숙녀, 클로디아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동생 제이미는 용돈을 많이 모아둔 덕분에 누나에게 가출 메이트로 발탁됐다) 나는 과연 박물관, 미술관에서 자고 먹고 숨어 살 수 있을까 상상하게 됐다. 거기에 같이 가출할 동료부터 구해야 하는데 일단 두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리니, 나도 클로디아처럼 10대 소녀라고 생각하고..., 아직 메트를 못 가봐서 그런가 지금까지 내가 갔던 박물관, 미술관들은 어딘가 마음에 만족할 만한 곳이 없었다.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중 하나인 '햄 하우스'가 떠올랐는데 거기도 역시 계단이 너무 많아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아무리 화려하고 폭신한 침대를 갖춰놓은 곳이라 해도 대부분 유리관 안에 있거나(여기서부터 상상력 파괴) 일단 경비가 엄청 삼엄하다. 쥐구멍 하나까지 전부 살필 것 같은 경비원 무리가 늘 박물관 마지막까지 보고 나오는 우리 가족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 적도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앞으로 여기에 들를 때마다 가출까진 못해도 내가 안식을 얻을 공간 하나쯤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운 좋게도 클로디아의 남동생 제이미처럼 든든한 동료이자 스승님들이 여럿 생겼다. 박물관에 하루종일 계셔도 눈을 빛내며 다니실 것 같은 심선생님, 사학과 출신에 청동기를 좋아하는 혜진쌤, 무지한 나에게 도전을 주고 손을 잡아줄 사람들과 걷는 것은 무섭기보다 즐거운 설렘을 가져다준다. 어두운 하늘 아래 국립중앙박물관이 보이자마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불이 꺼진 곳은 있지만 박물관은 그 자체로도 또 빛을 내고 있었다. 나를 재미없게 만들었던 '오래된 유물'을 기대를 가지고 이렇게 찾아가게 될 줄 몰랐다.
*클로디아의 비밀/ E.L 코닉스버그/ 비룡소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 황윤역사여행에세이
※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