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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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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23. 2024

(2)

흔한 다툼이었다. 늘 그래왔듯 시간이 흐르면 가라앉을 분노였고, 서로 말없이도 알게 될 멋쩍은 화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서로 이해하는 선에서 치고받는 약속된 싸움이었으니까. 조금 과하게 말이 오갔다 해도, 그것만으로 관계가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 믿음은 하루아침에 쌓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의 밤과 낮이 지나도 그로부터의 소식은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 그리곤 곧 돌아오겠지, 그럴 거야, 몇 번이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남긴 어떤 자취도 흔적도 없다는 사실이 점점 선명해졌다. 지금껏 보지 못한 그의 냉소가 무겁게 다가왔다. 그리고 불현듯, 단순히 화가 나서 떠난 게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평소엔 귀찮게 울리던 휴대전화조차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 침묵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정적이, 주변을 감싼 모든 것을 낯설고 위태롭게 만들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머릿속을 맴도는 상상들이 모두 불쾌한 것들이었다. 수많은 부정적인 가능성들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 그 무게가 점점 더 커져갔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정희의 손이 먼저 핸드폰을 찾았다. 손끝이 화면을 스치고, 낯익은 동작들이 무의식적으로 반복됐다. 새로 고침을 누르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였다. 그러나 정희가 기다리던 알림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어쩌면 수백 번이고, 화면을 다시 띄워보아도 그 작은 기계는 무표정했다. 불안이 다시 뾰족하게 피어올랐지만, 정희는 그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처럼, 점점 더 희미해지는 기대감과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대답 없는 그 정적이 점점 더 거칠게 마음을 옥죄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지 멈춘 것인지 모를 만큼 무의미했다. 그 공허한 반복 속에서, 차라리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디에도 닿지 못한 손길처럼,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흔적은 더욱 멀어져만 갔다. 매일 아침마다 느껴지는 침묵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묶어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그때와 지금을 잇는 흐름 속에서 정희는 끝없이 미끄러졌다. 대답 없는 시간은 정희를 잡아두고, 오래된 기억의 가시가 새로 생긴 습관 속으로 파고들어, 아침의 공기마저 씁쓸하게 변해갔다.

하루가 흘렀다. 다시 아침. 정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어제와 같았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되었고, 시간은 멈춘 듯했다. 빈 화면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그녀의 고독을 비추고 있었다. 희미한 빛을 띠며, 마음 깊은 곳에서 억누르던 감정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핸드폰을 쥔 손은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집요하게 움직였지만, 그 순간 더 이상 자신을 구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희의 몸과 마음은 점점 굳어갔다. 매일 반복되는 이 행위는 한낱 습관에 지나지 않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더 깊은 어둠으로 그녀를 끌고 있었다. 시간은 멈춘 듯 흐르지 않았고, 그 안에서 정희는 홀로 남겨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엔 희미했던 희망도 이제는 점차 자리를 잃고, 조용하고 확실하게 무너져갔다.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은 아무런 의미 없는 동작으로 반복되었고, 그 화면은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상처를 남겼다. 더 이상 메워지지 않을, 점점 더 깊어지는 그 빈자리는 이제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소식이 단조롭게 울렸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메시지. 화면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보낼 단 한 줄의 메시지가 그녀를 구원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묵묵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못했다.

그 이름 하나를 찾아 헤매는 자신과, 숨바꼭질을 하듯 숨어버린 그. 끝없는 엇갈림 속에서 서로의 마음은 닫힌 채, 정희는 그놈의 놀이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차라리 장난이나 놀이였으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그 빈 화면이 정희의 불안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 그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정희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 답이 없는 정적 속으로 무력하게 빠져드는 자신을 알아차리면서도, 정희는 그 무엇도 깨뜨릴 힘조차 없었다.

모든 감정을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이 그때쯤 생겼다. 잃어버린 것들이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듯 맴돌았고, 정희는 자신이 그 속에 휩쓸리고 있음을 느꼈다. 매일, 그가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구멍은 조롱하듯 상기시켰다. 끝도 없이 깊은 그 작은 어둠이 정희를 둘러쌌다. 그것은 세상과의 단절, 그 속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한 자신의 확인이었다. 그러니 외부 세계와 차단된 이 작은 공간에서 화면은 더 이상 의미 없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희가 세상에 붙어 있는 마지막 끈이었다. 손끝으로 스치는 그 익숙한 동작은, 화면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지막 시도처럼 보였다.

몸에 차오르는 무력감을 밀어내려 할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실종 신고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가운 공기처럼 건조하고 날카로웠다. "성인은 스스로 떠날 수 있는 거 아시죠? 며칠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은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고, 정희의 절박함은 그 벽을 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미 모든 것이 그녀 손에서 벗어나 있었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어느 날 일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정희는 한순간 그가 실존하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했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이렇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게 설명될 테니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정희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졌다. 매일 그를 찾으려는 노력이 반복될수록, 그가 현실에서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지치고 무너진 마음이 결국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희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 상실감은 점점 몸속에 침투해, 정희의 의식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손으로 무언가를 쥐려 해도 그 실체는 이미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 감각,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정희는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실종 신고라는 절차조차 무력한 형식에 불과했다. 그가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그를 기다리며, 정희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존재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그런 기이한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그런 혼란이 진정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휴대폰의 진동이 공기를 찢었다. 정희는 얼어붙은 손으로 급히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 연락할게.”라는 그에게서 온 문자와 마주했다.

너무나 짧은, 그래서  정희를 무시하는 듯한, 그 메시지를 바라보는 순간이었지만, 잠깐이나마 안도감이 밀려드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이어 밀려온 공허함이 그녀를 잠식해갔다. 최소한 그가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다행일까, 아니면 더 큰 혼란의 시작일까.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것만으로는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메시지는 정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식의 모호한 연락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안부조차 담기지 않은,  최소한의 감정조차 없는 건조한 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문자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그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았다. 혼란 속에서 그 한 줄의 말은 희미한 빛처럼 느껴졌다."

정희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혼란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칠 때마다 떨림이 전해졌다. 재빨리 메시지 창이 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허락 없이 불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어디야?"라고 입력했다. 하지만 그 한 마디조차 무거운 돌처럼 가슴에 눌렸다. 보내고 나서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결국 그를 향한 간절함을 점점 짓누르며, 그녀의 마음속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눈앞을 스치고, 그가 곁에 있을 때의 안도감이나 분노는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갔다.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연결이 끊어졌음을 상기시키는 불길한 전조처럼, 그녀의 가슴을 압도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깊은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너무 멀리 있지 않기를, 그저 그만큼만 멀리 있기를 바랐다. 이 모든 감정이 응어리져, 가슴 깊은 곳에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희는 다시 그에게 닿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소망은 지금 그녀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희는 더욱 흔들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해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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