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는 그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문이 앞을 막고 있었다. 마치 방파제처럼 밀려오는 파도를 막듯, 문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그어두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문 너머의 세상은 익숙하지 않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손을 문고리에 댔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문을 열면, 그 순간부터는 아무도 곁에 없을 것이다. 정희는 그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혼자였으니 익숙해야 할 일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은 채로 숨을 고르고 또 고쳤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쌓아 온 모든 것들이, 문 밖에서 스며드는 바람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두려움은 더 이상 머릿속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문 앞에 선 정희를 삼키려는 실체였다. 그럼에도 정희는 손을 움직였다. 문고리를 돌렸다. 큰 힘을 쏟은 것도 아니었지만, 마치 온 몸의 힘을 다한 것처럼 느껴졌다.
밖은 냄새로 가득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먼저 다가와 존재를 드러냈다.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냄새는 결코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건 일종의 직관이었다. 익숙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무언가를 경고하는 신호처럼. 무거운 공기 속에서 먼지와 녹슨 금속의 흔적이 천천히 코끝을 스쳤다.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냄새가 남아 있지 않다면, 둘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없었거나, 있었다가 사라졌거나. 어쨌든 그것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만은 틀림없다. 햇빛은 가라앉았지만, 거리의 눅눅한 기운은 여전히 무겁게 떠다녔다. 탁한 공기가 폐로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몸은 낯선 감각으로 물들었다. 차가운 무언가가 피부 아래, 더 깊은 곳에서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셔터가 반쯤 내려앉은 상점들, 빛이 바랜 채 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간판. 오래된 건물의 외벽은 물때와 이끼의 흔적이 묘하게 어울렸다. 균열이 난 틈새에서 떨어진 벽돌 조각들이 발길에 채였다. 가로수는 잎이 말라 비틀어져 있고, 땅에 떨어진 낙엽들은 마지막 숨을 내쉬듯 바스러졌다. 지나가는 차들은 끊임없는 소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고, 엔진 소리는 진흙 속을 허우적대는 무기력함을 자랑했다.
지친 얼굴과 절망을 짊어진 듯 무거운 발걸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림자는 도시의 곳곳을 뚜렷하게 만들어냈다. 바람에 날리는 신문지와 쓰레기들, 깨어진 유리창 조각들이 스치는 소리는 애초에 무엇이었는지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모호함은 결국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수단이 분명했다. 최소한 정희가 바라보는 도시의 거리는 그랬다. 유리창에 정희가 스쳐지나갔다. 더러움으로 흐릿해 흔들거리는 모습이었다. 그 너머 망한 것 같은 상점 내부는 어두운 먼지 속에 텅 비어 있었다. 진열대는 비어 있었고,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는지 무채색으로 변해있었다. 묘하게 그 공간과 정희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오버랩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늘진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데 익숙해졌다. 그들의 대화는 간헐적이고 공허하며, 불안과 불신이 있었다. 서로의 길을 피하려 애쓰고,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불안에 가득 찬 얼굴로,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불안은 현실의 악몽처럼 가슴 깊이 자라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몇몇 어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편의점의 진열대는 정돈되어 있었지만, 직원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선반을 점검하며 물건이 사라질까 불안해했다. 고객들의 손길은 불안하게 떨렸고, 그들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하는 듯했다.
정희는 문득 옷깃을 세운 채 서 있는 몇몇 사람들이 벽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의 눈은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 없는 시선은 모든 희망을 잃은 채 남겨진 인간의 폐허 같았다. 그들이 서 있는 이 거리, 그들 자신이 오래된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무시하며,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상했다. 납득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정희가 알고 있던, 어제까지 살았던 그 세계와는 달랐다. 정희에게 세상은 언제나 사람들의 욕망이 날것으로 튀어 오르며 생동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세계는 평화로운 겉모습 아래, 서서히 금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규칙이, 오늘부터는 자연스럽게 깨져가는 것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다. 왜 눈치를 못 챘는지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리의 시끄러운 대화와 활기찬 발걸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무언의 불안이 차지하고 있었다. 작은 시위대가 무리를 이루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상점 유리창에 뻗어 있는 미세한 균열이 도시의 불안정함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문을 연 작은 상점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주인의 얼굴에는 긴장과 불안이 역력했다. 시민들은 상점 앞을 지나면서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불안의 그림자를 감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어딘가 어설프고 불안정해 보였다. 초짜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자신이 내뱉는 대사에만 온전히 집중해, 주변의 흐름을 놓친 모습.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각본에 적힌 줄을 읽는 것처럼, 진정한 의도는 사라져버린 채 무의미한 소리로 흘러갔다. 대화는 끊기고, 말의 맥락은 마치 끊어진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이나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자신이 맡은 대사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한 무대는 빛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지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중일 것이다. 마음은 들키지 않은 채 겉모습에 치중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각자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서로를 무시하며 애쓰는 모습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갈등이다. 정희는 그 두려움을 잘 이해한다. 작은 불행이 커다란 혼란으로 이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로인해 자신의 얼굴에서 희망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내기 어려웠다. 그만큼 타인에게 신경 써야 하니까. 그들은 결국 과거에 매달려 현재에 도달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몸소 보여주는데서 연극을 끝내고 말 것이다. 희망을 진정으로 갖으려면 저들을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을 테니까. 그것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임을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어린 시절, 붉게 물든 노을 속에서 비를 맞으며 뛰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하늘은 생명력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비는 그 따뜻한 감정을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그 기억들을 차갑게 눌러버렸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느꼈던 자유로움은 현재의 무거운 공기와 대조를 이루었다.
정희는 지금,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어딘가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그때의 즐거움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 일처럼 멀어졌다. 그리움과 후회가 얽혀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추억은 과거의 빛나는 순간들이 더 깊은 애처로움으로 다가오게 했다. 그러나 그 그리움은 때때로 현실을 잊게 할 만큼의 쾌락을 안겼다. 과거의 힘은 이렇게도 두려웠다. 누구라도 현실 인식이 무너지면, 결국 초짜 배우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만 남게 된다.
정신을 다시 차릴 즈음, 그를 만나기 직전에 도착했다.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감돌았다. 차가운 색조의 조명이 어울리는 그 곳에서 정희는 그와 만났다. 공간은 조용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 심장 박동은 강렬했다. 순간 그의 심장소리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얀 천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정희가 기억하는 그와는 다른 낯선 사람이 누워있었다. 평온한 무표정 속에 감정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정희는 그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자 했지만, 말을 잊었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 반복해서 생각하려했는데 그럴수록 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 무엇도 부정하지 못했다. 침묵이 긍정의 다른 표현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누군가 핸드폰이 시신의 소지품 중 하나로 발견되었음을 설명할 때, 그의 메시지를 기다렸던 일들이 생각났다. 사망원인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와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깊은 물속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단어 하나하나가 그녀의 귀에 부딪히고, 이해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지금 정희는 커다란 허탈감과 혼란으로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내면에는 이미 찬란함이 부서지는 소리가 소음을 냈고, 깊은 절망과 슬픔의 무게가 가슴을 눌렀다.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착각. 정희는 무너진 미래와 함께 사라진 꿈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부검을 해야 한다고요,” 목소리가 세밀한 틈일 비집었다.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어서요. 정확한 사인을 밝혀야 합니다.” 정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이미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술이 심장처럼 제멋대로 떨기만 했다. 진동이 목구멍 어딘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소리는 갇혀버렸고, 압축된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어떤 의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의서를 작성해주셔야 합니다.” 끈질긴 목소리였다. 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는지조차 몰랐다. 손은 무의식적으로 펜을 잡고, 서류 위에 이름을 적었다. 글씨는 지저분하게 늘어졌지만, 그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누구인지, 왜 죽었는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불확실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