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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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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Oct 27. 2024

(5)

돌아오는 내내 정희의 기분은 생소했다. 차가운 공기와 스며든 냉기 탓에 감각을 잃은 듯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무거운 상실감. 그것은 분명 낯선 감정이었다. 명확함이 없는 게 문제였다. 기억이 끊임없이 떠오르지만 비어있는 현실과 부딪쳤다. 지금 정희가 겪고 있는 상황과는 아무런 연관이 그저 공허한 그에 대한 정보와 유사했다. 그 느낌이 정희를 더욱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방향감각이 흐려졌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되돌아가는 것 같은 감각. 정희는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가 여전히 누워 있는 차가운 방인가, 아니면 지금 향하고 있는 집인가. 경계가 또 허물어졌다. 마음속의 나침반은 고장 나버린 듯, 정체된 시간 속에서 정희는 그 방향을 잃어버렸다.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조차 막막했다.

겨우 집에 들어섰을 때, 정희는 쉴 틈도 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다만 하염없이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은 바닥의 한 점에 머물렀고, 그녀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심장은 기계처럼, 감정 없이 반복운동을 했다. 무의미하게, 끝없이. 곧 잔해로 뒤덮일 철거중인 건물 같았다. 부서진 조각은 쉴 새 없이 무너진 틈 사이로 침투하고, 뿌연 먼지가 기댈 곳 없이 바람에 날리며 떠돌았다. 정희의 마음은 감정의 파편 속에서 유령처럼 떠다니며, 형태를 잃고 점점 희미해져갔다. 마치 폐허 같았다.

정희는 움직이지 못했다. 가위에 눌린 듯, 생생한 구속감이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자신의 잘못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생각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의 마지막 순간, 그는 분명 고통스러운 표정과 무언가를 남겼을 것이다. 그 눈빛은 그녀를 향한 원망이었을 테지. 부끄러움과 슬픔이 정희의 어깨에 얹혀, 그 무게는 한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 죄책감은 끝도 없이 불어나 그녀를 서서히 질식시켜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쾌락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희는 매일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주문을 외웠다.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다. 주문은 거대한 괴물처럼 자라났고, 차츰 그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정희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 괴물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었다. 그것은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만을 위한 지독한 이기심이었다. 고통이 더욱 깊어질수록, 정희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실체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희생의 제단에 자신을 올려놓듯, 그녀는 죄를 안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신념 그녀는 스스로 죄인으로 존재하길 원했다.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자신이었다.

그의 죽음을 생각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오히려 자신이 그에 대한 기억이 무뎌지는 것이 더 두려웠다. 끊임없이 변명하며 도망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럴수록 정희는 더 강하게 싸움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일종의 고귀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며 무너져 내리길 바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아픔이 자신을 지탱하게 하는 아이러니였다. 정희의 내면은 싸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정희는 그에게서 체온이 느껴졌던 그 순간, 자신이 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 그리고 사소한 다툼들까지 모두 머릿속에 가두었다. '왜 더 잘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은 후회를 뚜렷하게 남기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을 망쳐버린 자책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녀는 최선을 다해 그 감정을 붙잡았다. 그것은 그녀를 지배하는 깊고도 무거운 죄의식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완전한 암흑 속에 홀로 남겨졌다.

모든 빛이 사라진 방 안에서, 무겁고 깊은 어둠 속에서, 허튼 취급을 받아도 되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책망하고 부정했다. 그럴수록 자신의 가치가 점점 더 미미해졌지만, 감각은 더욱 강렬해졌다. 빠져나오고자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이 파고드는 어둠에 사로잡혔다. 그가 남긴 흔적과 마주할 때마다 상실감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자책은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혼란이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상실과 후회의 깊이를 끝없이 드러내는 거울이었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확인할수록, 그로 인해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자신에게서 미묘한 통쾌함이 섞였다.

정희는 요즘 자주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비록 단편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비난과 원망의 말이었다. 갇힌 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응시하며 스스로를 벌하는 장소였다. 방 안의 정적은 그녀에게 잊고 싶었던 기억들마저 불쑥불쑥 올라오게 했다. 비굴하고 비참한 순간들, 수치스러운 기억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모든 실수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려했다. 정희는 가장 수치스러운 그곳까지는 가지 못했다. 어쩌면 용서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갈망은 거울 속 왜곡된 모습처럼, 손에 닿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희가 모를 리 없었다.

정희는 시험에 들었다. 어둠은 그녀를 삼키기보다는 뱉어내고 싶다는 듯. 어느새 품어주기보다는 배척했다. 정희는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완벽한 혼자를 의미했다. 그 무엇도 품어주지 않는다면 살아가야할 이유마저 찾기 어려웠다. 정희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어둠에게, 자신의 모든 죄와 고통을 놓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어둠은 매섭고도 싸늘한 손길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녀의 절망을 조롱이라도 하는 듯,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허락하지 않고, 정희를 더욱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애써 뱉어내려는 목소리는 누군가의 귀에 닿기를 기다렸으나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녀의 존재감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지워버리겠다는 다짐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용서받지 못할 운명을 스스로 예감하는 듯, 어둠 속에서 더욱 깊은 고독에 잠겨갔다.

그의 마지막 소식은 불현듯 걸려온 전화였다. 먼지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고도 없이 다가온. 그 전화 한 통이 시작이었다. 그는 차갑고, 조용히 가라앉은 물체처럼 여러 개의 서랍식 냉장고가 줄지어 있는 방 한구석에 누워 있었다. 경찰이 그의 신원을 확인하고 전달해준 말조차 어딘가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믿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따뜻한 숨결을 품고 그녀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 숨을 고르던 그가, 차가운 공간 속에서 굳어버렸다는 사실이 도저히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날 수는 없었다. 정희의 기억을 점점 짙어졌지만, 그 속에서 그의 모습은 오히려 희미하게 가렸다.

서늘한 공기가 서려 있는 그 방에서, 정희는 그를 바라보며 그 부재를 떠올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더듬을 수 없을 만큼 딱 그만큼 행동했다. 왜 감정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은지, 손에 잡히지 않는 아픔 속에서 무력하게 떠밀리는 자신이 낯설었다. 어느 순간,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눈물은 이미 그녀 안에서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녀 안의 감정적 단절이 얽혀서 깊은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아무것도 뚜렷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동안, 그의 눈가 역시 이상하리만치 말라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아마 미련이 없이 가버렸던 것일까? 말이 없으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사경을 넘나드는 그 순간 온몸을 짓누를 그 고통 때문이라도 눈물이 흘러야 마땅했다. 아무리 봐도 그저 메마른 감정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이상했다. 깊은 상실 속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한 이 무감각이, 오히려 허무보다 더한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기억을 붙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함께했던 순간들은 달빛 아래에서 파도처럼 일렁이다 이내 부서졌다. 손을 뻗어 닿으려 할수록 기억은 멀어져 갔고, 그것들은 별들이 흩어진 밤하늘 어디엔가 숨어 있는 듯했다. 결국, 정희는 그가 점점 더 흐려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존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자 애쓰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녀의 내면은 끝없이 갈라졌고, 상실감과 자책은 한결같이 그녀를 조롱했다.

그는 늘 바빴다. 그녀도 바빴다. 아침이면 함께 출발하고, 저녁에는 조금씩 다른 시간에 집에 들어왔지만, 그들은 늘 같은 공간에서 마주했다. 그 공간은 약속된 일상이었고, 특별히 불만족스러울 것도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일상은 때로 지루했고, 가끔 격렬했으며, 자주 불행을 함께 만들어냈다.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좋았던 기억은 그와 함께했던 쿠바여행이었다. 결혼 전 신혼여행지로 정희가 선택했다. 쿠바를 먼저 여행한 것은 그녀였다. 여행에서 느꼈던 기억—낡은 골목과 해변을 둘러싼 따뜻한 공기, 바다 너머로 이어지던 풍경—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와 함께 좋았던 그 장소에 다시 방문해 보고 싶었다.

쿠바에 두 번 방문하는 동안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그의 존재였다. 이곳만의,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새로움이 익숙함보다 더 강조되고 있었다. 여행은 전보다 디테일했다. 예를 들어 전에는 방문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빨간색 전화 부스 비슷한 입구가 있는 지하 재즈 클럽을 찾았다. 단돈 1쿡으로 모히또 한 잔과 무한정 흐르는 재즈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명소였다. 또한 유명 작가가 자주 찾았던 핑크색 카페에서 설치된 그의 반질반질한 동상을 만져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좋았다. 그도 정희가 이끌어 가는 데로 수긍했다.

어느 날, 그가 물었다. "왜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는 거야?" 정희는 준비된 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정희에게 여행은 일종의 회피였다. 그 이유를 그가 알 수 없도록 숨겨 두고 싶었다. 그가 알면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 정희의 삶은 힘들었고, 피하고 싶어서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다. 틈나는 대로 여행이라는 걸 했다. 그렇게 여행을 하다 보니 문득, 낯선 풍경이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답이 정해진 세상에서 벗어나, 정희 멋대로 살 수 있음을 실감하는 삶이 펼쳐졌다. 새로운 것들을 살피고 만지는 과정에서, 망상에 가까운 상상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컸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다. 낯선 질감이 손끝을 스치면, 가슴 속에서 어떤 열정이 솟구쳤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은 넘쳐흘렀고, 그것은 엉뚱한 경험으로 이어졌다. 어떤 날은 깊은 바다에 스스로를 던져버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한밤중의 거리로 나가 어지러운 유혹에 이끌리기도 했다.

아침이 오면, 이성을 잃고 쾌락을 좇았던 전날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올라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다. 그 모든 일들은 추억이 되었다. 가벼운 후회는 주로 이불 속에서 그 부끄러운 기억으로 밀려왔다. 그 오버된 감정은 자신만의 계산기에서도 큰 변수로 작용하지 못했다. 현실의 굴레에 치이기보다는 변화에 대응하며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는 것은 훨씬 더 달콤하고 짜릿한 맛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경계가 흐려지고, 그녀의 자체로 자유로워졌다. 마치 세상과 하나가 된 것처럼.

쿠바에서 여행 내내 정희는 앞서갔고, 그는 뒤를 따랐다. 이미 한번 아바나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정희는 앞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그녀의 뒤에서 걸어야했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정희의 뒷모습이 많이 담겼다. 정희는 사진을 보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앞에 서 있는 것이 좋았다. 그도 굳이 앞으로 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크게 경쟁할 일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정희가 스스로 이루어온 성과였다. 하나씩 그를 조련하고 다듬어서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역시 정희가 원하는 데로 협조했고 스스로 노력했다. 정희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무턱대고 쫓기지 않으며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좋았다. 물론 느리면서도 길치인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 백이면 백 길을 잃게 된다. 가끔 그가 피곤하게 생각했던 일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는 급할 일이 거의 없었기에, 길을 잃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정희가 일부러 길을 잃는 척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려고 길을 잃는다고. 하지만 그것을 투덜댈 때마다 정희는 지도 앱을 탓했다.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곤란을 겪었다는 다른 여행자들의 댓글을 보여주며, 얼마나 엉터리로 만들어졌는지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그래서 그는 정희를 의심의 여지없이 길치라고 여겼다. 간혹 길치라고 놀리는 일이 꽤 만족스럽기도 했다.

정희는 처음 쿠바에 오기 직전만 해도 뚜렷한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으며,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믿었다. 도망치는 것과 회피하는 것 그리고 삶을 받아들이는 것들이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명확한 더 명확하고 분명한 상황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정희는 가야 할 코스를 정하고 시간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이 반드시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그 익숙함이 주는 그 불안한 평온이 너무나 아팠으니까. 그 모든 원인이 그 때문이었다. 그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이유들은 그때 쿠바에서 돌아와 천천히 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삶의 태도와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정희는 이제 자신의 삶에 굳이 뚜렷한 목적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다만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 노력할 뿐이었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 그저 살아갈 뿐이니까. 분명 정희가 처음 길을 잃었을 때만해도 두려움이 그녀를 지배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반복되면서 점차 무뎌져버렸고, 별거 아닌게 되어갔다. 길을 잃는 것조차 여행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 후 정희는 달라졌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쿠바에 갔다. 그녀의 기억 속에 그가 함께해주었던 두 번째 쿠바 여행은 자유로웠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착각이었을지라도, 그때는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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