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이 끝나자, 어느 새 검은 바람이 슬며시 스쳐가고 있었다. 가로수들이 바람에 몸을 부비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희미하게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 위로, 앳된 인간 정희가 힘없이 걷고 있었다. 차도를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선 건물들은 하나둘 불빛을 밝히며 저마다의 빛을 뽐냈다. 그녀의 얼굴 위로는 어딘가로 흩어지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엷게 내려앉고 있었다.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정희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끝나지 않은 투쟁 속에서 홀로 남은 검투사처럼.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졌지만, 도리어 거리는 더욱 밝아져 갔다. 그러나 정희에게 그런 변화는 전혀 감흥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늘 마주한 면접관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외형을 기억해 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들, 주고받았던 그 대화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매번 이렇게 상황이 지나고 나면 정희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과연 그 상황 자체가 문제였던 건지, 아니면 자신이 그 순간 견디지 못해 욱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났다. 그의 얼굴이, 그 차가운 표정이 불쑥 정희를 불러 세웠다. 그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너무 선명했다. 그것은 실망스러운 그래서 묻어둔 기억이었다. 갑작스럽게, 그가 정희의 내면을 헤집기 시작했다.
“저기… 잠깐만. 정희 맞지? 정말 오랜만이네. 대학 때 이후 처음이지? 잘 지냈어?”
그의 목소리는 분명 현실이었다. 하지만 정희는 그가 정말로 눈앞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 자신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환영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지워버린 사람이었고, 지금 그녀 앞에 있는 것은 그저 기억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 찰나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볼을 스쳤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도 들렸다. 자신이 여기에, 이 거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발밑의 단단한 땅이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여전히 바람이 불었고, 지나가는 차들의 신경질이 뚜렷해졌다. 불쾌함은 쉽게 끝내는 법이 없었다.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한동안 내뱉던 그 뻔한 사과를 꺼냈다. “아까 모른 척해서 미안해. 너인 줄 알았는데 일하는 중이어서… 그래도 목소리 듣고 알겠더라. 면접장에서 반가웠어, 진심으로. 그런데 왜 그렇게 답변했어? 조마조마 했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면접관들이 싫어할 수도 있어. 그들은 결국 갑이잖아. 네가 당황하고 화내는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넌 여전히 욱하고 화를 내더라.”
그의 말은 경기에서 패한 검투사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굶주린 사자 같았다.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짐짓 가르치려는 태도. 늘 그랬다. 마주칠 때마다 그는 정희에게 반가운 마음을 전하는 대신, 어떻게든 그녀를 훈계하려 들었다. 그때마다 그의 말 속에 스며드는 오만함이 정희의 마음을 거세게 자극했다. 아직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채 싸우고 있는 그녀에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끝내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새삼스럽다는 거지? 아까는 모른 척하더니, 이제 와서 뭐 어쩌라고. 정말 지긋지긋하네.’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생각이었다. 사실은 말하는 것조차 힘들고 귀찮았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자기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 앞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해야만 하는 검투사가 되어야만 이 상황을 빨리 끝낼수 있을지 고민했다. 정희는 그만큼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의 말을 참고 넘길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훈계라니 그가 던졌던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정희의 감정을 무너뜨렸다. 불쾌한 자극을 넘어서,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가 가진 그 오만한 태도는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충분히 이 상황을 인식할 지능이 있었다. 회사가 원하는 검투사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르다. 어딘가 남아있는 자존심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냥 모른 척 해주면 정말 고마울 거 같아요.”
정희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이미 한 번 휘둘러본 칼이었다. 두 번이라고 휘두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단번에 베어내지 못하면 또 그의 허튼 소리를 들어야 했다. 수십 번의 면접이었다. 서류는 늘 통과했으나, 면접에서는 번번이 탈락했다. 왜 탈락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도 전이었다. 단지 오래전 사귀었던 남자가 자신의 삶에 다시금 간섭하고, 모든 걸 아는 듯이 내려다보며 조언을 던지는 모습에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정희는 그에게 이해를 베풀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게다가 애써 지워버린 그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순간조차 그녀에게는 아까웠다.
“저, 그러니까 신발. 네 명품 신발.”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칼자루를 단단히 잡았던 손에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를 빙빙 돌렸다. 중요한 순간에 핵심을 피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을 끌고 가는 데 능했다. 그 점이 정희에게는 너무도 싫었다. 언제나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태도. 그리고 정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그 거만함. 그런 그의 방식이 못마땅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언제나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승부사처럼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사람. 결국, 정희는 또다시 그에게 패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 신발. 실속 없이 겉으로만 기세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거든. 명품이긴 한데, 낡았어. 차라리 명품이 아니더라도, 새것이 나아. 면접관들은 그런 것도 보더라고. 그 말 해주고 싶었어.”
그의 말은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그 순간, 정희는 마치 자신이 투명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이 흘러가는 동안 그 가벼움은 그녀의 속을 조용히 관통해 지나갔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오히려 차갑고도 날카롭게. 정희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말을 뱉어낼수록, 그녀는 모욕당한 것 같은 부끄러움에 깊숙이 잠겨갔다. 처음 면접을 보러 갈 때 선물 받은 신발이었다. 발등이 드러난 검은 펌프스. 쉽게 신고 벗을 수 있는, 잠금장치 하나 없는 단순한 디자인.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엔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가 묻어 있었다. 처음엔 너무 단단해서 뒤꿈치가 까질 정도로 아팠던 신발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면접을 거치며 신발은 어느새 닳고 닳아 버렸다. 닳아버린 정도조차 이제는 그녀의 발에 흡수되어, 그 마모마저도 익숙해져 버린 채. 아무런 마음 없이 던진 그의 말은, 신발처럼 서서히 닳아버린 정희의 체면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나도 그런 신발이 있어. 오래된 건 아닌데 낡았어. 편하긴 한데 신선하지 않지. 취업하려고 산 건데, 어느새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게 되더라. 근데 면접관들은 그런 것도 세심하게 보더라고.”
“그러네.”
정희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 깊이 박혀들었다. 그동안 그녀는 절박하고 다급한 삶 속에서 신발의 편안함이 주는 해악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사물을 판단하곤 한다. 그런 속성을 경계해야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구매한 그 신발을 선물 받았을 때, 그것이 지닌 값어치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이제 와서야 그 의미가 서서히 체감되었다. 그 신발이 지닌 편안함은 단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가 계속해서 의지해왔던, 무엇보다도 안주하려는 마음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켜 정희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눈치 챘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래도 그 신발. 편하지? 나도 버리지 못하고 있어. 평소에 자주 신어.”
정희의 시선은 그의 신발에 멈췄다. 새것이었다. 아무 걱정 없는 얼굴에 낮은 굽의 신발이 어울렸다. 그래서 자신의 결함을 발견하는 게 그에게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엉뚱하게도 정희의 시선은 그의 구두 굽에 사로잡혔다. '왜 여자는 언제나 높은 굽의 신발을 신어야 하는 걸까?' 허영심 때문일까? 아니면 남자들에게 예뻐 보이려는 무언의 요구 때문일까?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 질문들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려 한다. 하이힐 역시 그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는 이유를 단순히 성적 매력을 과시하기 위한 경쟁으로만 해석해 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하이힐이 지닌 고유한 의미를 거스르는 일일지도 몰랐다. 하이힐은 단순히 여자들 간의 경쟁 이상의 의미가 있을 터였다.
정희는 언제나 남성보다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세상의 고정된 시선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 시선에 맞추기 위해 선택한 하이힐은, 어쩌면 자기를 높이고 싶다는 열망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열망이 그녀에게 쌓인 피해의식이었다. 남자들 역시 그 다르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작은 신장을 보완하기 위해 하이힐에 집착했던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결국 세상에서 도전이란, 남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보이도록 꾸며내는 기술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꾸며진 모습에서 독창성을 인정받고, 영역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낡은 신발이건 새로운 신발이건, 그건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에 대한 일종의 예의 같은 것이었다.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부적합한 존재로 낙인찍히고, 버림받는 현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도전을 허락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그들 세상의 허무한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선언. 그래서 그 틀에 순응하라는 무언의 명령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열정이란, 그 명령을 잘 수행하는 순종적인 노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정희는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이루길 바라는 듯 간절함이 묻어났지만, 그가 느끼는 절박함에 정희는 더 이상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만…”
그와의 대화는 더 이어질 필요가 없었다. 정희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금 고쳐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그가 무언가 말을 잇는 듯했으나, 그 소리는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기약 없는 외침, “꼭 한번 다시 보자. 꼭.” 그의 목소리는 허공에 흐트러지듯 메아리쳤다. 정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외침이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의미한 바람결에 불과하다는 듯, 흔들리지 않은 걸음으로 나아갔다. 발은 무거웠지만, 뒤로 넘어지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로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그와의 짧은 만남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녀의 안에 깊이 잠재해 있던 무언가를 끌어올렸다.
취업전쟁. 그 치열한 싸움터 속에서 그녀가 맞서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 과정에서 남은 것은 상처와 패배감뿐이었다.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몸서리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본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웃기지도 않네.’ 하지만 흘려버리려 해도 잔잔한 파문처럼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남아 맴돈다. 고개를 젖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검은 하늘은 인공적인 빛들로 더 눈부시게 물들어 있었다. 그 찬란함이 오히려 더 허망하게 느껴졌다. 손에 쥔 핸드폰의 액정이 은은한 빛을 내며 손가락 끝에 닿았다.
PM 08:17.
"많이 늦었네."
정해진 약속이 있던 것처럼, 그러나 정희는 서두를 수 없었다. 숨이 점점 가빠왔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신발이 발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늪에 빠져들 듯, 그럴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누군가 그녀를 끌어올려주길, 구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빈 거리, 공허한 공간뿐이었다. 시커먼 건물을 둘러싼 간판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현란하고 자신만만한 빛이었다. 정희는 생각했다. 예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곧 질투와 부러움으로 뒤집혔다. 화려한 빛 아래서 더 선명해진 차이가 정희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