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커피가게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치형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휘어진 철제 프레임에 매달린 간판은,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매트한 검정 바탕에 얇고 정교한 금박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글자는 세리프체의 고전미를 담고 있었다. 간판 가장자리에는 미세한 주름 같은 디테일이 새겨져 있어 섬세한 장인정신이 느껴졌다. 아래에는 작은 원형 전구들이 줄지어 달려, 저녁이 되면 따뜻한 빛으로 거리를 밝히는 장식 역할을 할 듯했다. 간판 옆에는 작은 커피잔 모양의 로고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지나치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가게에 가까워질수록 정희는 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검은색 격자무늬의 모단하고 차가운 느낌의 문 앞에 서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입구 옆에 커다란 거울이 서 있었다. 거울 속엔 긴 생머리가 어깨를 타고 흐르고,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몸에 딱 맞는 검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 앳된 여자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는 어딘가 지친 기운이 묻어났지만, 그 속엔 안도의 기색도 함께 서려 있었다. 그녀는 거울에는 무심한 듯 성큼성큼 걷다가 잠시 문 앞에서 멍하게 서있었다. 이곳에 속하지 않는 듯한, 그 낯섦을 확인한 것 같이 보였다.
“다녀왔어. 이번에도 안 될 것 같아... 후~”
한때 치열한 검투사였던 정희가 지금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볼을 잔뜩 부풀린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어딘지 안쓰럽게도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짙은 갈색 판초백이 들려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가방도 무거워 보였다. 그녀는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자신에게 관심 없는 상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희보다 더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정희는 가만히 기다렸다. 일이 정리되고 나서야 몸을 돌려 정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어쩌겠니? 결승에서 꼭 그러더라. 이번엔 또 왜 그래?"
차분한 목소리였다. 익숙한 어조 속에 은근한 걱정이 배어 있었다. 짧은 인생을 사라온 사람과, 훨씬 더 오래 살아온 사람. 둘 사이의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잘 알거나 알았던 사이처럼 보였다.
"에이, 면접이 무슨 스포츠도 아니고 결승전이 어딨냐. 그냥 내가 별로인 거겠지. 스펙도 별로고, 남자도 아니고, 내세울 것도 없고. 평생 그런 시선 받아본 적 없어서 그런 기분 모르지? 요즘 자존감 바닥이야.“
"그런 말은 넣어둬. 누구나 그런 순간은 있어. 자, 옷 갈아입고 와. 내가 시원한 청포도 에이드 한 잔 쏠게!" 따끔할 정도로 뼈가 있지만 따스한 말이 정희에게 돌아왔다.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습관적으로 충고하시네. 네네, 알겠습니다. 이 제자는 옷이나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정희는 비아냥거리며 반항적인 기운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도 오해가 없고 상처를 주지 않는 사이가 있을까? 아직 미숙한 자신의 신경질을 마구잡이로 표출해도 괜찮을 만큼 품이 넓은 어른을 만나는 건 큰 복이니까. 정희는 작게 마련된 탈의실로 향했다. 원래 주인이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 만든 곳이었다. 탈의실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좁은, 몸집이 큰 사람이 들어가기에 불편할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지금은 오직 정희만 사용한다. 그래서 어느새 그녀만의 작은 안식처가 되었다. 그 안에 민망할 만큼 작은 사물함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잠금장치가 있는 사물함이었다. 그 문 안쪽에 손바닥만 한 거울이 붙어 있었다. 정희가 가장 많이 보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진 거울이었다. 정희의 얼굴이 슬며시 들어왔다.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무표정했고, 피로는 선명해 보였다.
수십 번의 탈락. 그리고 방금 끝난 면접. 면접관의 조롱이 담겨진 웃음과 건조한 말투가 다시 떠올랐다. 싸늘한 시선, 의도적으로 피하는 눈길, 그 모든 것이 겹쳐지며 몸속 깊이 무력감을 끌어내렸다. 실패를 알리는 전주곡. 그녀는 그 신호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희는 쪼그리고 앉았다. 앉아있기 조차 협소한 그 비좁은 공간이 그녀를 더 비참한 기분으로 이끌었다. 움츠린 몸 아래로 투명한 물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어느새 세상은 온통 희미하게 흐려져 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한참 동안 떨며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내가 문제인 걸까…’
정희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매번 반복되는 취업 실패는 정희에게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처음 몇 번은 별거 아닌 듯 넘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작은 충격에도 휘청거렸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더 세게 때리고, 너보다 강하면 피하라고, 단순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희는 따라 할 수 없었다. 지치고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서 충고의 말들은 달콤했다가 결국 불쾌함으로 끝난다. 마치 녹은 사탕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 같은 것처럼.
정희가 아무리 애써도, 결국 돌아오는 결과는 항상 같았다. "당신은 우리 회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말은 대화의 마침표처럼 단호했다. 세상은 공정함을 외치지만, 정희는 그 안에서 오히려 비겁함을 느꼈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함이란 결국, 이미 세상의 기준에 맞추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스펙, 인맥, 부모의 자산이 경쟁력인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는 결국 정희 자신으로 돌아왔다. 준비되지 않은, 이미 늦어버린, 미숙한. 어학연수조차 한 번 다녀온 적 없는.
그래도 어쩌면 우연이라도 나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 번은 솔직한 면접관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여성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여자는 운전을 못 한다고, 그 이유는 공간지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일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며, 여자는 앞뒤를 살피지 않고 오직 한 방향만 보고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원칙에 집착하고, 고집스러워 성과를 낼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는 정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벽에 박힌 시선처럼 이미 정해진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불쾌했지만, 그의 솔직함은 차라리 편했다. 정희는 어릴 적부터 그런 것에 익숙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항상 잘못을 그녀에게 떠넘겼다. 무언가 속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하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버릇없다는 이유로 혼이 났다. 그럼에도 그때는 적어도 하고 싶은 말을 했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 작은 자유가 비난 속에서도 허락되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도전할 용기를 내기도 전에, "네 잘못이다"라는 말을 먼저 들어야 했다. 대학 시절, 휴학까지 포함해 6년이라는 시간을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를 악물었다는 말은 단지 힘겹게 견뎠다는 뜻이 아니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그와의 만남에서 얻은 상처와 버려진 시간까지 더해져, 정희에게 남은 것은 그 이상의 참담함이었다. '남들처럼 쉽게 졸업하지도 못했는데….' 세상은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거라고 했지만, 정희의 앞에는 허망한 구호들만이 가득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은 사기꾼처럼 보였고, 세상은 결코 희망적이지도, 그들이 말하듯 쉬운 것도 아니었다.
정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부은 눈가를 손끝으로 천천히 매만졌다. 커피가게 홀 안에서, 아직은 어린 정희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체면을 차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 소심하면서도 조신하게, 그녀 안에 남아 있는 작은 겸손함에서 나온 미소였다.
"이제 뭐 해야 해요?"
정희의 말투에는 여전히 여린 기운이 스며있었고, 듣기에 따라서는 애교처럼 들리기도 했다. 울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얼굴을 본 바리스타는 잠시 손을 멈추고 다가와,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충혈 된 눈, 부어오른 얼굴. 그동안 흘렸던 눈물이 모두 새겨져 있었다. 그 감정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세월이 준 감각이었다. 바리스타는 말없이, 만들어둔 청포도 에이드를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무언의 위로가 정희 앞에 놓였다.
정희는 그 조용한 위로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오늘 장사는? 하루 종일 미안."
"이제야 가게 걱정을 하다니? 네가 없는 동안 이 선생님은 직접 고되고 귀찮은 일들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계셨다니까."
그 말은 과장되어 있었고, 아무 내용도 없는 어딘가 헛헛한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속엔 나름의 온기가 있었다. 비록 김빠진 사이다처럼 속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그 따스한 단맛이 정희의 마음에 조용히 담겼다.
정희는 무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말하려는 순간,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 했다. 잠시 멈칫하다가 겨우 내뱉은 말은 떨렸다.
"아까… 대학 때 사귀었던 그를 만났어."
"뭐? 어디서?"
정희는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쿵 울렸다.
"면접장에서… 그가 안내해줬어. 그 회사 다니는 거 같더라고. 처음엔 모른 척했어.“
“그래서?”
“얼굴을 봤을 때,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어. 그 얼굴이, 그 표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서 있는 그 모습이. 그 순간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어. 이제껏 힘겹게 쌓아 올린 평온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 겨우 버텼어. 그는 알아보지 못하는 거 같았어. 그래서 모른 척 했어. 면접 때도 신경이 쓰여서 결국 감정조절을 못했어. 압박면접 비슷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서 대들어 버렸어. 근데 면접이 끝나고 나서 거리에서 다시 마주쳤어.”
그 순간의 감정이 기억났는지 정희는 무언가에 휩쓸리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다시 그녀 안에서 피어올랐다. 오랜 시간 싸워온 그 고통이, 이제 막 회복하기 시작한 그 상처가 다시 덧이 나는 것 같았다.
"우연이 아니었어. 날… 따라온 것 같았어. 그리고 신발이야기를 창피하게 내 신발이 낡았다고..." 정희는 차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이름만으로도, 과거의 상처가 다시 피어오를까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로인해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리스타는 조용히 아일랜드 바의 의자에 앉았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으며, 정희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이렇게 흘러갔다. 그가 정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커피가게를 연 지 어느덧 오 년, 시간이 참 무심하게 지나갔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마치 처음 가게를 시작했을 때의 어색하고 생소했던 감정들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